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계은퇴 번복한 ‘드골’, 그리고 李會昌

‘昌’의 生死를 쥔 보수의 선택 - ‘무색정권교체’ 이냐 ‘좌파 정권종식’이냐 드골 하면 먼저 연상되는 것은 ‘레지스탕스’ ‘자유 프랑스 망명정부의 수반’, ‘자유 프랑스’,‘위대한 프랑스’ 등의 영웅적 수식어이다. 이회창 前총재 하면 ‘대쪽’ ‘원칙론자’ ‘거짓 폭로의 희생자’ ‘억울한 참패’ 등이다. 대선을 불과 40여일 남기고 정계은퇴를 번복하고 다시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것도 무소속으로.

그의 정계은퇴 번복을 두고 보수층을 대변하는 ‘조중동’까지 싸잡아 융단 포격을 퍼붓고 있다. 문제는 비난의 근거와 명분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실현’과 ‘좌파정권 종식’ ‘통일안보’ ‘경제발전’ ‘ 사회복지’ 등의 ‘시대정신’를 얼마나 구현할 수 있는가라는 잣대가 아니라 기존의 정당들은 자신들과의 정치적 역학관계에서 ‘곱하기 뺄셈’으로 비방하거나 침묵하고 있기에 그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드골, 마지노선의 무용지물 예고

1890년 11월22일 프랑스의 릴에서 태어난 드골의 집안은 대대로 애국 지사를 배출한 명문가였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수개월 전에 이미 전쟁의 반발 가능성을 예측한 드골은 “아무리 정부가 마지노선을 강화한다 하더라도 敵은 이것을 우회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한 군데라도 틈이 생기면 마지노선 전체가 일시에 무용지물이 될 것이며 만약 이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파리는 겨우 자동차로 6시간의 거리에 놓이게 된다”고 경고했다. 그의 예견대로 독일군은 1945년 5월 10일 마지노선을 우회하여 프랑스로 물밀 듯 진격해 들어왔다. 그때서야 군 지도부는 드골의 경고를 기억해 내고 평소 탱크부대의 육성을 부르짖었던 드골을 서둘러 제5군단의 탱크 부대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어 파리는 점령되고 만다.

파죽지세로 밀린 프랑스 내각에서는 독일과의 휴전협정에 서명하라는 패전론자들의 압력에 시달린 폴 레이노 수상은 드골을 영국의 지원을 얻기 위해 처칠을 특사로 파견했다. 처칠은 드골의 애국심에 공감하여 영국-프랑스 연합 동맹국 창설을 제의했다. 이 제의는 영국과 프랑스가 하나의 정부, 하나의 군대를 갖는 것을 의미했고 그럴 경우 프랑스가 영국에 종속될 수도 있었다. ‘프랑스 자존심’이 자신의 존재 이유였던 드골이었지만 먼저 위기의 조국을 구하는 것이 대의라고 드골은 생각했다.

영국과의 협력방안을 마련하고 돌아왔지만 그 사이 서명 압력을 견디지 못한 레이노 수상은 사임하고 드골의 옛 은사인 앙리 페탱 장군이 수반이 된 ‘비시정권’이 수립되어 휴전협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역자’의 기로에 선 드골

변화된 상황에 투항할 것인가 아니면 간절히 도움을 요청하는 은사인 페탱 장군을 배신하고 ‘프랑스의 명예’를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인가라는 기로에 선 드골은 비록 새로운 비시정권으로부터 ‘반역자’라는 딱지를 받겠지만 ‘자유 프랑스’이라는 ‘대의’를 선택했다. 드골은 ‘위대함이 없는 프랑스는 이미 프랑스가 아니다’라는 선언을 하고 1940년 6월17일 소형 비행기에 몸을 싣고 런던을 향해 망명길에 올랐다. 드골의 이런 운명적 결정에 처칠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드골은 이 작은 비행기에 그의 조국 프랑스의 명예를 싣고 왔다” 고.

런던 도착 이틀 후 드골은 영국 BBC 방송을 통해 ‘명예로운 소명’이라는 유명한 연설을 한다. 본국 국민과 해외 프랑스인 모두에게 승리를 확신하는 목소리로 對獨항전을 호소하면서 “비록 프랑스가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결코 전쟁에서까지 완전히 패한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하였다. 마침내 드골은 독일과 맞서 싸우는 프랑스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1940년 7월21일 불과 7000여 명의 수준인 ‘자유 프랑스군’은 소수지만 프랑스 비행사가 ‘자유 프랑스군’의 이름으로 영국군과 대독 폭격 작전에 참가함으로써 실질적 해방전쟁을 수행하게 된다. 1940년 8월 7일 영국은 드골을 ‘모든 자유 프랑스인들의 수반’으로 인정함으로써 드골은 비시정부 외에 또 다른 대표단체로 공인받게 되었다.

1940년 10월 페탱과 히틀러가 회동하여 독일과의 합작을 기도함으로써 프랑스 국민은 비로서 이중적 페탱 정권의 실체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간 비시 정부의 히틀러에 대한 모호한 기회주의적 태도의 실체를 알고 격분한 프랑스 국민들은 反獨 레지스탕스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 해 말 자유 프랑스 군은 일약 4만여 명의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2차 대전 반발 초기 미국은 비시정권을 프랑스 대표로 인정하고 ‘자유 프랑스’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미국은 1941년 12월 진주만이 공격 받고 난 뒤 자유 프랑스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인정하게 된다.

1943년 5월, 마침내 드골은 북아프리카의 프랑스 임시정부의 공동 대통령으로 지로장군과 함께 추대된다. 프랑스 식민지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얻고 있는 드골을 본 지로장군은 효율적인 대독항전을 위해서 자진 사임함으로써 드골은 단독 수반이 되었다.

1944년 6월 6일, 프랑스의 해방을 열고 독일의 패망의 전주곡인 역사적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당시 이 작전 계획을 드골은 불과 며칠 전에 루스벨트로부터 통고 받을 만큼 미국으로부터 드골의 애국심이 견제받았다. 드골은 단지 조국의 해방만을 위해 총을 든 것이 아니라 ‘위대한 프랑스’를 재건하기 위해 레지스탕스와 함께 대독항전을 벌였다.


비시정권 교체 이후 드골, 임시 정부 대통령직 사임

이즈음 프랑스 내 두 종류의 해방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하나는 드골 주도의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자 레지스탕스의 해방운동이었다. ‘파리의 정권교체’이라는 목표는 동일하였지만 비시정권교체 이후의 재건을 어떻게 공산주의 레지스탕스와 함께 해나갈 것인가가 큰 문제로 부상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25일 드골과 자유 프랑스 군은 파리를 무혈 입성하고 파리 주둔 사령관 폰 홀티츠로부터 항복 서명을 받아냈다.

공산당을 포함한 주요 5개 정당이 만든 신헌법 초안에는 대통령에게 최고 통치권을 위임하지 않는 부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드골은 국민들이 자신의 생각과 달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지체없이 대통령직을 버리는 쪽으로 결정을 한다. 1946년 1월 20일 드골은 예외적으로 일요일에 내각회의를 소집하여 사임을 발표한다. 그리고 ‘라 봐스리’라는 시골로 돌아가 소박한 보통 시민으로 생활했다.


좌파 정국, 제4공화국의 혼란

드골이 사임 후 프랑스의 정치는 3대 좌파 정당인 공산당, 사회당, 인민 공화 운동파의 인민전선이 주도하게 된다. 이들이 제정한 헌법이 1946년 말 국민투표를 통과하여 제4공화국이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드골이 우려했던 바대로 1947년 이후 의회와 내각 사이의 대립과 분열로 정국이 혼미와 불안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불안한 좌파 연립정권으로 인한 지속적인 불안정성이 국민들 사이에 정치 냉소와 무관심을 만연시켰다. 이제 프랑스 정치는 레지스탕스 운동으로부터 이어온 정열과 재건 정신은 사라지고 단지 정권 쟁탈전의 장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국민은 정치집단에 분노하면서 정파를 초월한 진정한 애국심을 가진 새로운 리더십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1946년 제4공화국이 들어선 이후 시작된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은 1954년 6월 프랑스가 패배를 선언으로 전쟁이 끝났지만, 얼마되지 않아 알제리에서 전쟁(1954-1962)이 다시 터졌다. 1958년 5월 알제리 수도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고 심지어 알제리의 프랑스 군부는 본국 정부가 제대로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면 자신들이 스스로 처리하겠다며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대다수 프랑스 국민들은 드골을 떠올렸다. 알제리 군부도 드골이라면 사태를 해결해 줄 것으로 보았다.


드골의 정계은퇴 번복은 ‘조국의 부름’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은 정계은퇴 이후 12년간을 거의 은둔하듯 살았다. 그러나 조국이 위기에 봉착하여 자신의 복귀를 바라는 국민들의 요구에 평생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명예’요 ‘자존심’이라고 살아온 드골은 자신 정계복귀를 ‘권력에 대한 노욕’으로 매도하는 반대정파의 욕을 먹으면서 ‘자신의 명예’를 버리고 ‘조국의 부름이란 대의’에 순응하느냐는 깊은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드골의 복귀에 대해서 좌파가 그의 ‘독재적 성향’을 비판했는데 이에 대한 드골의 대답은 아주 명쾌하였다. “ 과거에 내가 국민들의 기본권을 침해하려는 어떠한 시도를 한 적이 있었느냐? 오히려 나는 그 반대로 국민들의 자유를 회복해 주었다. 그런 내가 느즈막한 이 나이에 무엇 때문에 독재자의 오명을 쓸 일을 할 것인가?”

1959년 1월8일 제5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드골은 1968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강력한 대통령 권한을 행사함으로서 의회와 정당의 혼란으로 점철된 프랑스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종식시켰다.

드골에게 국가 수반이란 단지 권력욕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가 열망한 것은 조국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제안한 헌법개정안이 1969년 4월 15일 국민투표에서 아주 근소하게 부결된 것을 보고 1946년에 그랬던 것처럼 남은 대통령 임기를 채우지 않고 ‘라 봐스리’의 시골 집으로 떠나갔다. 귀향한 지 얼마되지 않아 1970년 11월 9일 숨을 거둔다.

그의 장례는 유언대로 가족장으로 치루어졌고 묘비에는 아무런 수식어도 새겨지지 않았다. 단지 표지뿐이다. “샤를 드골(1890 – 1970)”


11월7일 昌의 정계복귀의 진정성과 평가는 私益에 뒤얽힌 정치집단이 옳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밝힌 다음의 선언문을 ‘시대정신’을 담지하고 있는 국민이 얼마만큼 가슴으로 피부로 느끼느냐에 달려있다. ‘정계은퇴 번복’ 자체만 두고 비난하는 것은 개인에 대한 도덕적 평가일 수는 있겠지만 역사적 평가로 보기에는 어렵다. 정치적 명분과 리더십에 대한 평가는 결국은 투표로 심판하는 국민의 몫이다.

“평생을 지켜왔던 개인적 명예와 자존심조차 다 버렸습니다. 이제 저에게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험난한 가시밭길을 가고자 합니다….만약 제가 선택한 길이 올바르지 않다는 국민적 판단이 분명해지면 저는 언제라도 국민의 뜻을 받들어 살신 성인(殺身成仁)의 결단을 내릴 것입니다.”

평생 ‘자유 프랑스 위대한 프랑스’를 가슴에 품고 살았던 드골 같은 지도자를 오늘의 한국에서도 보고 싶은 것이 대다수 한국민의 열망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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