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보수는 무기력한가

보수가 살기 위해 모든 걸 조금씩 포기해야 된다. 이윤, 가문, 명성, 지위를 사회를 위해 양보하고 사회를 위해 써야 된다. 신년을 알리는 타종식 한복판에 백여명의 좀비가 정권타도를 외쳐도 10만명이 운집한 그곳에 아무도 대립각을 세운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이명박 탄핵구호가 들릴까봐 음향을 조절해 내보내는 개탄할 사태가 벌어졌다. 생방송으로 100명이 외치는 구호가 전국민 5000만명의 눈과 귀를 유린해도 속수무책인 대한민국의 현주소였다.

무기력한 보수의 대한민국은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시청앞이 무법천지가 된 광우병 집회 때도 좀비에 대항할 만한 구체적인 세력은 집결되지 못했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거의 모든 시위나 집회는 항상 일방적이었다.
오프라인이 그렇다면 온라인은 더 처참하다.

다음 아고라는 좀비성향의 해방공간으로 굳어진 지 오래고 수많은 사이트들이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이름으로 좀비들의 여론을 확대 재생산하고 작전회의를 매개하고 행동방침을 조직하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좀비들에 대항한다고 노인네들이 모여 만든 사이트들은 무기력하기만 하다. 시뻘건 모자에 얼룩군복 빛바랜 훈장과 선글래스를 끼고 좀비들에게 구타당하는 모습이 오히려 슬프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보수에겐 왜 젊은피가 없을까? 이런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천민자본주의 노예가 돼버린 이 사회의 주류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그들의 속죄를 물어야 한다. 나라가 망해도 삼성과 현대는 생산라인을 뜯어다 외국에 차리면 국가멸망과 상관없이 생존할 수 있다는 뚜렷한 인식이 우리 사회의 지도층을 지배하는 아이덴티티가 되고 있다.

구심점이 없이 개별적 정체성만으로 구성된 사회 지도층은 협력자나 조력자가 아닌 경쟁자 관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단결은커녕 이합집산도 못하는 것이다. 엄청난 자금과 조직과 정보력 같은 생산성을 갖추고도 극소수 좀비의 여론에 숨죽이고 있는 이 땅의 대기업을 비롯한 언론인 지식인 문화인 정치인 관료들은 정체성에서 뚜렷한 공통점이 없기 때문에 수단과 대응이 전무한 것이다. (공식적 비공식적) 경쟁을 통해 생존게임에만 몰두할 뿐이다. 그만큼 우둔하거나 독립적이다. 정관계가 물밑에서 심각한 연줄로 연결되어 거미줄 같은 이익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수많은 물줄기가 바다라는 약속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너지의 힘은 처음부터 구성되지 못한다.

금융위기 때 위기관리 매뉴얼에 全社的 매뉴얼은 있지만 타기업간 협업 매뉴얼이라는 게 존재하는가를 생각해보면 기업이 얼마나 의외로 난망한 고립무원의 집단인지 알 것이다. 약한 외환타격에도 속절없이 휘청대는 건 그 때문이다. 사회주류의 다른 축을 형성하는 전문가 집단도 정체성에 공통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교수나 의사 변호사는 재산뿐 아니라 지위와 명예에 대한 생존본능 측면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다. 광우병 날조가 횡행했을 때도 알만한 지식인은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들이 비겁한 게 아니다. 그들이라고 사회를 향해 포문을 열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게 아니다. 다만 포문을 열었을 때 정체성에 합치가 되어 구심점이 되고 협력해줄 동지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처음부터 굳게 입을 다문것이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友軍'이 누군지 알 길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우군이 날 돕는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망망대해에 오직 혼자만 존재하는게 보수의 현실이다.

그에 비해 좀비들에게는 공통의 정체성이 있고 행동하는 우군이 존재한다. 그들의 정체성은 간단하다. 우파를 때려잡는 간단한 목적을 머리부터 발 끝까지 칭칭 동여맸다. 보수에 비해 우악스럽다는 평가는 잘못이다. 보수가 무기력하기 때문에 극렬하게 비치는 것이다. 정체성이 엇갈린 보수와 정체성이 일치된 좀비의 행동방식과 위력은 분명 차이가 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좀비들은 무슨 연유에서 일치된 눈과 다리를 가지게 됐을까? 고전적 관점에서 소위 혁명분자는 '잃을 게 없다'라는 게 답이 되겠지만 지금의 현실은 정반대다. 민주당, 한겨레, mbc, 시민단체는 통념적으로 사회를 뒤엎어서 새 질서가 필요한 빈곤세력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전반을 휘젖는 부루조아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보수의 부루조아와 왜 다른 행동을 하는걸까? 기존 부루조아를 거부하는 신흥 부르조아라고만 하기엔 설명이 미흡하다. 어차피 부르조아의 DNA는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안정적 권력소유와 확장이라는 목적점에서 특별히 다른점이 없다. 그렇다고 이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해서도 아니다. 쉽게 말하면 '그놈들이 그놈들'인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액션에서 보수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좀비들은 보수의 '무기력'을 숙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극단의 민족주의에 혈안이 된 이들 좀비들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는 역시 '어떻하든 통일'과 무한정의 反美 反日이다.

권력을 가진 보수의 정체성이 무기력하고 무의미하다고 보기 때문에 벌어진 틈새는 좀비들에게 분노이자 기회가 된다. 만약 보수가 틈을 보이지 않았다면 좀비도 무기력했을 것이다. 통일논의의 주체가 되고 외교의 주체가 되서 틈을 보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보수와 좀비 사이에는 '틈' 함수관계가 존재한다. Y축이 넓어지면 좀비의 운동량과 열정이 두 배로 증가한다. 그래서 '잘하는 꼴'을 보지 못한다. 보수가 국정을 잘 운영하는 꼴을 보는 순간 존재의의가 순식간에 무너지기 때문이다.

좀비들이 안보와 사회질서를 도박으로 큰 위기에 빠뜨리는 이유는 틈새를 장악하기 위한 지반 다지기다. 나라 전체를 숙주로 담보하고 하는 매우 신랄한 모험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벼랑끝까지 몰고 가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수의 근간이 뿌리채 뽑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생산설비를 외국으로 뜯어가면서도 조력이 불가능한 보수의 근본적인 정체성의 본질을 이미 간파했기 때문에 언젠가 극단이 되버리면 보수는 미련없이 국가와 법과 제도를 팽개친다는 걸 알고 있다.

어떤 숙주를 기반으로 한 곤충은 무당벌레 갑옷과 배의 연한 살틈으로 생식기를 집어넣어 알을 넣고 그 알이 부화되길 기다린다. 무당벌레는 뱃속에서부터 장기를 갉아먹히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간다. 죽음이 임박해서야 자신의 육신에 숙주가 자라고 있음을 알아 차린다.

'무소유'라는 법어가 있다. 한 저명한 스님의 책 제목이기도 하지만 보수는 소유를 위해 1%의 무소유를 시작해야 된다. 이대로 가다가는 다 정복되도 모를 수 있다. 비록 대한민국 보수의 정체성이라는 게 천민자본주의의 토양 위에 서있는 싸구려 가공품 같은 것이지만 왜곡되고 굴절된 근현대사에서 누구도 피해보지 않은 존재란 없다. 멀리보면 외세에 의한 피해가 근본이 됐기 때문에 질팍한 역사속에서 살기 위한 다양한 투쟁을 해왔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어 우리 모두를 자학적 사관에 빠뜨리는 좀비들의 음모와 날조를 막아야 한다. 그 의무는 역사의 수레를 이끈 보수의 몫이며 좀비가 들어오는 틈새는 물론이고 좀비를 양육하는 토양이 되는 원천을 없애야 하는 절박한 의무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보수가 살기 위해 모든 걸 조금씩 포기해야 된다. 이윤, 가문, 명성, 지위를 사회를 위해 양보하고 사회를 위해 써야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체성의 합일점을 이뤄내야 한다.

경쟁을 할땐 하더라도 경쟁을 하고 싶으면 경쟁의 마당을 정리하고 닦아놔야 하는 것이다. 판을 엎어버리는 좀비 앞에서 언제까지나 모서리 쪼가리의 내 판만 확보하려고 소탐대실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존권 차원에서 현실의 불운한 과정을 정확히 보고 현실의 부조리를 과감하게 뛰어들어 잘라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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