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육 개혁에 관한, 한 작은 목소리(7) |
대체 어쩌다가 교육이 이렇게 모든 국민에게 실망만 안겨 주게 되었을까.
대체 어쩌다가 교육에 손을 대면 댈수록 꼬이기만 할까.
대체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했을까.
대체 어디가 잘못되었을까.
대체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대체 어쩌다가 이제는 누구도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교육이 뒤죽박죽이 되었을까. 붕괴 직전의 옛 소련이나 동구권, 그리고 현재의 북한같이 온갖 모순이 한꺼번에 드러나서 모두가 손을 놓고 멀거니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곤두박질치게 되었을까.
우리나라는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해외에 가서 교육을 받아야만 하는가.
우리나라에서는 선진국보다 교육을 잘할 수 없는가.
교육이 표류하게 된 첫째 이유는 교육의 문제점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한 데 있다고 본다. 이것은 마치 열이 난다고 열 내리는 약을 먹이고 오한이 든다고 열 올리는 약을 먹이고 배 아프다고 소화제 먹이고 머리 아프다고 두통약 먹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열이 발생하는 이유는 수백 수천 가지다. 열이 내리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배 아픈 이유도 마찬가지, 머리 아픈 이유도 마찬가지다. 넘어져서 무릎 까진 것처럼 단순한 게 아니다.
원인 치료를 하지 않는 한 고질병은 나을 리가 없다.
우리 나라의 이른바 교육 개혁은 마치 서양 중세 시대에 교회서 흑사병(the Black Death)을 물리친다고 큰 소리 치던 것과 흡사하다.
14세기 유럽에서 흑사병의 원인을 알지 못하고 일제히 사람들은 교회에 모여서 기도를 했다. 그것은 인간들의 죄가 많아서 생긴 병이라고 보았다. 멀쩡한 사람들이 병든 사람을 위해 피가 나도록 절규하듯 기도했다.
결과는 멀쩡하던 사람도 하나같이 환자들과 같이 교회만 갔다 오면 똑같은 병에 걸렸다. 공포가 온 천지에 가득 찼다. 공포의 대왕이 전 유럽을 배회했다.
사제는 금식을 하고 쇠못이 박힌 채찍으로 자기 등을 후려치면서 사금파리 위를 무릎으로 기어가면서 온 영혼을 다 바쳐 회개했다. 이에 어린 양들이 감동해서 다시 교회로 교회로 모여 들었다.
사제는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환자를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졌다. 축복 기도를 했다. 그 죄를 대신 지겠으니 이 불쌍한 어린 양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사제가 너무 피곤했는지 설교 도중 그만 쓰러졌다. 환자는 대신 살아날 줄 알았는데, 맥없이 먼저 죽었다. 이윽고 사제도 죽었다. 모두 죄 많은 자였다.
이제 종말이 다가왔다. 최후의 심판의 날이 다가왔다. 이건 마귀의 짓이다.
--마녀를 잡아라. 모조리 태워 죽여라.
분노가 치밀 대로 치민 군중들은 마녀로 지목된 자를 일제히 사냥하여 불구덩이 속에 밀어 넣었다. 지옥 불 맛을 보여 주었다. 환자와 그 가족이 제일 앞장섰다. 그러나 마녀의 최후 발악인가. 몰려간 사람들이 모조리 쓰러졌다.
군중들은 더욱 분노하여 마녀를 모조리 죽였다. 알고 보니 마녀는 곳곳에 있었다. 마녀도 무수히 죽였지만, 우르르 몰려가서 마녀를 사냥한 자도 다 죽었다. 이윽고 마녀는 다 죽였다.
--모여라, 모여라. 기도하라, 기도하라. 이제 마녀는 사라졌다. 우리 기도를 저주할 자가 없다. 기도하자, 기도하자. 주께서 원하시면 못할 일이 없다. 하루아침에 모든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 믿음이 약한 자들이여, 그대들에게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어도 이 죽음의 심판은 순식간에 끝날 수 있으려니.
그러나 사람들은 멈칫 멈칫 교회에서 물러섰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뭔가 이상했다. 기도할수록 모일수록 피해는 커져갔다. 어떤 때는 기도해도 괜찮았다. 그런데 안심하고 환자와 같이 뜨거운 마음으로 기도하고 나면 하나같이 픽픽 쓰러졌다.
환자 가까이 가지 않으면 괜찮다는 걸 누군가 알아냈다. 이를 알았을 때는 이미 전 인구의 4분의 1이 쓰러졌다. 전 유럽인들이 시골로 시골로 도망을 갔다. 이제 아무도 기도하지 않았다. 대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 오로지 동물적 감각만을 추구했다. 환자는 이제 누구도 돌보지 않았다. 비정했다.
이렇게 믿음이 없고 이기적이고 저열한 사람들은 대부분 무사했다.
전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죽고 나서야 공포는 사라졌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믿음뿐만 아니라 지혜도 주셨다는 걸 그들은 몰랐다. 지혜를 쓸 순간에 지혜를 짓밟고 믿음을 강요하는 것이 맹신(盲信)이요, 우매함을 지혜로 포장하여 이를 높이 치켜들고 무릎 꿇고 절하게 하는 것이 광신(狂信)임을 그들은 몰랐다.
6일은 지혜와 힘을 다해 일하고 1일은 믿음과 사랑을 다해 기도하고 봉사하라는 의미를 몰랐다. 지혜와 힘을 버리고 믿음과 사랑을 다해 기도하고 봉사하는 데 7일을 다 바쳤다. 14일을 다 바쳤다. 21일을 다 바쳤다.
이 때 단 하루 '지혜'를 써서 원인은 몰라도 병을 멀리하는 방법을 알아낸 다음, '힘'을 다해 하루 동안 쉬지 않고 도망간 자가 살아났던 것이다. 6일도 필요 없었다. 지혜와 힘을 쓰는 데 단 이틀이면 충분했었다. 그들은 절대 저열한 자도 믿음 없는 자도 이기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이야말로 지혜로운 자였고 믿음을 이해한 자였다. 남을 생각한 사람이었다. 도망감으로써 자기만 살았던 게 아니다.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도 살렸던 것이다. 당시의 의학 수준으로서는 그것이 최상의 방식이었다.
사실 그들은 교회를 떠났지만, 머잖아 속속 교회에 돌아갔다. 양심의 가책을 받은 데다 어쨌건 흑사병에서 살아난 데 대해 감사한 마음까지 겹쳐 더욱 열심히 기도했다.
이 때 믿음의 밭에 뿌려진 지혜의 싹이 2세기 후 싹튼 것이 종교 개혁이라 할 수 있다.
1517년 한 사제가 용감하게 거대한 교회 조직의 명령을 오로지 신실한 믿음으로 아멘, 아멘 하고 따르지 않고 지혜를 동원하여 그 맹신의 정체를 폭로하게 된다. 그가 바로 저 유명한 마르틴 루터이다.
루터의 최대 공헌은 '믿음과 지혜'가 서로 한 하늘을 함께 이지 못할(不俱戴天) '원수 사이'가 아니라 다정한 '친구 사이'임을 증명한 일이다. 그는 제자를 떠나보내면서 예수가 한 말을 증명한 사람이다.
--뱀과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믿음의 요체는 어느 종교나 순결함(purity)임을 중세 교회가 관료화되고 세속화되면서 모두들 모른 척하고 지냈다. 순결해야 할 믿음에 권위와 명예욕, 아첨, 비열함, 허위, 출세욕 등이 가득 찼었다. 자연히 그들은 혼탁해진 그들의 엉터리 믿음을 꿰뚫어 볼 '지혜'를 두려워해서 믿음을 타락시키려는 악마의 유혹으로 몰아 붙여 지혜를 극도로 억제했던 것이다.
믿음을 방패로 교묘하게 우민화(愚民化) 작업을 한 것이다. 이를 루터가 용감하게 깨뜨린 것이다.
--지혜 없는 믿음은 맹신이요, 광신이다.
이제 우리 나라의 교육부와 중세 시대의 교회를 하나하나 비교해 보자. (2000. 3. 25.)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