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5일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선산마을로 향했다. 지난 4월 건립된 소위 「6·25양민희생자위령탑」을 찾아 나선 것이다.
이 탑은 《6·25때 군인·경찰에 의해 학살된 무고한 마을주민 510명의 영혼을 위로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설립주체는 소위 희생자 유족들이었지만, 도비(道費)·군비(郡費) 등 총 1억 원의 국고(國庫)가 지원됐다.
그러나 실제 무고하게 희생됐다는 주민들은 6·25때 사살된 빨치산과 좌익협력자들이었다. 당시 교전(交戰)을 벌였던 생존자들은 물론 국방부(國防部)나 사학계(史學界) 역시 이를 입증해왔다. 한마디로 이 탑은 희생자 유족들의 일방적 주장을 근거로 세워진 「빨치산 위령탑」인 셈이었다.
右派단체 어르신들 30여 명을 태운 버스가 도착한 5일 오후 3시경, 선산마을에는 살벌(殺伐)한 분위기가 자욱했다. 마을 초입부터 주민들로 보이는 70~80여 명이 나와 서성거렸다. 버스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쳐 죽일 XX들』『살인자·학살자들』등 욕설이 들려왔다.
버스를 타고 평양에 온 것 같았다. 대한민국 땅이 아닌듯했다. 위령탑 주변은 右派단체 회원들에게 죽일 듯 항의하는 성토장·농성장이 되 버렸다. 몇몇 주민들은 멱살을 잡고, 삿대질과 주먹질을 해댔다.
마을 주민 한 명은 트랙터를 몰고 나와 회원들을 향해 돌진했다. 기자 바로 앞에서 간신히 멈춰 섰지만, 모골이 송연해졌다. 『내가 너희 때문에 고아로 살았어』라는 말로 봐선 6·25당시 처형당한 빨치산 후손인 듯 했다.
7월5일 오후 전북 고창. 빨치산·인민군을 토벌했던 국군과 경찰은 학살자(虐殺者)가 되고, 빨치산과 좌익협력자들은 한 맺힌 양민(良民)이 되어 있었다.
선산마을에 세워진 「빨치산 추모탑」은 노무현 세력의 과거사규명이 빚어낸 부산물이다. 과거사委의 소위 「진실규명」 대상은 6·25 관련 사건이 대부분이며, 전체 조사건수의 88.6%인 9,609건을 차지한다. 그 중 82.4%인 7918건은 가해자가 국군·미군 등 우익인 경우이며, 인민군·빨치산 등 좌익이 가해자인 경우는 17.6%에 불과하다.
6·25 당시 좌익의 「양민학살」과 소위 국군·미군 등의 「좌익처형(?)」은 비교대상이 아니다. 전자는 「인민재판」 등 혁명의 일환으로 10만 명 이상 무참히 학살된 것이지만, 후자는 보도연맹 등 몇몇 사건에 불과했다. 그런데 좌파정권 10년을 지나다보니, 6·25 당시 사살된 빨치산·좌익협력자 후손들이 「자신들 선조는 양민(良民)이었다」며 줄지어 과거사委를 찾고 있다.
평생을 연좌제로 시달려 온 이들에게 명예회복과 보상금지급도 가능케 됐다. 일부 지역에서는 과거사委 결정을 앞두고 고창과 같은 「빨치산 추모탑」·「빨치산 위령비」가 세워지고 있다. 검토 중인 주장(主張)들을 기정사실(事實)로 만들기 위함이다.
전북 고창 위령탑 아래 비문에는 『국군11사단 20연대 병력이 고창군 상하면 하장리, 자룡리, 용대리, 고리포 등지에서 양민을 지속적으로 무차별 학살했다』『군사정권 30여 년 동안 말 한마디 못하고 한이 맺힌 채 살아왔다. 한 맺힌 56년 만에 원혼들이 이곳에 안장됐다』는 등의 내용이 나온다.
이에 대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고창군 일대에는 국군 투입 사실 자체가 없으며, 소위 피해자 유족들의 증언 역시 「전해들은 것」 등 불분명하고, 정확하지 않아 신뢰할 수 없다》는 명백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국방부조차 부정하는 사실을 날조해 국군을 학살자로, 빨치산과 좌익협력자들을 양민으로 묘사해놓은 것이다.
고창의 「빨치산 위령탑」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과거사委에 올려진 7918건의 소위 국군 양민학살件이 받아들여질 때, 명예회복·보상금지급은 물론 삼천리 방방곡곡에 7918개 「빨치산 위령탑」이 세워질 것이다. 어린이들은 도처에 널린 「빨치산 위령탑」을 보며 학살자(虐殺者)인 국군·경찰·미군에 대한 증오(憎惡)와 이를 사주한 대한민국에 대한 저주(咀呪), 희생된 「양민(良民) 전사들」의 삶을 배워갈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사라져 갈 것이다.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해결될 것이다? 이건 착각이다. 가증스런 과거사法을 통과시켜 준 것도 한나라당이요, 「빨치산 위령탑」을 방관하는 것도 한나라당이다. 집권 후 적화(赤化)의 흐름을 저지하려면, 혁명(革命) 이상의 신고(辛苦)를 각오해야 가능하다. 자유(自由)를 위해 목숨을 건 사무라이들은 이미 한나라당에서 멸종된 지 오래이다.
2007년 12월 승리가 누구께 가건 대한민국에겐 차악의 선택일 뿐이다. 自由애국우파들은 이제 2008년 이후를 위한 잠행(潛行)에 나서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