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적 지원의 비인도성

인도적 지원이 자립 의지를 북돋우지 못하면, 도리어 도둑 심보와 거지 근성을 키운다.

 

 미국이 북한에게 올 6월부터 1년간 50만 톤의 식량을 지원할 모양이다. 이에 발맞추어 인도적 지원에 대한 명분 쌓기 용 말 바꿈 또는 말 꾸밈이 이명박 정부에서도 슬슬 시작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북한 돕기는 북핵의 진전과 북한의 요청에 연계한다는 원칙을 밝히고 지금까지 고수했다. 단서 조항이 있다. 인도적 차원과 실용적 차원에서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경제협력은 계속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2005년 이후 중단했던 대북 식량 지원을 재개하는 데는 북핵 문제와 인도적 차원 두 경우 모두 해당된다. 북핵 문제에서는 김정일의 진심이든 눈속임이든 형식상 1994년 제네바 협상 때보다 큰 진전이 있다고 크리스토퍼 힐이 강석주에게 놀아난 로버트 갈루치를 힐끗 쳐다보며 득의만면해 한다. 조작 여부는 일단 논외로 치고 방대한 양의 북핵 일지가 휴전선을 넘어 태평양을 건너고 있다. 머잖아 영변에서 시든 진달래꽃 같은 핵 시설을 폭파하는 불꽃 쇼가 벌어질 모양이다. 클린턴이 과거의 핵은 불문에 부치고 미래의 핵에 지푸라기 자물쇠를 채운다는 김정일의 천연덕스러운 약속에 중유와 식량을 화끈하게 지원하기로 한 데 비해, 이론상 검증가능한(verifiable) 만여 페이지 핵 일지와 이미 다른 데 다 빼돌리고 껍데기만 남았다고 하나(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한국과 미국의 일부 세력 외에는 찍 소리도 안 낼 것) 돌이킬 수 없도록(irreversible) 핵 시설을 하나 폭파한다면, 완전한 핵 폐기(complete dismantlement)는 아닐지라도 제 꾀에 제가 속은 똑똑한 클린턴보다 겉으로 보기엔 멍청해 보이지만 뚝심과 기다림으로 부시가 결국 더 현명하다는 평판을 두루 들을 수 있다고 자신하고, 가짜 카우보이는 보안관의 빈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CNN과 뉴욕 타임스를 곁눈질한다.

 

 90년대 중반 이후 처음으로 북한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도 떠돈다. 한국이 해마다 사실상 공짜로 보내 주는 평균 50만 톤의 식량과 중국이 생색내며 북한의 지하자원과 식민지 종주국의 위엄을 부리며 비싸게 팔아먹는 10만 톤 내지 50만 톤의 식량으로 북한의 배급계급(노동당 간부와 끗발 있는 군대와 성분 좋은 평양시민 등 공산 귀족층) 2백만 명 내지 4백만 명은 북한의 노동자 농민이 보기에는 얼굴에 개기름이 줄줄 흘렀는데, 여야가 뒤바뀐 한국이 선뜻 식량 지원에 나서지 못하고 중국이 세계적으로 곡물가가 폭등하자 식량 확보전에 나서면서 값은 고하간에 비록 양은 얼마 되지 않지만 북한에 식량 팔아먹기를 꺼림에 따라, 북한의 좌식(坐食) 계급이 다급해졌다.

 

 이들이 공짜로 받은 식량을 빼돌려 농민시장에 비싸게 파는 걸 꺼린다. 돈 버는 것도 좋지만 제 목숨부터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10여년 간 공짜 식량에 너무도 익숙해진 이들은 외부에서 지원이 끊어지면, 가장 먼저 다이어트하다가 영양실조에 걸릴지 모른다. 그런 상황이 오면 이들이 역성혁명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이들은 외부 세계의 정보에 어쩔 수 없이 제법 노출되어 있어서 김정일이 엉터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가 하사한 폭력적 권력에 중독되고 몽환적 부에 매혹되고 운명적 사슬에 묶여 그에게 충성을 다 바치고 있다. 그러나 외부에서 지원이 끊겨 몽환적 부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순간, 가장 적응력이 떨어지는 이들이 가장 먼저 배반할지 모른다. 김정일이 다급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정이 북핵 문제에서 속 빈 강정이겠지만, 이번에 약간의 선심을 쓰게 된 배경이 아닐까 한다.

 

 속으로는 아무리 곪을지라도 우선 당장 눈에 보이는 체면을 중시하는 중국이 북경올림픽을 맞아 탈북자를 대대적으로 색출함에 따라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둔 비공식 국경 거래도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이래저래 북한에서 어느 해보다 식량이 부족하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인도적 지원의 명분이 발아한다. 북한과 원수지간인 미국도 북핵 문제에 진전이 있다고 보고 아사자를 발생시키지 않기 위해 상당한 투명성을 확보하는 조건으로, 다시 말해서 북한의 잡초 인생들에게 직접 식량이 가도록 최대한의 조치를 취하는 조건으로 인도적 지원을 재개한다. 한국의 새 정부로선 선(先) 요청 후(後) 지원의 원칙이 걸리는데, 요청을 굳이 직접적인 것에 한정할 게 아니라 간접적인 것도 포함시키면, 원칙의 걸림돌이 제거된다. 무엇보다 광우병 괴담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야당으로부터 소리 없는 환호성이 쏟아질 것이다. 또한 금강산과 개성공단에서 보여 준 바와 같이 인도적 지원은 계속한다는 원칙을 고수한 만큼, 알고 보면 이미 명분은 하나 확보되어 있다. 따라서 한국의 대북 식량 지원이 미국보다 화끈할 수도 있다. 만약 미국이 북핵 문제가 상당히 진전되었다고 인정하고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면, '비핵개방3000'에서 비핵이 슬그머니 사라지고 '개방3000'이 급물살을 탈 수도 있다.   

 

 사회주의든 공산주의든 그것은 인도주의에서 비롯되었다. 서방의 사회주의든 동방의 공산주의든 실험 결과 인도주의의 비인도성이 속속 드러났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도둑 심보와 거지 근성을 키웠기 때문이다. 도둑과 거지는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남이 노력해서 쌓은 것을 빼앗거나 구걸하는 자들이다. 인도주의를 내건 사회주의 도둑은 사회구조적 문제를 내세워 스스로의 양심을 마비시킨 후, 조직력과 폭력과 법률을 동원하여 과정은 일체 생략하고 일단 부를 가진 자가 있으면 그로부터 재산을 빼앗아 우선 끼리끼리 나눠 갖고(공산간부만이 아니라 귀족노조의 간부들도 매한가지) 나머지는 뭇 거지들에게 크게 적선한다. 부를 나눠 갖는 파티는 흥겹지만, 막상 그 다음 날부터 새로운 부는 좀처럼 창출되지 않는다. 부를 창출하려면 생산계급이 있어야 하는데, 세금으로 대부분 뜯기든 강제로 다짜고짜 빼앗기든 기업가 정신과 근로의욕이 사라지기 때문에 아무도 적극적으로 일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는 도둑, 아래는 거지의 사회구조가 정착된다. 당연히 새로운 기술도 새로운 경영도 자리잡기 힘들다. 도둑에게 무슨 특별한 과학기술이 필요하며 거지에게 무슨 특별한 동냥기술이 필요할까. 자식이 시원찮으면 물려받은 재산을 털어먹기가 일도 아니듯이, 재벌과 은행가를 내몰고 생산수단과 자본을 확보하더라도 생산을 늘리기는 여간 어렵지 않다. 노력한다고 반드시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노력하지 않고서 성공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더군다나 욕하는 것 외에는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는 무능력자임에야! 

 

 선진국의 후진국에 대한 지원도 인도주의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성공한 경우는 거의 없다. 올챙이 시절을 잊은 선진국의 개구리 식 충고가 잘못된 경우도 있지만, 무엇보다 후진국이 스스로 일어서려는 의지와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투자 없는 소비와 생산 없는 분배(약탈)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 외부 지원의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투자 특히 교육 투자가 최우선 순위를 차지하고, 훌륭한 국가 지도자 아래서 노력한 만큼 자기 것이 많아지는 현실을 목격하면서 전국민이 눈에 불을 켜고 생산에 매진하고, 초기의 무상 지원 외에는 외부 지원에 대해서는 원금에 이자를 붙여서 갚은 나라들은 매우 드물었지만 놀랍도록 성장했다. 빈곤층이 급격히 줄어들고 중산층이 두텁게 포진했다.

 

 북한은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바로 옛 공산권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도둑과 거지의 땅으로 전락했다. 등소평의 중국을 따라 북한이 농민과 상인과 노동자와 기업가와 공무원의 땅으로 변신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김정일은 구세주를 만났는데, 그가 바로 김영삼이요, 김대중이요, 노무현이다. 무기공장 외에는 알량한 공장과 발전소가 하나같이 철공소나 고물점이 되었기 때문에, 북한은 외부의 인도적 지원이 없으면 절로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처음에는 한국과 미국과 중국과 일본의 지원으로 나중에는 한국과 중국의 지원으로 15년을 큰소리치며 연명했다. 군사력을 크게 늘렸다. 도둑은 더욱 고약해졌고 거지는 더욱 비참해졌다. 이제 한국의 인도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당장 굶어 죽게 된 거지를 가리키며 다시 도둑 돕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부스러기가 거지에게 떨어지긴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알짜는 권력을 움켜쥔 도둑에게 갈 수밖에 없다. 이를 친북좌파는 누구보다 잘 안다. 따라서 그들은 투명성 확보에 대해 인도주의의 깃발을 힘차게 흔들며 여론을 호도하고 착한 국민을 선동한다. 계산된 자선은 자선이 아니라 시커먼 상술이요 정치적 책략이라고 욕한다. 적선으로 기운 차린 거지를 농민과 상인과 노동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면, 시건방진 내정 간섭이요 사악한 체제 전복 흉계라고 비판한다.

 

 미봉책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는 없다. 인도적 지원이라는 미명하에 미봉책이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해일이나 지진이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칠 가능성은 점점 커진다. 미얀마 이라와디의 폭풍과 중국 사천성의 지진은 이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될 것이다. 자유민주와 공산독재를 한 묶음으로 낡은 이념이라고 비판하는 이명박 정부가 내건 '비핵개방3000'은 한 민족 두 체제라는 연방제 또는 연합제의 이름으로 한 지붕 아래서 자유민주와 공산독재의 오순도순 공존을 주창하는 햇볕정책의 새 이름일 수밖에 없다. 정통우익의 둥지에서 청와대 지붕 위로 날아오른 새 봉황은 이사간 지 3개월도 안 되어 인도주의와 국제 정세를 내세워 간접적으로 햇볕정책의 계승자임을 선언하고 있다. 인도적 지원의 비인도성을 애써 무시하고 조건 없는 인도적 아가페 지원을 강조하고 있다.     
               (2008. 5. 18.)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