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의 선의(善意)에 목매기 16년

마왕은 무릎꿇고 퍼 주는 자만 좋아하고, 힘세고 슬기로운 이에게만 굴복한다.


 어제는 친절하게 날짜와 좌표까지 알려 주면서 미사일 여의봉을 가리켰다가,
 오늘은 상냥하게 개성 달러꽃밭에 생울타리 치면서 남녘 귀인의 발길을 묶다가,
 다이어트로 몸이 가뿐해진 마왕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연일 로이터통신과 AP통신과 뉴시스의 으뜸자리를 차지한다.

 

 열 여덟 살 슈베르트는 하늘처럼 우러러보던 대문호 괴테의 시 <마왕> 앞에 말발굽소리를 불쑥 집어넣어 다급하게 초비상 사태를 알린다.
--비상! 비상! 누구 없어요?
마왕이 냉큼 슈베르트의 가락과 리듬을 타고 부드럽게 아이를 어른다.
--얘야, 날 따라가면 장난감도 달라는 대로 주고 과자도 달라는 대로 줄게.
--우리 집은 낙원이거든!
아이는 아빠에게 매달린다. 
--아빠, 아빠는 마왕이 안 보이세요?
아빠는 안타깝다.
--얘야, 누구? 그건 안개란다. 바람이란다. 잎사귀란다. 버드나무란다. 정신 차려라, 제발!  
마왕은 아빠보다 더 다정한 목소리로 아이를 부른다. 
--얘야, 나랑 재미있게 놀자. 바닷가에는 꽃이 피어 있고, 우리 어머니는 금빛 옷이 있단다.
--예야, 우리, 금빛 옷 입고 밤마다 무도회에 가서 춤추고 노래하자.
영혼이 맑은 아이의 눈에는 마왕의 가면이 훤히 보인다.
--싫어요! 싫어요! 엄마아빠랑 살래요. 아빠, 아빠! 엄마...  

 

 이윽고 마왕은 아이를 데리고 떠난다. 아이의 싸늘한 몸만 남기고!  

 

 죽어 가는 2천만 북한주민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마왕이 보이고 마왕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디? 어디?' 하며, 절대 들어갈 수 없고 절대 들여다볼 수 없는 울타리 밖에서 딴청부리는 사람들 눈에야 마왕이 보일 리 없다. 콩깍지 끼인 눈에는 거인과 싸우는 장군만 보인다. 돈 주고 쌀 주고 기름 주고 비료 주면, 장군이 어느 날 통크게 울타리를 열거나 싹 걷어 버리고 죽어 간다는 2천만 생명을 몽땅 풀어주거나 누구든지 와서 그들을 먹여 주고 재워 주라고 선심 팍팍 쓸 줄 안다. 또는 절대 그런 생각은 않으면서 하늘에 맹세코 겉으로만 그런 척하고, 속으로는 마왕에게 충성을 다짐한다. '대안이 어디 있느냐'며,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대놓고 뻔뻔하게 마왕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자들도 숱하다. 
--어서, 오소서! 금빛 날개 타고 오소서!

 

 마왕의 아랫것들이 울타리를 엿본다며 생사람을 잡으려다 체면 구기며 쫓겨나도,
 "예예, 무조건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통일!"
 "한 번 더 내려오시면 인당수에 대여섯 명 정도 생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충성!"
 마왕의 사자가 진짜 내려오면, 진짜 생목숨 여섯 명을 인당수에 바친다. 아, 피로 물든 인당수여! 이걸 일러 평화란다! 동은 동, 서는 서, 동쪽 바다로 부지런히 약속대로 올라가는 핵개발 달러와 군량미...

 

 마왕이 핵 여의주를 번쩍 선보여도,
 전혀 놀라지 않거나 속으론 환호하고 말로만 아우성친다.
 --80대 어느 노인 가라사대, 언젠가 우리 것이 될 터,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하나니!
 마왕이 미사일 여의봉을 풍덩 바다에 던져도,
 무덤덤하거나 속으론 박수하고 말로만 아우성친다.
 --60대 초반 어느 노인 가라사대, 하늘이 무너져도 냉철한 자는 살 길을 찾나니!
 마왕이 동쪽에 돈 뿌리러 온 여인을 희생제로 삼아도,
 동쪽은 닫되 서쪽은 연다.
 --60대 후반 어느 노인 가라사대, 인내의 쓴 약 없이 승리의 영광은 없나니!
 마왕이 서쪽에 달러꽃 뿌리러 온 귀인들을 2천만의 감옥에 기약 없이 가둬도,
 마왕의 선의만 믿고 묵묵히 기다린다. 서쪽은 절대 닫지 않는다.
 --60대 후반 어느 노인 가라사대, 사랑은 용서라, 왼뺨마저 내밀며 기다려야 하나니!

 

 무려 16년 동안 그렇게 마왕의 선의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영실(영양실조)동무 2천만이 제발 마왕을 잡아가거나 내쫓아달라고 수백만이 죽어가면서 울부짖어도, 울타리 밖에서는 혈육의 눈에조차 마왕은 안 보이나 보다. 하물며 바다 건너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자들의 눈에 어찌 지하동굴에 꽁꽁 숨어 있는 마왕이 보이랴!  솜방망이 곧추 들고 구멍 숭숭 울타리 밖에서 수시로 윙크하면서 네 거인이 마왕을 위협하는 척한들 무슨 소용이랴!
마왕이 한 아이의 멱살을 잡고 나타나 대화하자며, 6자 회담하자며, 아니,
네 거인과 마왕과 한 아이까지 끼워 6자 회담하자며, 아니,
두 거인과 두 대(大)마왕과 한 아이와 마왕 이렇게 6자 회담하자며, 실은,
마왕이 벼랑 끝에 한 아이를 올려놓고,
'두 분은 가까이 오시고 두 놈은 게 서라' 하고,
'자, 이제부터 6자 회담하자'며, 비릿하게 웃는다. 그러면,
'시작이 반이다, 대화의 장이 열렸다'며, 감격의 눈물들을 흘린다.      
      

 어느 날 도둑같이 찾아온 마왕이 5천만의 눈에도 바로 코앞에서 직접 보여야,
 태양보다 더 눈부신 장군님의 금빛 인민복이 언제어디서나 보여야,
 괴테와 슈베르트가 보여 주고 들려 주던 마왕의 실체를 깨달을 모양이다.
 마왕은 데려갈 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한다.
 아직도 모르시는가 본데, 마왕은 선의(善意)가 아예 없다. 악의(惡意)밖에 없다.
 마왕은 무릎꿇고 퍼 주는 자만 좋아하고, 힘세고 슬기로운 이에게만 굴복한다.
  (2009.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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