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대한민국의 국제 위상은 높다. 대단히 높다. 소련군 대위 김일성의 기습남침으로 초토화된 1950년대의 한국은 '먼지와 똥과 거지의 나라'로 세계의 측은지심을 한 몸에 받았다는 것을, 지금 단 한 나라라도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 한국인 중에 이를 아는 사람도 과연 몇이나 될까. 그만큼 오늘날, 온갖 시련을 딛고 그 때마다 기이한 인연을 만나 초단시간에 초절정 고수로 올라서는 무협지의 주인공처럼 눈 깜빡할 사이에 기적적으로 환골탈퇴한 한국의 위상은 한국의 가을하늘처럼 높다. 대한민국의 대기업 총수가 해외로 출타하면 그 나라의 대통령이나 수상이 버선발로 달려나와, 일본의 극성 아줌마 팬이 욘 사마를 으스러지라 끌어안듯이 그를 뜨겁게 포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하물며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랴! 세계 유일 초대강국 미국의 대통령도 1분의 오차 없이 1초의 낭비 없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깍듯이 예우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전국적으로 드넓은 태평양을 한 달음에 건너갈 듯이 반미의 촛불이 요원의 불길처럼 피어 오른다.
이렇게 대단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반세기 평화의 가장 확실한 보루였음에도 불구하고 귀신에 홀린 듯 어느 날부터 한갓 웃음거리로 전락한 저 반공 정책에 대해 고개를 들 수 없는 원죄 의식이라도 느끼는지, 세계 최악의 공산세습 독재자 앞에만 서면, 대통령 못해 먹겠다던 투정 어린 자존심도 명패를 집어던지던 치기 어린 기개도 이글거리는 태양에 쬔 물안개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어찌 사람이 저리 달라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등박문과 을사오적의 협박에도 끝내 수결(手決)을 거부한 고종의 자존심도, 하다 못해 아무렇게나 지휘봉을 휘두르던 술주정뱅이 옐친의 기개도 없다.
합의된 일정을 일방적으로 한 달이나 확 미뤄도 한 마디 토도 못 단 채 다소곳이 받아들이고, 초대받은 자리에서도 기다리라면 마냥 기다리고, 이리 오라면 이리 오고 저리 가라면 저리 가고, 공산독재자의 거수기 전당에서 방명록에 서명하라면 강정구 뺨치게 공산독재에 대한 덕담이 함축된 서명을 일필휘지하고, 혼자 진지 듭시라면 강제수용소의 1만 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진수성찬을 혼자 맛있게 듭시고, 혼자 독재 찬양 쇼를 구경하라면 손님의 예를 최대한 갖추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구경하다가 절정의 수령님 찬양 순간에 꼭두각시 관중과 노예 어린이들이 유도하는 대로 벌떡 일어나 박수를 보내고, 안개처럼 모호한 미사여구뿐 대한민국의 절대다수 국민이 꼭 하고 싶은 말은 단 한 구절도 없는 선언문에 수표(서명)하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힘차게 또박또박 수표한다.
자유왕래는커녕 편지 한 통도 전화 한 통도 오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거창한 남북 평화번영 선언문이 또 발표되었다. 일방적으로 김정일에게 유리한 것뿐이다. 불리한 것은 절대 지키지 않지만 이건 유리한 거니까 한국이 안 지키면, 김정일은 바로 서해로 함정을 내려보내고 손해나는 쪽은 누군데 당장 개성과 금강 두 곳의 길을 일방적으로 차단할 것이다. 그러면 벌벌 떨며 한국의 통일부 장관과 국정원 원장이 석고대죄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번에, 국민 지지율 20% 미만에 실질적인 잔여 임기가 2개월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지지율 100%(믿거나 말거나)에 제2대 종신 수령인 북한의 김정일에게 약속한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북측이 금강산과 개성에 이어 백두산과 해주와 안변과 남포에 장소만 지정하면, 남측은 지체없이 뜨거운 민족애를 발휘하여 최신식 현금자동출납기를 기존의 2대에 추가하여 4대 더 설치하고 그 속에 39호실의 집사가 누르면 언제든지 잭 팟이 터진 빠찡코처럼 달러가 쏟아져 나오도록 매일 달러로 가득가득 채운다.
이번에는 중소기업만이 아니라 대기업도 민족자본 형성에 통크게 기여해야 한다는 장군님의 말씀을 대기업 총수들이 직접 들은 만큼 섭섭지 않게 성의를 표시해야 할 것이다. 국내에만 들어오면 얼마나 무서운지,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한국의 대기업 총수를 길들이는 데 도가 텄다. 거지와 깡패와 도둑의 땅에서 유일신으로 군림하는 김정일과 한국의 대기업 회장이 우연히 같은 날 어떤 외국에 가면, 누가 거지 대접받고 누가 황제 대우받을지는 뻔하지만, 한국의 대통령은 그런 김정일한테는 안절부절못하나 한국의 대기업 회장한테는 가을날의 서릿발처럼 위엄의 깃을 곧추세운다. 그들로 하여금 방장 죽어 가는 표정을 지으며 휠체어에 몸을 싣게 만드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예정대로 정기적인 세무조사를 실시하겠다는 국정 브리핑을 담담히 발표하고 모든 방송국에서 느닷없이 편법 상속을 개탄하는 특집을 내보내면, 그 날로 한국의 대기업은 초상난 집보다 한층 침울해진다.
둘째, 서해안에 남북 공동평화구역을 설정한다.
북한 안보에는 옆구리를 찌르는 비수요, 한국 안보에는 옛날로 치면 거북선이요 오늘날로 치면 항공모함인 북방한계선(NLL)을 공공연히 무력화하겠다는 것이다. 경제만이 아니라 안보마저 무조건 양보하겠다는 뜻이다. 머리에 북핵을 이고 서해의 한국 해군을 무장해제하겠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연이은 두 좌파정부가 남북관계를 형제관계가 아니라 주종관계로 만든 것은 무엇보다 국민의 직접 선거로 구성된 국회가 남북관계에 대해 아무 일도 않고 직무를 유기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쌀 한 톨 달러 한 푼 국회 동의 없이는 절대 대북한 예산은 정부가 자의적으로 집행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정통우익의 국회의원들은 목숨을 걸고 북한 주민이 아니라 공산독재자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남북합의는 모조리 폐기 처분해야 한다. 단, 독재자가 아닌 북한 주민에게 유리한 것은 여야를 떠나 전폭적으로 지지하되, 지원한 것이 북한 주민의 입으로 들어가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전임 대통령이 서명한 것을 후임이 감히 '우짤래', 하는 안하무인의 비민주적인 발언을 두고두고 부끄러워하게 국회가 나서야 한다. 그렇게만 하면, 대한민국은 불안하고 초조하고 위태롭게 하고 북한 주민은 배고프고 아프고 슬프게 하는 남북합의는 더 이상 남발할 수 없을 것이다.
(2007. 10.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