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평양회담이 틀어진 것은 「의제(議題)」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회담 발표 이후 북한은 친북파(親北派)조차 받기 어려운 무리한 요구를 했을 것이다. 남쪽에서 난색(難色)을 표하자, 일방적인 연기(延期)통보가 내려왔을지 모른다. 『10월까지 생각해 봐!』하며, 매몰차게 등 돌린 셈이다. 칼자루를 쥔 김정일은 비웃고, 칼끝에서 춤춰야 하는 노무현은 울상이 됐다.
궁금해진다. 북한의 요구가 대체 어느 선(線)까지 갔기에 틀어졌을까?
북한이 소위「제2차 평양회담」에서 한 몫 챙기려는 심보는 여러 차례 목격됐다. 우선, 평양회담은 1년 반 전부터 남북정권 사이에서 계속 논의돼왔는데, 최근 두 달간 남북관계는 극도로 험악(險惡)해졌었다.
① 5~6월 사이 남북(南北)회담은 열리기만 했을 뿐 아무 것도 합의하지 못했고, 차기(次期)일정도 정하지 못했다. ② 6·15축전 시에는 박계동 한나라당 의원 문제로 파행이 일었었다. ③ 8월4일에는 부산에서 열릴 예정인 8·15민족통일대축전 불참(不參)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④ 8월6일에는 강원도 인제 북방 비무장지대(DMZ)에서 북한군이 아군 GP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정부발표대로면, 김만복 국정원장은 8월2~3일, 8월4~5일간 평양에 가서 회담일정을 잡았었다. 북한은 金원장이 2차 방북한 첫 날 8·15민족통일대축전 불참을 통보했고, 2차 방북을 마치고 간 다음 날 총격을 가했다. 이것은 회담 의제로 인한 남북의 불협화음(不協和音)이 8월8일 평양회담 발표를 앞두고 극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8월8일 평양회담 발표가 고작 20일을 앞두고 이뤄졌다는 점도 갈등(葛藤)의 심각상을 드러내 준다. 앞선 94년과 2000년 평양회담은 각각 39일과 62일을 앞두고 발표됐다. 이번 평양회담을 8월에 개최한다는 것은 아마도 6~7월경 합의됐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엄청난 요구로 南北간 줄다리기가 계속되면서 발표일이 늦춰졌을 가능성이 높다.
8월6일 총격사건 이후 盧정권은 북한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을 것이다. 여기는 언론에 보도된 ① 60조 對北지원 문제와 함께 ② 소위 核폐기는 논외(論外)로 하자는 것, 또 ③ NLL을 다루자는 문제도 포함됐을 것이다. 이는 盧정권 스스로 여러 차례 언급했던 내용이기도 하다.
『NLL을 당연히 거론해야 한다』며 『창조적 사고로 합리적 조정을 해야 한다』는 정동영의 8월9일 발언, 『NLL은 영토 개념이 아니라고 본다』는 이재정의 8월10일 발언, 『남북이 상호 일정수준을 양보해서 NLL주변해역을 평화적인 공동어로 구역으로 만들자』는 이해찬의 8월16일 발언.
『핵 문제가 정상회담의 부담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8월12일 김대중의 발언, 核폐기에 대한 아무런 언급 없이 『이번 회담에서 무리한 욕심을 부리지 않을 것』이라던 노무현의 광복절 기념사, 『북핵 문제가 의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8월14일 이해찬의 발언,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북핵 문제에 관한 회담이 아니』라는 8월14일 이수훈(동북아시대위원장)의 발언...
평양회담이 10월로 연기됐다는 것은 북한이 이 이상의 요구를 해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① 60조 對北지원 ② 核폐기 논외(論外), ③ NLL을 넘기는 것 이상의 요구는 무엇이었을까? 60조+알파 對北지원? 국보법철폐? 미군철수? 연방제를 위한 남북합의기구 결성? 이 이상의 것도 있었을까?
혼인날까지 잡아놓고선, 지참금이 적다고 심술을 부리는 게 김정일이다. 청첩장까지 돌린 노무현 세력의 얼굴은 잿빛일 것이다. 더 주자니 역풍이 심할 것이고, 안 주자니 선거판을 뒤집을 뾰족한 수가 없다. 이번에는 수해(水害)로 핑계를 댔지만, 10월도 틀어지면 무슨 말로 둘러댄단 말인가?
이래저래 저들의 패색(敗色)은 짙어만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