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이하 YS)과 이명박 대통령(이하 MB)이 취임사에서 밝힌 핵심 국정철학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YS가 MB를 정계에 입문시켰을 뿐만 아니라 MB로 하여금 본선보다 훨씬 힘들었던 당내 경선에서 머리 한 올 차이로 이기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으니,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취임사에서 YS는 '민족이 이념에 앞선다'고 세계만방에 폭탄선언했고, MB는 '이념의 시대를 넘어 실용의 시대로 나가야 한다'고 5천만 국민 앞에서 윽박지르듯 공언했다.
자유민주가 존립의 기반인 보수우파 정당의 대선주자로서 대통령에 당선된 YS와 MB는 자유대한의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엄숙하게 선서하는 그 자리에서 대한민국의 신성한 자유민주를 반역집단 북한의 사악한 인민민주(공산주의)와 동급으로 취급하여, 선서의 진정성에 스스로 먹칠했다. 금의환향한 아들이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님께 호화찬란한 보석상자만 주고 보석은 당신들이 잃으실까 봐 따로 보관했다고 둘러대는 격이었다. 대통령이 무위자연을 설파하는 노자나 장자면 모를까, 부자가 대를 이어 공산독재의 생지옥을 구축하여 60년 동안 바늘 끝 하나 들어갈 빈 틈도 보이지 않고 도리어 시산혈해의 무력전보다 어려운 피 말리는 사상전에서 동서남북 사대문을 활짝 열어제친 한국을 상대로 연전연승하는 것을 번연히 보고서도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자가 자유민주의 이념을 역사의 고려장에 산 채로 묻어 버리겠다고 사자의 목소리로 포효했다.
민족주의자 YS는 승리감에 도취하여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인기 폭발! 여야가 따로 없었다. 조용필이나 서태지보다 인기가 좋았다. 오죽 했으면, DJ가 울먹울먹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도망치듯 외국으로 나갔을까. YS 본인은 자유민주를 사랑하고 공산주의를 미워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권력 투쟁에만 능했을 뿐, 대학 이후 공부를 전혀 안 한 이런 사람을 속여 먹기는 여우같은 경리 아가씨가 까막눈 사장의 간을 빼 먹기보다 쉽다. 가치중립적인 아름다운 말로 접근하여 살살 비위를 맞추면 된다. 한완상은 민족이란 말로, 노무현과 이재오는 민주라는 말로, 이인제는 개혁이란 말로 각각 YS에게 접근했다.
민족은 공산주의자도 당연히 포함한다. 또한 민주에는 자유민주와 인민민주가 있고, 개혁에는 우향우 개혁과 좌향좌 개혁이 있다. 장기수 이인모를 조건 없이 북으로 보낸 것은 민족의 이름으로 공산당에게 쓸개를 내 주고 뺨을 맞은 바보짓이었다. 자유민주의 보루인 국가보안법 폐지가 정치 소신인 사람들을 민주의 이름으로 대거 영입한 것은 인민민주 신봉자에게 멍석을 깔아 준 얼간이 짓이었다. '무노동 부분 임금'은 막 자리잡아 가고 있던 '무노동 무임금'의 우향우 개혁을 비실비실 웃으며 엿먹인 좌향좌 개혁이었다. 그 후로 친북좌파 계열의 민노총이 득세하여 경제의 발목만이 아니라 정치의 바짓가랑이마저 잡고 왼쪽으로, 위쪽(북쪽)으로 질질 끌고 간 것은 불 보듯 뻔한 수순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이제 MB는 가치중립적인 실용을 내세운다. 그냥 내세우면 자유민주가 전제된 실용으로 착각할 수도 있는데, MB는 친절하게도 실용을 이념과 상반된 개념으로 내세운다. 친북좌파도 얼마든지 환영한다는 함의가 있다. 아니, 환영한다는 속뜻이 숨어 있다. 아니나 다를까, 자유민주의 보루인 국정원, 통일부, 외교부, 국방부의 수장에 능력을 우선한다며 친북좌파 정부에서 코드에 맞춰 열심히 일하던 사람들을 발탁했다. 뿐만 아니라 국회의원 공천에서 보수우파 정당의 성안으로 들어온 트로이 목마의 배[腹] 문을 열고 복면인들을 우르르 내려오게 하여 그들에게 삼정검을 쥐어 주었다. --도륙하라!
"얼음(Freeze)! 나 그럴 줄 알았노라. 자, 여긴 내가 맡을 테니 빨리 전열을 재정비하라. 정의의 갑옷을 입고 신뢰의 방패를 들라. 원칙의 창을 곧추 세우라." --카산드라 박
MB는 대상을 잘못 골랐다. 한국에서 실용은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친북좌파 이념을 몰아내야 한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가장 큰 문제다. 한강의 기적을 낳은 대한민국의 실용주의가 숨죽인 것은 그들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률에 따라 엄정한 법 집행으로 그들의 입에 재갈만 물려지면, 대한민국 사람들은 가만 내버려두어도 누구나 실용주의를 실천한다.
MB는 대상을 잘못 골랐다. 실용주의는 다름 아닌 북한의 김정일에게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권해야 한다.
"정권을 당장 내놓으라는 비현실적인 말은 않겠다만,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즉각 공산 국가인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실용주의를 받아들여 개혁하고 개방해라. 안 그러면 금강산과 개성공단의 달러 창구부터 막아 버리겠다. 15년을 기다려 주었으면 되었지, 얼마나 더 기다리란 말인가. 더 이상 허튼 수작하지 말고 당장 실용주의를 받아들여라.--아멘(아멘은 아무 데나 망령되게 나불거리는 게 아니라 바로 이럴 때 하는 후렴이다.)"
취임사에서 이렇게 또박또박 말했어야 했다. 마이크 성능이 좋으니까, 목소리는 조금도 높일 필요가 없다. 속삭이듯 말해도 김정일 귀에는 천둥보다 크게 들릴 테니까. 그렇게 했으면, 하나님의 귀에는 파리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의 할렐루야 소리보다 아름답게 들렸을 것이다.
MB의 실용주의는 친북좌파에게 면죄부를 주는 이적 행위요, YS가 깔아 준 멍석 위에서 무상으로 15년간 장기 공연하다가 마침내 선전선동의 마당극에 식상한 관중이 슬금슬금 다 빠져나가자 살금살금 눈치를 보면서 출연진이나 내용은 그대로 둔 채 배경과 의상만 얼렁뚱땅 바꾸는 새 레퍼토리를 준비하며 잠시 숨을 죽이고 있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자들에게 책임지고 관중을 몰아 줄 테니까 다시 신나게 춤추라고 격려의 풍악을 울려 주는 적전 분열이다. 친북좌파 종식의 자유민주 이념 대신 알쏭달쏭 이념의 실용주의를 택함으로써, MB는 대선에서 패배한 야당의 탄돌이들이 개혁공천의 각광을 받으며 90% 승리하여 문패만 바꿔 단 제1야당에서 주류로 떠오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국민의 최종 심판이 남았지만, 자업자득 여당은 각개약진하고 탄돌이당은 거대한 진형을 이루어 일사불란하게 전투에 임하고 있기 때문에, 대통령 취임사로 면죄부를 받은 여야의 탄돌이들이 어부지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YS의 개혁과 MB의 실용은 본인이 의도했든 아니든 태극기를 거꾸로 다는 친북좌익의 정치 마당극 주제곡이다.
(2008. 3. 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