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산주의는 종교 |
인민이 조금이라도 허리를 펴는 걸 보면 눈에 불똥이 튀는 공산 간부들이 언제 어느 때 한 달 벌이가 한국 돈으로 만 원도 안 되는 장마당의 매대를 뒤엎어 버릴지 모른다. 그걸 시장경제의 초기 단계라고 강변하는 자들은 독재가 뭔지 빈곤이 뭔지 전혀 모르는 자들이다.
1인 독재 체제를 유지하는 공산국가는 북한 외에도 쿠바 한 나라가 더 있지만, 거기도 북한에 비하면 지상낙원이다. 소련의 지원이 끊어지면서 관광을 중심으로 시장경제를 대거 받아들여 홀로 서기에 어느 정도 성공했기 때문이다. 어딜 가든 노래 소리가 들린다. 유독 북한만이 말로든 행동으로든 백두산보다 높고 동해보다 깊은 과오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도리어 전세계 개도국의 길이요 빛인 한국을 헐뜯는 데 최선봉에 서서 한국의 과거사를 부관참시하는 사상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에 정치권력과 문화권력을 거의 장악한 한국의 친북좌파들이 북한의 독재와 경제파탄에는 '내재적으로 접근'하여 붉은 양탄자를 깔아 주고, 한국의 자유와 풍요에는 이데아에서 직수입한 '절대적 기준'을 들이대어 독화살을 비오듯 퍼붓는다. 남북한 공히 그 방송만 시청하면 마치 한국은 60년 지옥이요 북한은 60년 낙원처럼 들린다.
선악(善惡)과 진위(眞僞)가 완전히 뒤바뀌어 있다. 어쩌면 이리도 몰상식할까. 그 이유는 공산주의는 사상이나 정치체제가 아니라 선악과 진위의 절대기준인 종교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나 김일성이나 김정일은 당연히 교주가 될 수밖에 없다.
고등종교와는 달리 사교(邪敎)는 '내 편 아니면 네 편'이다. '내 편'은 무조건 선이요 진리요, '네 편'은 무조건 악이요, 거짓이다. 따라서 '네 편'을 때리고 가두고 죽이는 것이 최선이다. 그것이 바로 성전(聖戰)이다. 스탈린이나 모택동이 수천 만 명을 죽이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것은 양심의 가책을 전혀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사교(邪敎)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무오류일 수밖에 없는 교주이기 때문이다. 김일성과 김정일도 마찬가지다. 외세를 빌어 제 민족을 3백만이나 학살하고 국경을 폐쇄하여 3백만을 굶겨 죽이고도 김씨 부자는 외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다. 20만 명을 강제수용소에 가두어 그들의 노동력을 최대한 착취하는 과정에서 해마다 2만 명을 죽이고 그 수만큼 해마다 다시 채우길 반세기나 되풀이하고도 그들은 껄껄 웃으며 주지육림에서 노닌다. 양심의 가책을 전혀 받지 않기 때문이다. 도리어 통쾌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종교에 따르면, 마땅히 죽어야 할 자가 죽었고 마땅히 가두어야 할 자를 가두었고 마땅히 맞아야 할 자들을 때렸고 마땅히 굶겨야 할 자를 굶겼을 따름이다. 이 종교가 자생적으로 또는 외생적(外生的)으로 1980년 이후 한국에서 급속히 그 세력을 넓혀갔다. 마침내 이들이 전세계의 흐름과는 정반대로 정치권력을 휘어잡았다. 이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지구상에 오직 하나 그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북한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었다. 정치와 종교를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국내에서 따돌리고 욕하고 가두고 때릴 자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반대하는 자들은 무조건 사악하게 보이니까! 가증하게 보이니까! 원수로 보이니까! 악마로 보이니까! 마녀로 보이니까!
엉터리 종교의 신자는 현실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 교주의 사기와 악행과 음란이 밝은 햇빛 아래 몽땅 드러나도 이들은 절대 믿지 않는다. 보고도 제 눈을 믿지 않고 듣고도 제 귀를 믿지 않는다. 그것은 마녀의 속삭임이요, 음해 공작일 따름이다. 존재할 리 없는 마녀를 찾고 머리카락도 아니 보일 음모를 들춰내기에 혈안이 된다. 그들 사이에선 독선이 강한 자일수록, 말이 표독스러울수록, 위선이 넘칠수록 신앙이 독실한 자로 높이 받들어진다. 이들의 죽음은 자연사가 아닌 한 하나같이 순교로 받아들인다. 단순한 교통사고도 '악마'와 관련되어 있으면 강낭콩보다 붉은 순교로 둔갑한다. 분신자살과 공권력에 의한 죽음은 교세를 확장할 절호의 기회다. 그것은 거룩한 죽음 곧 순교가 되기 때문이다.
대신에 의인이 그들의 사악한 교주가 내려보낸 자객과 싸우다 분사할 때엔 개구리 한 마리 죽는 것보다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교주의 명령 한 마디로 곤히 새벽잠을 자다가 죽은 3백만은 성전에 바쳐진 어쩔 수 없는 희생일 따름이다. 교주의 외면으로 굶어 죽은 3백만도 최후의 성전에 앞서 바쳐진 어쩔 수 없는 희생일 따름이다. 반면에 교주의 거룩한 명령에 따르다가 잡히거나 죽은 성도는 풀어주거나 신원(伸寃)해 주기 위해서 침식을 잊고 도와 주거나 나라의 기둥뿌리를 뽑아서라도 용한 무당을 불러 거창한 푸닥거리를 베푼다.
사교의 교주가 사라짐은 그 신도의 생명이 끊어짐이다. 신도는 교주를 결사적으로 옹위할 수밖에 없다. 진실의 거울과 정의의 칼에 의해 교주와 그 수뇌부가 몽땅 사라져야만, 비로소 신도들의 눈이 밝아진다.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비로소 알아보고 부끄러운 알몸을 가리기 위해 쥐구멍이라도 눈에 띄면 다투어 뛰어든다. 제1대든 제2대든 교주가 건재하는 한 그 신도가 현실을 인정하는 것은, 상식을 되찾는 것은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만큼 어렵다.
(2006. 3.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