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의 겉말과 속뜻

박근혜는 한나라당에 의한 정권교체를 누구보다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그 당은 반드시 자유민주와 시장경제를 사수하는 정당이어야 한다.

 범여권이 김대중의 입만 쳐다볼 때, 거대 야당은 박근혜의 손만 훔쳐 본다. 한나라당의 후보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전 대표 무소속 이회창 중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 주고 누구의 손을 뿌리치느냐, 라는 초미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박근혜가 마침내 그린스펀의 입을 열었다. 언론은 일제히 이렇게 제목을 뽑았다.
--이회창의 출마는 정도가 아니다!
 그가 이명박의 손을 들어 주었다는 뜻이다. 다그치던 조선과 동아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 부채질하던 한겨레와 KBS가 약간 김빠진 표정을 지으며 부지런히 머리를 굴린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전 의장 앨런 그린스펀은 18년간의 재임기간 동안 애매모호한 화법으로 유명했다. 희한하게도 그는 똑 부러지게 말하는 법이 없었지만, 미국과 세계의 보이지 않는 손은 귀신같이 그 뜻을 알아차렸다.

 상스럽고 험하고 직설적이고 과장된 말이 난무하는 한국의 조폭형 정가에서 박근혜는 고상하고 우아하고 완곡하고 절제된 말을 사용하는 특이한 존재다. 그의 말은 곱씹을수록 뜻이 점점 명확해지고 연결할수록 일관성이 점점 뚜렷해진다. 번복할 일이 없고 변명할 거리도 없고 사과할 일도 없다. 한국의 그린스펀이라 할 만하다. 때로는 '대전은요?', '오만의 극치' 등 극히 짧은 어구로, 때로는 '저를 도운 것이 죄인가요?' 등 단문으로 단도를 들이밀 듯이  핵심을 찌른다는 점에서 그린스펀보다 뛰어난 화법을 구사하고 있는 듯하다.   

 박근혜는 원칙과 일관성을 중시한다. 이번의 말에도 예외가 아니다. 이에 해당하는 말들이 다음과 같은 것이다.

'한나라당으로 정권교체가 돼야 한다는 처음 생각에서 변함이 없다.'
'이회창 전 총재가 대선에 출마한 것은 정도가 아니라고 본다.'
'저는 한나라당 당원이고, 한나라당 후보가 이명박 후보인 것은 변함이 없다.'

 사정이야 어쨌건 박근혜는 당의 경선에서 이명박에게 졌다. 한나라당의 후보는 이명박이다. 이회창은 경선에 참여하지 않고 당원으로서 이명박의 선거운동을 돕지 않고 탈당하여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분명히! 이것은 정도가 아니다.

 박근혜는 실질과 상식도 중시한다. 입으로만 민주는 곤란하다. 그건 권력을 잡기 위한 방편일 따름이다. 따라서 민주라면 정당부터 민주적이어야 한다. 당 이념이든 의사결정 과정이든 조직 운영이든 정치자금 입출금이든 민주적이어야 한다. 이제껏 대한민국은 한번도 이런 정당을 가져본 적이 없다. 초등학생이면 알 말한 이런 지극히 상식적이고 너무도 실질적인 민주가 정치의 핵인 정당에 여야 불문하고 존재한 적이 없다.

 바람 앞에 흔들리던 촛불과 같은 차떼기당에서 너도나도 도망가거나 멀뚱멀뚱 쳐다볼 때, 망연자실한 패잔병들이 박근혜의 소매에 매달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박근혜는 흔쾌히 치마를 바지로 갈아입고 거리로 나섰다. 그는 기적처럼 당을 재건했고 이어 거짓말처럼 교과서에만 나오는 민주 정당을 다름 아닌 대한민국에 만들었다. 차떼기당을, 용광로처럼 뜨거운 여름 천막에서 민주적으로 개혁했다. 근본적으로 뜯어고쳤다. 그런데 그가 패배하자마자, 그가 승리자에게 꽃다발을 안겨 준 후 이순신 장군이 입던 하얀 옷을 입고 물러나자마자, 한나라당에서는 민주의 상식과 실질이 산산조각이 났다. 점령군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저벅저벅 민주의 성전으로 들어와 자유민주적인 당 이념과 민주적인 의사결정과 민주적인 조직을 걷어찼다. 
 
'이 전 총재가 이런 저런 비난을 감수하고 출마한 것은 한나라당도 그간의 여러 가지를 뒤돌아보고 깊이 생각해 잘 대처해야 할 일이라고 본다.'
'승자고 패자고 간에 공천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원칙이 무너지고 과거로 회귀하고, 구태정치가 반복되는 것은 그간 당 개혁을 원점으로 돌리는 것이어서 큰 문제가 있다. 이런 사고방식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박근혜는 진실한 말 못지않게 행동을 중시한다. 원칙적으로 이명박이 한나라당의 후보임에는 틀림없지만, 제대로 검증된 게 하나도 없는 그 후보를 위해, 민주 정당을 쑥대밭으로 만든 그 후보를 위해, 공산독재에 대해 선문답을 일삼는 그 후보를 위해, 공산독재에 신음하는 2천만 동포의 인권을 위해 한 마디도 않는 그 후보를 위해, 총선 때나 지방선거 때처럼 손수 도시락을 싸 들고 손에 칭칭 붕대를 감고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지, 목숨을 아슬아슬하게 건진 대수술 직후에도 곧장 달려가던 때처럼 절박한 때면 언제든지 달려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민주의 원칙과 상식을 깨고 당을 뛰쳐나가 다른 후보를 위해 살신성인할 수도 없다.

'조용히 있는 게 엄청 도와주는 것이다. 공식석상을 다니고 그러면 오히려 누가 된다.”

 박근혜는 한나라당에 의한 정권교체를 누구보다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그 당은 반드시 민주 정당이어야 하고, 대한민국 헌법을 준수해야 하는 정당이어야 하고, 공산독재에 맞서 자유민주와 시장경제를 사수하는 정당이어야 한다. 오늘의 북한 인권을 내일의 한국 인권으로 여김을 당연한 상식으로 아는 정당이어야 한다. 꼭 이번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그런 한나라당이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 만약 한나라당이 그가 대표직을 내놓던 때와 같은 모습을 되찾기만 한다면, 그는 언제든지 어디든지 몸이 부서지도록 손이 으스러지도록 유관순의 태극기를 들고 봄바람같이 달려갈 것이다. 점령군이 그를 보고 일개 공천권 운운하며 비아냥거린다면, 그는 굳게 잠근 대문 안에 다시 묵직한 철문을 설치할 것이다.
                   (2007.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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