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언제, 왜 발생할까? 여러 실제적 원인과 분석적 이론이 있지만, 크게 나누면 다음 3가지가 아닐까 한다. 첫째는 힘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 둘째는 절대 권력자의 권력기반이 급격히 무너질 때, 셋째는 당당하게 선전포고하고 노골적으로 영토를 넓히려고 할 때!
소련의 비밀문서가 일부 해제되면서 6·25 사변의 도발자 겸 주도자는 거의 밝혀졌다. 김일성과 스탈린과 모택동, 이 3인에 의해 전쟁이 도발되고 주도된 것이다. 그런데 소련의 붉은 군대가 점령했다는 점은 같지만, 동서독이나 동구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고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도 전혀 없었다. 그것은 양차 세계대전이 유럽을 중심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두 전쟁을 교훈 삼아 미국과 소련이 각각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와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만들어 팽팽한 군사적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구는 미국의 질서를 따랐고 동구는 소련의 질서에 편입되었다. 미국의 질서란 안보는 미국에 맡기고 군사보다 경제에 매진하는 것이었는데, 그 기본은 자유민주와 시장경제와 자유무역이었다. 이게 웬 떡이냐 하며, 서구는 미국의 안보우산 아래서 희희낙락했다. 소련의 질서란 안보의 지휘권은 소련에 넘기고 경제보다 군사에 치중하는 것이었는데, 그 기본은 공산당 일당 독재와 전국의 군사조직화와 '경제 까막눈' 공산당의 명령과 지시에 무조건 복종하는 계획경제와 공산권끼리의 오순도순 물물교환이었다. 아닌 밤중에 웬 홍두깨냐 툴툴거리며, 동구는 소련의 안보우산 아래서 전전긍긍했다.
동구와 비교해 보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 것은 힘의 균형이 무너진 것이 가장 큰 원인임을 알 수 있다. 겉보기엔 1948년 12월 소련군이 철수했고 이어서 1949년 6월 미군도 철수했기 때문에, 힘의 균형이 이뤄진 것 같았다.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첫째, 북한은 일본 천황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의 서릿발 명령에 따라 일제 말보다 더 철저하게 '인민'총동원체제가 갖춰졌다. '삐약' 소리를 내는 시위조차 상상할 수 없었고, 탐관오리의 학정에 시달리던 전봉준이 돌렸던 사발통문 하나 돌릴 수 없었다.
둘째, 북한은 소련의 지원으로 무기 체제가 한국보다 월등했다. 말 그대로 일당백인 탱크 242대(2만4천2백 명의 군대와 맞먹음)와 전투기 및 폭격기 200여 대, 야포와 박격포 등에 국군은 '깜'도 안 되었다.
셋째, 인민군은 중무장(重武裝)한 13만5천 명이었고, 국군은 경무장(輕武裝)한 6만5천 명이었다. 한국에는 거기에 해양경찰대 4천 명, 경찰 4만5천 명이 더 있었다. 이를 다 합해도 11만 명밖에 안 되었다. 인구는 이 당시도 한국이 북한보다 2배 가량 되었는데, 경찰을 뺀 군대는 무장(武裝) 정도를 따지지 않아도 북한이 오히려 2배 가량 많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미군은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와 시장경제와 평화를 지향했기 때문에, 한국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군사 조직화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사실 6만5천 명의 군대를 보유한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위는 자유민주의 원칙에 따라 국민학생도 일으킬 수 있었고, 경무대의 권위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에 소총 몇 자루만 갖춘 집단도 수틀리면 경찰과 군대를 상대로 유격전을 펼치는 것이 가능했다. 그게 빨치산의 준동(蠢動)이었다. 북한에서 내려온 자들이든 자생 공산주의자든 그들은 이리의 눈을 번득이는 소련과 독사의 혀를 날름거리는 북한의 지령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천만다행으로 공산주의자의 선전선동을 물 먹인 것이 이승만의 농지개혁이었다. 그것은 과히 천지개벽이었다. 농민은 그 당시 인구의 약 70%를 차지했는데, 이들이 2천 년 내지 3천년 동안 조상들이 품었던 비원을 풀고 거의 똑같이 농지를 나눠 갖게 되자, 더 이상 북한의 농지개혁에 대한 부러움이 사라졌다. 기껏해야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유상몰수 유상분배보다 낫다는 정도였는데, 그걸로는 오늘날로 치면 인구의 70%가 로또 당선된 것과 같은 '대횡재'에 자면서도 스스로의 허벅지를 꼬집던 농민들을 더 이상 선동할 수가 없었다. 과연 북한식 농지개혁이 실지로 얼마나 좋은지 아니면 얼마나 나쁜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내 손안의 새 한 마리가 숲 속의 새 두 마리'보다 나은 법인데, 실지로는 북한의 농지개혁은 기만적인 현물세 때문에 '내 손안의 새가 두 마리고 되려 숲 속의 새가 한 마리'임을 남침한 인민군이 이미 개혁한 농지를 다시 개악하면서 현물세로 소출의 30% 이상을 갈취해 가는 것을 보고 자유대한의 농민들은 이상과 환상의 차이를 마음이 아닌 몸으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깨달았다.
박헌영은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다급하게 거짓 보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권력기반이 통째로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과 김일성과 모택동이 누군데, 공산당이 밀고 내려오면 한국 전체가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라는 거짓 보고를 곧이곧대로 믿었을 리가 없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이든 박헌영의 거짓 보고든 에덴동산의 뱀보다 교활했던 두 황제가 그것을 믿고 남침을 윤허했을 리가 없다.
결정적인 것은 힘의 균형이 급격히 무너진 것이다. 전쟁에서 공격은 기본적으로 수비의 3배에 해당하는 전력이 확보될 때 감행된다. 소련군과 미군이 철수한 것으로 겉보기에 남북의 군사력은 1:1이었다. 그런데 인구는 한국이 2배 많으니까 막상 전쟁이 시작되면 군인 숫자는 금방 역전될 수 있다. 북한이 오히려 불리했다. 숫자에 관계없이 적을 압도할 수 있는 게 바로 무기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아랍을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무기 면에서 북한이 월등했다. 또한 정보전에서 북한이 한국을 압도했는데, 한국은 '갓 태어난 아이 허공 휘젓기' 식으로 자유의 장미꽃이 봉오리도 못 맺고 시든 북한의 인민군을 거의 파악하지 못했지만, 북한은 주머니의 동전을 헤아리듯이 자유의 호박꽃이 만발한 한국의 국군을 속속들이 헤아리고 있었다. 탱크와 야포와 전투기, 이 셋으로 삽시간에 한국을 쓸어 버릴 수 있다는 것에, 김일성은 대마초를 복용한 듯 흥분되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결국 전쟁은 사람이 하는 것이니까! 북한의 급조된 인민군이 역시 급조된 국군을 과연 무기체제가 우수하다고 해서 파죽지세로 부산의 태종대까지 내려갈 수 있을까.
지금까지 거의 주목하지 못한 결정적인 요소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중공군이었다. 장개석을 대만에 가둬 버린 후, 1949년 10월 모택동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다. 통일전선의 일환으로 55개 소수민족에게 통일 후 독립을 철석같이 약속했지만, 그런 약속은 원래 지킬 마음이 추호도 없이 하는 모래 약속이었다. 모택동은 통일되자마자 55개 소수 민족을 짓밟았다. 이 때 제일 군사력이 강한 족속이 조선족이었다. 이들은 동북항일연군에 무려 5만 명이나 참여했다. 이들을 절대 내버려둘 수 없었다. 언제 만주에서 반란을 일으킬지 몰랐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기가 막힌 방법을 강구했다. 이들을 거의 대부분 '고향 앞으로' 보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 북한의 5사단, 6사단, 7사단이다. 그래서 북한의 군대는 갑자기 30% 이상 증가되었다. 사실상 이 군대는 북한의 나머지 군대를 다 합한 것보다 셌다. 왜냐하면 이들은 수십 년간 드넓은 만주와 중원에서 실전을 쌓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제일 중요한 서부와 중부의 전선으로 내려보냈다. 한국이 사변 후에 북한에게 개성을 빼앗긴 것은 전력으로 보아 당연했다. 세계최강 미군이 도와 주어도 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정도로 인민군으로 변신한 중공군이 강했다.
김일성은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이미 스탈린의 각본에 따라 스탈린에 개같이 충성한 김일성이 확고한 권력체제를 구축해 두었기 때문에, 새로 편입된 5만 인민군은 전원 김일성의 손끝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도 원래 중공의 동북항일연군 소속이었는데, 아직도 불분명한 이유로 50여명을 이끌고 소련으로 튀었고, 그 덕분에 대를 이어 절대권력을 누리게 되었다. 아마 김일성은 모택동 해방군에서 쫓겨났을 가능성도 높다. 비리를 저질렀거나 소련의 첩자 노릇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언젠가 중국의 비밀문서들이 해제되면 밝혀질지 모른다. 하여간 김일성이 소련으로 가지 않고 만주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5만 명 중의 1명으로 1945년에 겨우 대위였었기 때문에 잘해야 영관급 장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줄 한 번 잘 선 덕분에 시베리아 죄수 등 오합지졸로 구성된 소련군보다, 빼앗은 시계를 주렁주렁 달고 철수한 소련군 4만보다 전투능력이 뛰어났을 게 틀림없는 옛 동북항일연군 5만 명을 자신의 수하에 거느리게 된 것이다. 나는 6·25 직전에 발생했던 결정적인 힘의 불균형은 바로 이것이라고 본다.
소련군과 미군이 철수하여 남북은 표면적으로 전력이 1:1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중공군 5만이 북한에 1949년에서 1950년에 걸쳐서 6·25 전에 투입됨으로써 남북의 전력은 1:2가 되었다. 이것도 표면적인 것일 뿐 중공군에서 옷만 바꿔 입은 이들의 전력은 실전 경험이 거의 없는 남북한 군대를 모두 압도했다. 최소한 이들의 전력은 기존의 남북 전력 전체를 합한 것보다 강했다. 순식간에 남북의 전력이 1:3으로 바뀐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북한은 스탈린이 넘겨준 무기 체제가 월등했다. 이를 감안하면 1:4! 뿐만 아니라 북한은 중소(中蘇)와 고작 개울물처럼 찰랑거리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있었고, 한국은 미국과 지구 반 바퀴 저 너머에까지 넘실거리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또한 평양은 38선에서 독수리도 큰 맘 먹고 날아가야 할 만큼 아득히 먼 곳에 있지만, 서울은 메뚜기도 단번에 포르릉 날아갈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다. 이 둘을 감안하면 1:5, 1:6! 아마 김일성은 날 잡아 놓은 새신랑처럼 몇 달 동안 흥분 속에 지새웠을 것이다. 실지로 남침과 더불어 파죽지세로 인민군은 부산을 향해 폭풍처럼 달려갈 수 있었다.
2007년 10월의 상황은 어떨까. 힘의 균형은 지켜지고 있는가. 김정일의 권력은 여전히 탄탄한가. 노골적으로 정복 전쟁, 또는 통일 전쟁을 선언하고 내려올 수 있을까. 나는 세 번째는 고려 상황이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첫째와 둘째는 면밀히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는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과 장사정포와 생화학무기와 땅굴이다. 이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주한미군뿐이다. 그런데 미군은 이미 철수 전에 전시작전권을 한국에 이양하기로 합의했다. 청이 임경업 장군의 군대를 우회하여 한양으로 내려왔듯이, 미군 철수 전이라도 미군을 우회하여 다시 말해서 미군을 전혀 건들지 않고 인민군이 동서남북에서 동시에 출현할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둘째는 햇볕정책이다. 햇볕정책으로 한국은 정신적으로 무장해제되었다. 여야 할 것 없다. 여권이 좀 더 노골적일 뿐이다. 1950년에서 1나노미터도 변하지 않은 북한의 공산집단에 반대하면, 웬 시대착오적인 빨갱이 타령이냐고 난리 난다.
'수구보수 물러가라! 군사독재 망령 물러가라! 친일파 후손 물러가라!'
인기 절정의 야당마저 벌어 놓은 표를 잃을까 봐, 그저 '비핵 3000'이라는 애매하고 모호하고 환상적이고 몽상적인 공약을 방방 띄울 뿐이다.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린 이념 논쟁은 감히 엄두도 못 낸다.
월남의 정글에서 베트콩과 월맹군은 물론 미군보다 용맹하고 지혜로웠던 막강 국군이, 월남의 귀신도 잡고 월남의 민심도 잡던 국군이 이제 인민군은커녕 미군 철수를 외치는 데모대 하나 막지 못하고 얻어터진다. 실컷 얻어터진 걸 보고 국군 수뇌부로부터 크게 칭찬 받는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군인이라 위에서 열중쉬어, 하면 한 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좋고 하루도 좋고 열흘도 좋고 열중쉬어, 하는 게 군인이다.
김정일의 권력기반은 겉보기에는 대단히 탄탄한 것 같다. 과연 그럴까. 면밀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2007년 포함 향후 몇 년이 1950년보다 안전하다고 절대 장담하지 못하겠다.
(2007. 10. 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