왕 김연산, 왕의 남자 노공길, 죄인 이억만

공길: 형님, 죄송하지만 전 여기 남겠습니다. 실은 전 왕의 남자, 아니 왕의 포로랍니다. 왕이 너무 멋있는 거 있죠.
왕 김연산, 왕의 남자 노공길, 죄인 이억만

장생: 뜬구름 같은 이 세상, 한판 질탕하게 놀아보세.
왕: 어디 날 함 웃겨 보라우.
공길: 어화둥둥 내 사랑아.
왕: (무슨 미친 수작이야.)
공길: 이러시면서 아바마마가 김 상궁을 침전으로 불러들일 제, 오호 통재라, 애재라, 대군(大君)을 생산하던 어마마마는 분한 마음에 치료를 거부하고 피를 동이로 쏟으며 별빛도곤 빛나던 두 검은 눈동자를 온통 흰빛으로 가렸다네.
왕: (아니, 저 소리는!)
공길: 어마마마가 떠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김 상궁은 후궁에서 정비(正妃)로 평군(平君)은 평대군(平大君)으로 승격하니, 미처 세자로 책봉되지 못한 어린 왕자가 어디 설자리가 있었으랴. 숙부마저 쌍칼을 차고 2인자로 호시탐탐 세조를 꿈꾸고 있었으니!

처선: (방백)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선왕의 두 손에는 평생 핏물이 뚝뚝 들었나이다. 아무리 대동강에 피묻은 손을 씻고 또 씻어도 그 피를 다 씻을 수가 없었나이다. 아라사 오랑캐군에 빌붙어 권력의 칼자루를 쥐고 오랑캐 아라사의 천둥번개 무기와 오랑캐 되국의 구름 병력을 등에 업고 오른손을 들어 남쪽을 가리키니, 불과 3년 만에 수백만의 주검이 쌓이고 쌓여 산을 이루었고 그 피가 흐르고 흘러 서해를 붉게 물들었소. 아직도 그 때 서해로 흘러든 피가 덜 씻겨 누런빛을 띠고 있나이다.
오로지 두 오랑캐 덕분에 천군(天軍)과 민군(民軍)의 매서운 반격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후에는, 선왕이 대뜸 정적을 향해 왼손을 치켜들자, 어제의 동지가 양귀(洋鬼)의 앞잡이가 되고 오늘의 동무가 괴뢰의 첩자가 되었나이다. 수십만의 피가 온 산을 붉게 물들었소이다. 그 독한 피에 낮은 산의 나무란 나무는 다 말라비틀어져 지금도 우리나라 산들은 온통 붉은 나신을 드러내고 있소이다.

왕: (나는 위대하도다! 천재로다! 초인이로다! 어이 이런 내가 오이디푸스의 콤플렉스 따위에 정신을 잃을손가. 아바마마를 하늘처럼 떠받드는 연기를 귀신도 속을 정도로 잘도 하여, 어린 왕자 나 혼자의 꾀로 무소불위의 아바마마 힘을 빌어 김 상궁과 평군을 물먹였으니! 조선의 세조나 명의 영락제를 꿈꾸던 숙부마저 몰아냈으니! 아바마마마저 내 나이 마흔 즈음에 상왕으로 내쫓았으니! 푸하하! 나는 위대하도다! 천재로다! 초인이로다!) 푸하하! (아니! 이런, 내가 웃었잖아.)
죄인: 여기 8천 냥을 대령했나이다.
왕: (한 달 유흥비도 안 되겠군. 그걸로 죄 사함을 받으려고? 고연지고, 어림도 없다. 왕 회장을 못 봤느냐? 직접 가져오라우!)
공길: 나는 위대하도다! 세계 최강이라는 양귀에 홀로 맞서니, 나는 위대하도다. 메소포타미아도 인더스도 나일강도 초인을 칭송하고, 황하도 천재를 어여삐 여기도다.
왕: 제법이구나.
공길: 조선의 연산군은 바보 멍청이, 난봉꾼! 권력이 뭔지 모르고 군대가 뭔지 모르고 정보가 뭔지도 모른 연산군은, 제법 권력의 줄타기도 능했고 제법 배우 노릇도 흉내낸 네로보다 못한 놈! 광대도 과분한 놈! 그런 자니 그저 한 줌밖에 안 되는 자들이 수군거리다가 칼을 빼들자, 혼비백산 쫓겨날 수밖에 없었지. 병신! 어쩌다 내 이름이 그 자와 같다만, 나와 그는 천양지차! 에이, 기분 나빠! 이름을 바꿔야지, 유라가 어떨까. 정일도 괜찮고.
왕: 아첨보다 듣기 좋군. 계속 놀아 봐.

처선: (방백) 전하의 죄악은 선왕을 능가하오. 무자비한 숙청으로 수십만의 정적을 생지옥으로 보내거나 명부에 적혀 있는 것보다 훨씬 빨리 염라대왕 앞으로 보내고 냉혹한 기아 정책을 펼쳐 곡소리도 요란하게 선왕의 무덤을 치장하는 사이 소리소문 없이 권력을 강화하려고 수백만의 생목숨을 자진하게 만들었으니, 과히 전하의 죄업은 선왕을 능가하오.

공길: 내 부귀는 군력(軍力)에서 나오지. 내 영화(榮華)는 왕의 귀 암행어사와 왕의 눈 포도청에서 나오지. 양귀의 괴뢰 네 놈이 아무리 잘 산다 한들, 아무리 강하다 한들, 어찌 천재이자 초인인 위대한 천출장군한테 당하리! 선왕이 이루지 못한 통일대업을 내 어떤 솜씨로 단숨에 이룩하는지, 전세계가 머잖아 멀뚱멀뚱 지켜보리라.
왕: (어림없다. 네 놈이 쌍꺼풀 수술했다고 내가 거들떠나 볼 줄 알았더냐. 내 여태 궁궐 안에 흐드러지게 핀 3천여 송이 꽃도 못다 꺾었거늘, 아무리 잘생겨도 그렇지 네 놈이 수컷인 바에야, 곁눈도 줄 수 없느니라. 에이, 징그러워! 너, 혹 변태냐? 내가 뭐 공민왕인 줄 알았더냐! 통일대업을 이루는 바로 그 다음 날로 네 고단한 몸이 영원히 쉬게 되리라.)

처선: (방백) 만석꾼 이모는 이전의 만석꾼과 전혀 다르옵니다. 조세도 제일 많이 냈고 백성들도 그 일꾼으로 수십만을 거둬들여 제일 많이 호의호식시켰나이다. 또한 그는 전하가 전혀 모르는 먼 외국에 갖가지 기묘한 물건을 만들어 팔아 억만금을 벌어 왔나이다. 그에 비하면 이제 국내의 논밭에서 거둬들이는 만석은 푼돈에 지나지 않는지라, 이미지 관리용으로 모조리 백성에게 갈라 주나이다. 국내에선 일부러 적자를 보나이다.
공길: 혹 더 필요한 게 무엇이나이까? 금송아지를 몇 마리 더 올려보내오리이까? 아예 금코끼리를 몇 마리 올려보내오리이까?
왕: 모든 게 다 내 것인데, 그 무슨 망발이더뇨? 잠시 맡겨서 불린 재산을 곧 몽땅 거두러 갈 테니 너무 깝치지 말라.

처선: (벼락치듯) 전하, 통촉하옵소서! 개혁개방하소서!
왕: 저런 발칙한 것, 수염도 안 나는 늙은이 주제에! 게, 누구 없느냐! 당장 작두를 대령하렷다! 아참, 여기 레이저총이 있었지. (번쩍!)
처선: 악!

장생: 꿈이 현실이요, 현실이 꿈이로다. 자, 공길아, 어서 궁궐에서 빠져나가자.
공길: 형님, 죄송하지만, 저는 여기 남겠습니다. 실은 저, 왕의 남자, 아니, 왕의 포로랍니다. 왕이 너무너무 멋있는 거 있죠.

(2006. 2. 19.)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