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明과 反文明

존엄사에 대하여.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도 죽음이 있다는 것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삶에는 천차만별의 불평등이 널려 있지만, 죽음에는 불평등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죽음은 평등하며, 새로운 세대를 준비하는 밀알과 같은 존재이다.




새로 태어나거나 삶의 껍질을 벗어버리는 것은 모두 지구만이 부여하는 어김없는 자연현상이다. 그런 뜻에서 죽음은 생명을 가진 누구에게나 으레 받아 안아야 할 숙명인데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데서 이 세상 모든 비극이 淵源하지 않나고 생각된다.




요즘 ‘존엄사’(尊嚴死)라는 것이 문제가 되어 고등법원에 게류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의사의 힘을 빌려 평안히 죽게 되는 ‘안락사’(eunathansia)란 말과 ‘존엄사’는 같은 말로 통용되는 것 같다. ‘적극적 안락사’는 불치의 고통이 극심한 병으로 소생이 거의 불가능할 때 의사가 독극물을 환자에게 주입함으로써 생을 마감케 하는 것이고, ‘소극적 안락사’는 호흡기 등을 제거함으로써 죽게 만드는 일을 가리키는 모양이다.




여기에 덧붙일 말은 심장은 뛰어도(살아 있어도) 腦死의 경우는 의학적으로나 법률적으로 이미 ‘사망’으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에 보호자의 일정한 요건의 요구 내지 환자의 유언 등이 있으면, 호흡기를 떼내고 바로 필요한 장기 이식을 위한 수술로 들어가면 된다.




그런데 존엄사(또는 안락사)는 뇌사의 경지에는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치의 환자일지라도 엄연히 살아 있는 생명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대학병원의 응급실, 암 병동 등에 가보면, ‘죽음’이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한 순간도 견디기 힘든 극심한 고통에 이르는 ‘죽음의 과정’이 그야 말로 더 걱정스러운 공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약 30년 전에 본인은 삼성 제일병원 암 병동(7명이 수용되어 있었음)에 한 1주일 신세진 일이 있었다. 바로 옆 베드에 누운 고령자는 위암 수술 두 번을 치른 뒤 또 재발해서 입원을 했다. 밤이고 낮이고 인간의 의지나 괄약근(항문)의 수축과는 전혀 관계없이 묽은 변이 시나브로 흘러나와 온 병동 안에 구린내가 진동하고 구역질이 나기도 했다.




그 분은 팔 다리가 앙상하고, 얼굴은 살이 모두 빠져버려 해골만 남은 형상이었다. 암은 인체에 남은 에너지 한 톨마저 무참히 앗아가는 ‘소모 병‘이기도 해서 한 쪽 모로 돌아누울 힘조차 없기에 일일이 부인의 힘을 빌려 자세를 고쳐 받아야 할 지경이었다. 이쯤 되니 큰 돈을 내놓지 않고서는 어느 호스피스인들 자원해서 환자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그의 육신을 들어다 욕실에 옮겨 씻기겠는가? 부인은 자식들 뒷바라지와 병간호에 생기라곤 딱 말라버린 참혹한 모습이었다.




본인도 어느덧 고령자로서 두 다리 뻗고 밤새 안녕을 할 처지가 못 되는 나이에 이르렀다. 언제나 머리에 떠나지 않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다. 수술을 할 경우, 세균이나 바이러스의 감염을 두려워한 수술 진은 환자를 발가벗겨 수술대 위에 올려놓은 뒤 크레졸 등의 소독약을 온몸에 바르는데 수술대 위에는 너무나 눈에 바시게 엄청난 밝기의 전구와 형광등의 빛이 환자의 몸을 따가울 정도로 쏘아 젖힌다.




본인에게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증오스러운 의문이 남아 있다. 조금 전에 예를 든 그런 환자일 경우, 죽게만 해주면, 죽고 싶다. 그것이 환자나 보호자의 애절한 호소이지만 의사를 포함한 기독교 종교집단은 ‘생명의 존엄성’이란 명분으로 극도의 고통을 옹호하는 편을 몇 천 년 간 서 온 것일까? 이것이 ‘文明 속에 反文明’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요즘 한국 천주교 측에서는 안락사를 고려해볼 여지가 있음을 밝힌 것은 그나마 다행스럽다. 종교적으로 안락사를 반대하는 것은 敎義(doctrin)에서 주어진 것으로 유추된다. 첫째로 인간을 신의 창조물로 본다면, 인간의 숨을 거두어 가는 것도 신에게만 허용된 절대적인 권리이다, 라고 보는 시각이다.




하지만 기독교 집단의 오랜 사회적 관행을 보면, 그렇게 순수하게 信念化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전쟁을 통한 헤아릴 수 없는 殺傷, 사형의 합법화, 타인의 피를 수혈, 타인의 장기 이식수술, 등등을 기독교계가 받아들인다면, 불치-고통의 병으로부터 일시나마 해방된 상태에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전체적으로 신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아진다.




기독교의 원리가 法制化되어 안락사를 금하는 데는 또 한 가지의 기독교의 교의가 숨어 있다고 보아진다. 인간이란 죄의 元祖 아담과 헤와의 후손이므로 그 原罪는 영원히 대물림하는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죄 갚음을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죽을 때까지 죄를 보상해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런 원리이라면, 교통사고가 나서 온몸이 짓이겨지든 말든 그 불행자는 자신의 죄 값을 다 하고 가는 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서 불치에 극심한 고통이 뒤따르는 환자들의 호소 내지 혼수상태로서 소생이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의학적으로 결정이 난 경우에 보호자들이 존엄사 호소를 할 때, ‘마지막 갈 때까지 네 죄의 값은 네가 스스로 치르는 것’이 너무나 교리상 당연하다고 하면, 기독교는 신에 대한 인간의 배신-원죄-죄 값을 갚는 보상-인간에 대한 신의 보복 완성이라는 반인간적이고 반문명적인 종교가 아니고 무엇이라고 발명할 것인가?




앞을 향하기보다 태어났던 원위치로 회귀해야 할 귀소(歸巢)의 시공이 가까이 올수록 그 귀소의 순간에 인간이 가장 처절하게 문명 앞에 무기력하게 버려져야 하다니?....이러한 조건이 귀소를 숙명적으로 받아 안아야 할 지구촌의 살벌한 환경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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