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사회는 준법 사회다. 민주 사회의 법률은 독재 권력이 제정한 법이 아니라, 민의(民意)의 대리인들이 국회에서 민주적 절차에 의해 제정한 것이다. 선의와 이성과 다수결에 의해 제정된 법률도 시대와 상황이 바뀌면 비현실적인 면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민주 국가는 입법기관을 1년 365일 열어 놓고 있다. 시대에 뒤떨어진 법은 언제든지 약간의 침만 튀길 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고칠 수 있고, 시대가 요구하는 완전히 새로운 법도 만들 수 있다. 행정부는 법에 따라 머슴처럼 종처럼 일을 하고, 사법부는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해석상 미묘한 부분을 법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양심으로 명확하게 해석한다. 이런 법률해석이 모인 것이 판례이고 이 판례가 쌓일수록 그 나라의 민주주의는 성숙한다.
공산 독재자 스탈린 헌법을 베낀 북한의 악마 헌법과 달리, 1948년에 제정된 한국의 헌법은 고고의 성을 울릴 때부터 이미 구미 선진국 헌법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천사 헌법이었다. 민주 발전 과정의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신생 민주 국가 한국도 국민의 입맛보다 권력의 입맛에 더 맞는 법률이 제정된 적이 있지만, 그것은 전체적으로 보아 옥의 티 정도였다. 그러다가 1987년 노태우의 6·29선언과 더불어 옥의 티 곧 악법은 거의 사라졌다. 여야합의로 헌법도 개정했고 많은 법률을 폐기하거나 새로 제정했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실 일이 없어졌다.
오히려 헌법과 헌법에 합치되는 판례를 무시하고, 반민주적 법률을 양산한 것은 김영삼 정부 때부터 시작되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물인 6·15공동선언은 대한민국의 헌법에는 붉은 촛불을 들고 김일성 헌법에는 하얀 손수건을 흔드는 독소조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대한에서 헌법 위의 헌법으로 군림하게 이르렀다. 이에 따라 언론탄압법, 과거사왜곡법, 인권냉소법, 간첩영웅법 등이 야당의 고함과 여당의 맞고함과 어깨싸움에 국회의장의 법률 제조용 방망이 두들기는 초필살기가 보태져 무더기로 태어났고, 구성원이 바뀐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이전의 판례를 깨는 일관성 없는 새 판례를 쏟아냈다.
노동자와 민족과 민중을 참칭한 노조와 시민단체와 위원회는 어느새 법률보다는 떼법, 헌법보다는 민족정서법, 판례보다는 붉은 양심을 앞세우고 조직적으로 법을 어기기 시작했다. 이들의 대변인 정부는 허수아비 경찰을 보내어 탈법과 불법을 확대 재생산하는 데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다가 자기들에게 유리한 법률이 만들어지면, 범(汎)6·15공동선언파는 그 법을 금과옥조처럼 지키고 강요했다. 그것도 성이 안 차던지 조금만 수틀리면 민주와 민생과 평화와 통일의 깃발을 들고 언제든지 거리로 뛰쳐나갔다.
한국은 이제 초등학생도 민주적으로 제정된 법률과, 법관의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판례를 자랑스럽게 무시한다. 스스로 붉은 양심에 비추어 티끌만한 부끄러움도 없다. 여야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제정한 집시법(集示法)의 핵심은 평화 원칙과 일몰 전 원칙 두 가지다. 그러나 이것은 조직과 숫자 앞에는 무용지물이다. 조직과 숫자가 곧 정의의 여신과 저울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법도 이데아 세계의 정의보다는 하위에 있게 마련인데, 그들은 스스로 이데아의 전령 또는 전사를 자처하며 언제 어디나 정의의 저울을 들고 다니기 때문에, 법을 어겼다는 것을 도리어 자랑으로 여긴다. 이것이 바로 조직화한 소수가 벙어리 냉가슴 다수에게 자신들의 양심과 의지를 강요하는 독재다. 단지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아래서 위로 쳐올리는 점이 이전의 독재와 다를 뿐이다.
다수 민심을 대변하는 국회의원들이 양심과 이성에 고뇌를 섞어 논리와 설득의 말과 문자로써 민주적 절차에 따라 법을 제정하거나 국민의 직접 선거에 의해 뽑힌 행정부 수반이 임명한 일꾼들이 기존의 실정법을 집행하게 되면, 떼쓰기와 선전선동은 통하기 어렵다. 그래서 가장 손쉽고 확실한 방법으로 제멋대로 정의를 독점하고서 아래로부터의 독재를 여차하면 강요하는 것이다. 민주의 이름으로!
정부와 여당은 정의는 조직이 아니라 법률 안에 있으며, 양심은 군중심리가 아니라 이성 안에 있으며, 국익은 이익 단체가 아니라 국민의 자유로운 선택과 다양한 기회에 있음을 단호하고 끈질기게 주지시키는 한편 엄정하게 법률을 집행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법은 야당과 머리를 맞대고 개정해야 한다. 밀면 밀리고 당기면 끌려가고 목소리 드높으면 원칙을 수시로 바꾸면, 아래로부터의 독재 곧 대중영합주의는 점점 극성을 부리게 되고, 나라는 갈수록 혼란해지고 국민은 갈수록 불안해 한다.
(2008. 7. 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