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죽음과 백만 명의 죽음이 가하는 충격의 차이는 얼마나 될까. 그들의 죽음이 설령 똑같은 종류라도 충격의 차이는 결코 백만 배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한 사람의 죽음이 백만 명의 죽음보다 더 큰 충격을 줄 수 있다. 처절한 죽음의 과정을 있는 그대로 촬영해서 보여 주면, 인간이 아니라 동물일지라도, 특히 그것이 고문이나 잔혹한 살해 수법, 또는 굶주림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면, 영화일지라도 사람들은 몸서리친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일 경우, 가족이나 친구일 경우 한 사람의 죽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평생 정신적 외상에 시달릴 수도 있다. 너무 큰 충격으로 살아도 산 게 아닐 수도 있고, 그 후유증으로 또 한 생명이 지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기쁨은 어떨까. 열 개의 사탕이 한 개의 사탕보다 열 배의 기쁨을 가져다줄까. 체험적으로 누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말을 못하는 갓난아이도 이런 법칙을 알아서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엄마의 젖을 빨지 않는다. 이를 경제학에서는 한계효용의 법칙으로 설명한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속담도 이 현상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한다. 경제학 용어든 속담이든 욕망은 충족과 반비례함을, 다시 말해서 외부로부터의 자극은 감각에 노출되는 양이 많을수록, 시간이 길수록 점차 감소됨을 보여 준다. 내 나름대로 만든 말이지만, 자극체감의 법칙(the law of diminishing stimulus)이 적용된다.
슬픔과 기쁨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느껴질까. 역겨움과 짜릿함도 누구에게나 똑같이 느껴질까. 그렇지 않다는 것도 누구나 체험적으로 안다. 이에는 타고난 체질도 영향을 미치고 문화도 영향을 미치고 개인적인 인간관계나 경험도 영향을 미친다. 종교나 이념도 그 못지않게 영향을 미친다. 똑같은 현상을 두고도 한 사람은 천국의 두레박을 타고 올라가는 듯 기쁨을 느끼지만, 또 다른 사람은 지옥의 강을 건너는 듯 슬픔을 느낄 수도 있다. 또는 수억 개의 이파리 중에 하나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는 듯 무덤덤할 수도 있다.
서양의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는 마녀사냥이 정죄(定罪)의식으로서 정죄(淨罪)의식을 대신했고, 동양의 전(前)근대 유교 사회에서는 화냥년 손가락질이 가학적 쾌락을 선사했다. 서양 중세에선 외딴 집에 홀로 사는 할망구가 검정 고양이를 안고 다니면, 천사같이 순진한 아이부터 돌팔매질을 했다. 그것을 말리는 독실한 기독교인은 없었다. 독실할수록 마녀사냥에 앞장섰다. 마왕에게 영혼을 팔고 그와 대화하며 기독교 사회를 파멸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거짓 자백을 받을 때까지 상상을 불허하는 악랄한 고문을 가하는 것을 보고, 악마와 악녀는 그 할머니가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다, 라고 외치며 누군가 장내에 뛰어들면, 그는 또 다른 마녀로 낙인찍혀 더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아니, 감히 뛰어드는 자가 없었다. 마녀를 고문하는 것에서 도리어 집단적인 쾌락을 맛보았다.
동양의 유교사회는 대체로 군사 부문이 취약하여 오랑캐로 업신여기던 이민족에게 짓밟히기가 다반사였는데, 그렇게 지배층이 무지개 이념과 거미줄 관료조직으로 백성을 조직적으로 착취하다가 민심을 잃어 경제와 안보가 다 함께 허물어지면 예외 없이 오랑캐들이 쳐들어왔는데, 그 때 지배층도 일패도지(一敗塗地)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거니와, 동양판 마녀사냥은 그 후에 발생한다. 약탈이 목적이었던 오랑캐가 물러가면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지배층은 어렵지 않게 다시 지배층이 되는데, 그들은 전쟁의 책임을 정적과 백성에게 묻는다. 그리고 지배층과 피지배층은 일치단결하여 마녀를 만들어 함께 스스로의 죄를 씻는 정죄(淨罪)의식을 갖는다. 그것이 바로 죄 없이 죄 있는 화냥년에게 오랑캐의 비수보다 예리한 동족의 손가락 치켜들기다. 못난 남정네가 잘못하여 어쩔 수 없이 적에게 몸을 더럽힌 여인이나 포로가 되었다가 어찌어찌 돌아온 여인은 몸이 더럽히지 않았어도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욕을 받았다. 어쩌다 그들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호로(胡虜)새끼가 되어 대를 이어 고통을 당했다.
‘뒈져 버리지 왜 고향에 돌아왔느냐(還鄕女), 가문의 수치다, 너희는 인간도 아니다, 짐승보다 못하다!’
여기에는 지배층도 피지배층도 없다.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다. 그렇게 비겁하게 지배층은 자신들의 책임을 모면하는 한편, 교활하게 들끓는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가장 약한 사람들을 골라 분노에 떠는 피지배층의 만만한 노리갯감으로 던져준다.
현대 민주주의 시대에 이런 것은 아득한 전설로 여겨지고, 현대의 문화인은 야만의 시대를 회상하며 치를 떤다. 과연 그런 자격이 있을까. 과연 현대가 그 때보다 나을까.
1939년 세계2차대전이 발발할 무렵 전세계적으로 자유민주국가라고 불릴 수 있는 나라는 10개국 남짓했다. 그나마 여자들은 선거권도 제대로 없었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자유민주는 제2차대전 이후에 세계적으로 널리 퍼졌다. 그것은 수천만 명의 희생으로 얻은 피의 결과물이었다. 1990년대에 공산권이 몰락하면서 서구 자유민주 국가의 진보적 지식인 사회에서 널리 공공연히 칭송되던 공산권이 자행한 상상초월 마녀사냥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양차세계대전에서 총과 대포와 전염병으로 희생된 사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자유민주 국가들의 침묵 속에 고문과 기아와 중노동과 총칼에 의해 진보와 평등의 국가에서 반항 한 번 못하고 희생되었음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자유민주 국가의 진보적 지식인 사회에서 공개적으로 반성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 일제히 약속이나 하듯 입들을 싹 씻었다. 도리어 그들은 전열을 가다듬어 자유민주의 보루인 보수를 공격하기에 여념이 없다. 이들의 비수는 대개 자국의 등을 겨눈다. 세계적 경제위기를 맞아 다시 이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히틀러가 제일 잘 써먹은 케인즈를 들고 나와 기세등등하다. 실지로 케인즈는 독일어판에 가슴을 두근거리며 멋진 서문을 써 주었다.
크메르 루지의 킬링필드를 증거 부족이라며 부정하는 자들이 진보와 양심과 언론자유를 내세워 아직도 세계적 석학으로 떠받들리기도 한다만, 킬링필드는 그 곳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더 광범위하게 더 조직적으로 더 악랄하게 시베리아와 유럽 평원과 중원과 백두산 기슭에서 자행되었다. 현재도 북한에서는 모택동의 영원한 혁명이 계속되고 있다. 꽤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중국의 인권 상항도 참담하다. 이에 대해서 어느 나라가 전쟁도 불사할 각오로 지적할 수 있는가.
중국의 외환보유고와 값싼 제품은 전세계인으로 하여금 욕망의 침을 삼키게 한다. 욕망의 침이 넘어갈 때, 양심의 말도 함께 삼켜진다.
프랑스의 사르코지가 멋대로 까불다가 즉시 꼬리를 내린다. 미국의 오바마는 아예 까불지도 않는다. 그에게 중국 안에서 벌어지는 티베트족과 탈북자의 인권유린은 별나라 이야기거나 서양 중세의 마녀사냥 이야기이고, ‘변화 또 변화’의 사나이에겐 오로지 미국의 경제위기를 중국의 도움으로 어떻게 좀 극복할까, 그것만이 관심사다. 한때는 기세 좋게 환율조작국 어쩌고저쩌고 하다가, 열변을 토하다가 튄 침이 마르기도 전에 초강대국의 무대에 용상(龍床)을 하나 더 갖다 놓고 거기에 앉으시라고 정중히 초대한다. 유엔에서 아무리 북한과 수단과 투르크메니스탄과 중국의 인권에 대해 보고서와 결의가 금방이라도 세상을 바꿀 듯이 수십 년간 오르내리더라도 그것은 황야에서 외치는 바람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황야의 무법자에게 그것은 가학적 쾌락의 흥을 돋우는 추임새에 지나지 않는다.
당사자인 한국은 어떠한가. ‘역사 바로 세우기’, ‘제2의 건국’, ‘과거사 뒤집기’로 쾌락과 고통을 바꾸는 조직적이고 치밀한 마녀사냥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시위대가 경찰을 패고 군인을 걷어차면 환호하고, 진실의 풍선을 날리면 경찰을 패는 무리만이 아니라 자칭 보수 정권이라는 정부도 공권력을 동원하여 마녀사냥에 앞장선다. 그럼으로써 북한에 대한 진실은 이제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의 근대화는 정의가 패배한 역사요, 세계가 지탄하는 북한의 수령독재는 정통성이 빛나는 역사로 둔갑했다. 진실의 반공(反共)은 마녀(빨갱이) 사냥의 수치요, 거짓의 햇볕은 민족화해의 금자탑으로 둔갑했다.
저 진실의 시대에 귀순자 한 명이 TV에 나와 눈물을 흘리면 3천만 또는 4천만이 함께 눈물에 콧물도 덤으로 흘렸지만, 이젠 탈북자 1만 5천만이 한 목소리로 3백만이 굶어 죽었고 1천만 명이 여전히 영양실조에 시달린다고, 하루 24시간 내내 1년 365일 내내 감시의 인간 폐쇄회로(CC TV)에 시달린다고, 목이 쉬도록 외쳐도, 귀 기울이는 사람 하나 없고 눈물 한 방울 흘리는 사람 없다. 귀 기울이고 눈물 흘리는 사람은 늘 정해져 있다. 귀 기울이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은 5천만 중 과연 탈북자의 숫자만큼이나 될까. 5천만에게 3백만의 죽음과 1천만의 영양실조는 아무런 자극이 되지 않는다. 3백만의 굶어죽음에 대한 생생 증언이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온 국민의 눈물샘 자극제였던 한 사람의 모진 체험담에 미치지 못한다. 친북좌파에 의한 인위적 자극체감의 법칙에 의해 5천만의 감각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기껏 하늘을 나는 미사일과 땅을 울리는 핵폭탄에 잠시 움찔하거나(대다수 국민들) 크게 환호한다(극소수 골수 친북좌파). 그러나 언젠가는 진실을 직면해야만 하는 때가 올 것이다.
(2009. 4. 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