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이 오르면, 정면에 떡 하니 거대한 황금 액자가 두 개 걸려 있다. 초상화 속의 두 남자는 붓과 물감의 노골적 포샵 처리에 의한 것으로 실물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 한 눈에 들어온다. 숨소리 하나 내지 않는 관객은 초상화 속의 두 주인공이 부자 사이임을 훤히 알지만 나이가 비슷하게 보이는 것에 대해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 아버지의 자애로움과 아들의 호탕함을 한껏 강조했지만, 각기 입가와 눈매에는 위엄 아닌 신경질이, 단호함 대신 잔인함이 은은히 배어 있다.
일제시대의 가설 무대같이 촌스런 무대 위로 촛불같이 희미한 조명이 켜지면, 한 늙은이와 한 중늙은이가 얼싸안는다. 무대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깡충깡충 뛰면서 손에 손에 종이꽃을 들고 군기가 바짝 든 신병들이 군가를 부르듯 절도 있고 박력 있게 환영하는 무리로 가득 찬다. 순간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면서, 관객 속에서 우레 박수와 개선(凱旋) 함성과 휴대폰 카메라의 버릇없는 찰칵거림과 봇물 같은 흐느낌이 터져 나온다. 금방 무대와 객석이 하나가 된다.
무대 위에는 늙은 동생과 젊은 형이 끌어안고 울고 있다. 객석 여기저기서도 오열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즈음, 늙은 동생은 정면의 초상화에게 공손히 절하면서 무대 뒤로 사라지고, 젊은 형은 초상화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대에서 비틀비틀 내려와 객석에 멍한 표정으로 앉는다. 반세기 만에 만나서 속엣 말은 한 마디도 못하고 그들은 꿈인 듯 생시인 듯 '지나가는 사람'의 연기 한 번 하고 헤어지지만, 사진 기자의 카메라와 관객의 휴대폰 카메라는 쉴 새 없이 찰칵거린다. 잘 보면, 무대는 대부분 텅 비어 있지만, 양옆으로 돈 수레와 식량 달구지가 초상화 옆을 지나 무대 뒤로 끊임없이 사라지고 있다.
갑자기 무대 위로 눈이 날카롭게 빛나는 인민군이 나타나, 아무 말 없이 붉은 깃발을 흔드는가 했더니, 관객 머리 위로 뭔가 불빛이 휙 지나간다. 놀라는 것도 순간, 멀리 극장 바깥의 호수가 출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관객들은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간다. 진짜 대포가 날아와 호수의 순시선이 박살난 것이다. 다섯 명의 목숨이 그 자리서 달아나고 중상을 입은 한 명의 목숨도 곧 떠나간다. 웅성웅성하는 사이에 사이렌이 울린다. 연극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빨리 극장 안으로 들어오라는 신호다. 객석이 듬성듬성하였지만, 무대 위에는 어느새 중늙은이와 얼싸안던 그 늙은이가 빨간 넥타이를 매고 나타나서 침착! 냉정! 이 두 마디만 남기고, 공놀이 구경간다며 서둘러 무대 오른쪽으로 사라진다.
돈 수레와 식량 달구지는 쌍꺼풀이 돋보이는 초로의 늙은이가 빨강 넥타이 늙은이 대신 나온 후에도 계속 무대 뒤로 사라진다. 눈이 작은 중늙은이가 쌍꺼풀 늙은이 대신 나온 후에도 마찬가지다. 쌍꺼풀 노인과 실눈 노인은 겉보기에는 영 사이가 안 좋은 듯했지만, 무대 위 신파극과 돈 수레와 식량 달구지의 흐름은 조금도 변함없다. 하여간 교체 출연하는 세 늙은 배우는 조연임이 분명하고, 잘 보면 초상화 속 아들과 꽤 닮은 중늙은이가 주연인 듯하다. 자주 나타나진 않지만, 그는 결정적인 장면마다 불쑥 나타난다. 코쟁이가 나타나는 수가 있지만, 그들도 얼굴이 자꾸 바뀐다. 한번은 무대 뒤에서 천지개벽하는 소리가 난 적도 있다. 알고 보니, 한 방이면 끝난다는 아인슈타인 대포란다. 무대 밖의 천지사방이 잠시 술렁거렸지만, 돈 수레와 식량 달구지는 변함없이 유유히 무대 뒤로 사라졌다. 그것이 어떻게 쓰이는지 관객은 절대 물을 수 없다. 극장을 에워싼 열렬 신파극 팬들의 눈이 잡아먹을 듯이 번쩍여서 그럴지도 모른다.
상설 신파극은 10년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지만, 연출가 겸 주연 배우의 무대 밖 생활에 대해서는 누구도 모른다. 그가 내보내는 꾀죄죄하고 깡마른 신파극 배우들의 무대 밖 생활에 대해서도 절대 물어서는 안 된다. 대신 10원짜리 연극을 10만원 내고 꾸역꾸역 구경하는 엽기 관객들의 실생활은 극장만 벗어나면 손바닥 들여다보듯 들여다볼 수 있다. 괴이한 것은 신파극 열성 팬들조차 무대 위 주연 배우에 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 흉내를 낸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무대 위는 새벽, 중무장한 3인의 인민군이 나타나 엎드려쏴 자세를 취하는가 싶더니, 객석에서 몰래 빠져 나와 무대를 기웃거리던 한 아주머니가 즉사한다. 배우가 연기를 한 게 아니라, 돈 바치고 박수 주는 관객이 무대에 오른 것도 아니고 잠시 무대를 엿보았다는 이유만으로 등뒤에서 정조준하여 그를 즉사시킨 것이다. 극장 측은 일체 비밀에 부쳤다가 인민군 대변인이 일러 주는 말을 곧이곧대로 극장 밖에서 발표한다. 이어서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당분간 극장 표는 아니 팔겠다 덧붙인다. 하지만 그것은 극장 오른쪽 문만 닫는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왼쪽 문은 여전히 열려 있고, 무대 왼쪽으로도 여전히 돈 수레와 식량 달구지가 끊어지지 않는다. 진상이 대충 밝혀지면, 오른쪽으로도 즉각 돈 수레와 식량 달구지가 운행된다는 암시일 것이다.
황량한 신파극 무대 정면의 두 초상화는 여전히 휘황찬란하다.
(2008. 7. 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