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1592년에서 1636년에 걸쳐 겨우 한 세대 남짓한 기간에 일어난 미증유의 비극이었다. 조선은 그 이전 200년도 유례없이 긴 평화를 누렸고 그 이후 300년도 질리도록 평화를 만끽했다. 그러나 전쟁 중이나 전쟁 후나 조선의 지배층은 전혀 반성하지 않았고 교훈을 얻지 못했다. 더욱 강퍅해졌고 더욱 독선적이고 위선적인 무리가 되었다. 도둑이 막대기를 잡는 격으로 오늘날 북한처럼 전쟁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자들이 대를 이어 권력을 독점하여, 김일성과 김정일이 가당찮게 평등과 민족과 정통성을 들먹이며 북한주민을 쥐어짜듯이 우습게도, 아니, 구역질나게도 삼강오륜을 들먹이며 죄 없는 백성만 후려쳐 백골이 진토(塵土)된 시체에도 세금을 매겼고(백골징포白骨徵布) 깡마른 엄마의 빈 젖을 빠는 젖먹이에게도 군역(軍役)을 빌미로 세금을 거둬서(황구첨정黃口簽丁) 중간에서 몽땅 착복했다. 그런 돈으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처럼 조선에 없는 아들에게 집 사주고 조선에 없는 딸에게 비단옷 사 주었다. 마침내 이씨조선은 19세기에 이르면 국가는 없고 붕당과 가문만 존재하는 부족사회 내지 씨족사회로 전락했다.
조선시대 임진· 병자 연간보다 더한 국가적 위기가 고려시대에도 있었다. 고려의 국운이 다할 무렵에 일어났던 몽골의 침략은 잘 알려져 있지만, 후삼국이 통일되고 평화가 한 100년 계속된 후 고려 중기에도 그보다 결코 만만치 않았던 거란과 여진의 침략이 있었다는 것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김춘추가 당나라에 가기 전 같은 단군의 자손이라고 먼저 내민 외교의 손을 뿌리치고 속국처럼 우습게 여기던 신라한테 결국 망하고 만 고구려만 대단한 줄 알지, 고구려처럼 만주에서 흥기했으되, 중국의 만리장성을 단숨에 넘고 황하도 건너뛰어 양자강 이북을 수백 년 장악했던 거란족의 요(遼)나 여진족의 금(金)은 잘 모른다. 고구려는 이 요와 금에 비하면 국가의 수명은 길었지만, 그 영광은 아예 상대도 안 되었다. 이 당시 중국 한족의 송은 요와 금의 신하국이었다. 해마다 전쟁배상금을 국가 재정이 휘청거리고 국민의 허리가 부러지도록 갖다 바쳐야 했다. 국토의 절반 이상을 잃었지만, 그렇게 섬기고도 수시로 침략 당했다. 바치는 것보다 얻어오는 것이 더 많았던 조선시대의 조공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러나 중국에서 보면 그저 손바닥만한 고려가 희한하게 끄떡도 없었다. 거란족이든 여진족이든 침략자를 모조리 물리치고 국운이 날로 뻗어나가 송나라보다 도리어 국가적 위상이 높아졌다. 임진왜란은 풍신수길의 부하들이 16만을 이끌고 쳐들어왔고, 병자호란은 청 태종이 직접 10만의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지만, 거란은 3번에 걸쳐 각각 80만, 40만, 10만의 대군으로 북풍한설같이 휘몰아왔다. 이것이 거란과의 30년 전쟁이다. 그 중에서 두 번째는 일찍이 1004년에 중국(송)에게 치욕적인 [전연의 맹]을 강요한 바 있는 요의 성종이 친정(親征)했다. 바로 몇 년 전에 중원의 황제를 굴복시킨 만큼 그의 군대는 옛날의 수나라 당나라 군대 못지않았다. 이런 요의 성종에게 강조의 30만 대군이 일거에 궤멸됨에 따라, 양규의 예봉을 피하여 요의 성종은 40만 중 20만은 뒤에 남기고 20만을 이끌고 길을 우회하여 득달같이 1011년 1월 1일 설날에 맞추어 지키는 군인이 거의 없었던 개경을 짓밟았다. 도성 전체에 불을 지르고 왕궁에서 민가까지 남김없이 약탈했다. 그 해 설날은 거란족에겐 세 봄이 일각같이 후딱 지나가는 축제였지만, 고려인에겐 일각이 세 가을인 양 느릿느릿 흘러가는 악몽이었다.
왕위에 등극한 지 1년밖에 안 된 현종은 불과 50여명을 데리고 허겁지겁 나주까지 피신했다. 그러나 7년 후 거란이 최정예병 10만으로 다시 침략하자, 현종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저 악몽 같던 1010년 말 설날 잔치 준비에 가슴이 설레기는커녕 종묘사직과, 얼떨결에 왕이 된 자신의 목숨까지 위태로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모두들 허둥지둥하는데 오로지 한 사람 꾀죄죄하고 못생기고 콩알만한 자가 침착하게 우선 피하고 후일을 도모하라고 건의하던 그 충신을 내세워 귀주에서 그들을 섬멸해 버렸다. 이 장군이 문인 출신으로서 무(武)도 빼어났던 강감찬이다(정확한 발음은 강한찬姜邯贊). 고려가 제대로 굴러갈 때는 이처럼 문무가 조화를 이뤘다.
고려는 드넓은 중원을 무인지경으로 짓밟던 거란의 침략을 맞이하여 처음에는 서희의 활약으로 오히려 강동6주를 개척하고, 두 번째는 일시적으로 한 성 곽주를 빼앗겼지만 양규가 불과 1천의 군사로 눈부신 활약으로 그것을 되찾음으로써 끝내 단 한 뼘도 요에 넘기지 않았다. 세 번째는 요나라의 군대를 아예 요절내 버렸다. 동북면에서 여진이 쳐들어온 적이 있지만, 현종은 이를 간단하게 물리치고 모든 문물제도를 완성하면서 국방도 튼실히 했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현종의 증손자인 예종은 윤관에게 17만 대군을 주어 9성을 쌓게 하여 요나라를 물리치고 중원의 새 패자(覇者)로 등극하는 금나라의 기를 일찌감치 꺾어 놓았다. 그래서 금나라는 감히 고려에 쳐들어오지 못했다. 자랑스러운 우리 조상의 역사이다.
조선의 선조와 인조는 고려의 성종과 현종처럼 똑같은 국가의 위기를 맞이했지만, 제 한 몸과 제 가족을 염려하고 돌볼 줄밖에 몰랐다. 충신은 역신으로 몰거나 간신이 아닐까 의심하고, 간신은 충신으로 확신했다. 위기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하나도 생각해 내지 못했고 발만 동동 굴리다가 그런 방법을 누가 제시하더라도 알아 보지 못하고 해괴한 명령만 남발했다. 위기에서 기회를 찾는 것이 아니라 위기에서 더 큰 위기를 키웠다.
현종은 사생아였다. 탄생부터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헌애왕후(천추태후)의 동생인 헌정왕후는 남편인 경종이 죽고 나서, 외가 쪽은 다르지만 신라 왕손과 태조 사이에서 태어난 삼촌 왕욱(王郁)과 눈이 맞았다. 어느 날 왕욱의 집에 불이 나서 임금인 성종까지 달려 왔는데, 거기에 친여동생이 남산만한 배를 안고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성종이 노하여 왕욱은 귀양 보내고 헌정왕후는 집에 돌려보냈다. 그러나 너무 놀라서 그만 헌정왕후는 집 앞의 버드나무(한국 신화에서 버드나무는 주몽의 어머니 유화柳花부인의 예에서 보듯 왕의 어머니를 뜻함) 아래에서 혼절해 버렸다. 헌정왕후는 애만 낳고 덜컥 죽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현종은 고려왕실과 신라왕실의 피를 다 이어받은 고귀한 신분이 되었다. 그것은 다 훗날의 이야기이고, 어미 아비 없는 저주의 인생이었다. 성종이 불쌍히 여겨 이런 사생아를 궁중에서 키우며 때로 무릎에 올려 안아 주며 귀여워했다.
고려시대가 전공인 사학자는 드물다.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다. 근년에 고려를 고구려와 연관하여 ‘코드’ 드라마가 심심찮게 제작되었지만, 엉터리와 억지가 난무한다. 일본인 못지않은 역사왜곡이 다반사로 이뤄진다. 채시라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천추태후]는 거의 막장 사극(史劇)이다. 얼치기 친북좌파와 페미니스트의 입김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천추태후는 목종의 어머니이자 경종의 왕후요, 성종의 누이요, 현종의 이모이자 사촌누이다. 태조 왕건의 손녀이기도 하다. 신라의 성골진골이 자기네들끼리 결혼하던 것처럼 근친혼이 성행하던 시절이라서 가계가 이렇게 복잡하다. 하여간에 헌애왕후는 과부 왕후의 몸으로 김치양과 놀아나다가 오라버니인 성종에 의해 불륜을 계속할 수 없게 된다. 이를 바득바득 갈았을 것이다. 그러나 성종이 아들이 없이 죽자, 경종과 헌애왕후 사이에서 난 목종이 왕으로 등극한다.
얼씨구나, 헌애왕후는 태후로 올라서고 제일 먼저 귀양 간 김치양을 개선장군인 양 불러들여 노골적으로 애욕(애욕으로 끝났으면 괜찮았을 수도 있지만)과 권력욕을 동시에 충족시킨다. 어엿한 성인인 18살의 목종이 어리다며 섭정한다. 김치양과 권력을 양분하여 나라를 엉망으로 만든다. 그녀가 기거하던 천추궁을 따서 자신을 천추태후라 부르게 한다. 목종은 절망하여 어여쁜 소년들과 동성애에 빠진다. 보다 못한 강조가 조정을 뒤엎고 지금의 북한산에서 이모이자 사촌누이인 천추태후에 의해 강제로 머리가 깎여 염불을 외며 수시로 그녀가 보낸 자객들에게 목숨을 위협받던 대량원군을 모시고 와서 왕으로 삼으니, 그가 곧 고려조 최대의 명군이자 현군인 현종이다. 천추태후는 김치양의 아들 곧 불륜의 아들을 즉위시켜 김씨로 왕조를 바꾸려 했다. 눈엣가시가 성종의 총애를 받던 왕순(王詢) 곧 현종이다. 그는 목종의 이종사촌이었는데, 동성연애하느라 아들을 생산하지 못한 목종에 의해 1003년 대량원군으로 봉해진 바 있다. 이제 왕순만 사라지면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새 왕조를 개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현은 후일 현종을 극찬했다.
“군자는 나라가 잘 다스려질 때도 환난에 대한 경각심을 잊지 않아야 하며, 나라가 편안할 때도 위태로움을 생각하여 시종일관 삼가는 마음을 늦추지 않음으로써 하늘로부터 어여삐 여김을 받는다. 나는 현종에게서 도무지 흠잡을 수가 없도다![顯宗所謂吾無閒然者乎-고려사]”
천추태후는 현종을 죽이려 혈안이 되었지만, 오늘 소개하는 지채문(智蔡文)은 아무도 선뜻 나서려 하지 않을 때 자진해서 왕을 모시고 나주까지 모셨다. 그의 살신성인이 없었으면 현종으로부터 그의 증손자 예종까지 이어지는 고려의 100년 황금시대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충(忠)이라 보지 않고 의(義)라고 본다. 충은 상하 관계가 분명할 때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바치는 붉은 마음이지만, 의(義)는 대등한 관계일 때 가족 심지어 자신의 생명보다 우선하여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구해 주는 따뜻한 마음이다. 현종은 엄연히 왕이고 지채문은 일개 군인인데, 어떻게 상하관계가 아니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1010년 바람 앞의 등불 신세였던 개경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고려인의 의식세계를 엿볼 수 좋은 예가 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척준경(拓俊京)이 한 말이다. 그는 요새로 말하면 동사무소의 말단 공무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가난하고 실력도 모자라 그마저도 못하여 건달이자 깡패로 살아간다. 그러다가 후에 숙종이 되는 계림군의 아래에 들어가 심부름꾼이 된다. 여진족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장교로 승진한다. 그러나 못된 버릇이 남아 행패를 부린 모양이다. 이런 그를 윤관이 어여삐 보아 구제해 준다. 의(義)의 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윤관의 9성 개척 과정에서 척준경은 적에게 포위된 윤관의 목숨을 구해 주는 등 수훈갑의 혁혁한 공을 세워 일약 출세한다.
다음은 [고려사의 열전 윤관(尹瓘) 편]에 나오는 대목이다.
여진의 화살과 돌이 빗발처럼 쏟아져서 아군이 진군할 수 없었다. 이 때 윤관이 척준경을 불렀다.
윤관: 날이 저물면 사태가 위급하게 될 터이니, 그대는 장군 이관진과 합력하여 공격하라.
척준경: 제가 일찍이 장주에서 종군하다가 과오로 죄를 범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장군이 저를 장사(壯士)라 하여 조정에 특별히 청하여 용서 받았습니다. 오늘이야말로 저의 한 몸을 희생하여 국가에 보답할 날입니다.
또한 이런 일도 있었다. 출처는 동일하다. 이때는 윤관이 적을 가볍게 보고 적을 기습하려다가 도리어 포위되어 8천 명의 부대가 궤멸되어 불과 주위에는 10여 명밖에 없었다. 이때 척준경이 수천 또는 수만 명의 적 포위망을 향해 불과 10여 명을 이끌고 그들을 구원하러 달려가려 하자, 그의 아우 척준신이 사색이 되어 말린다.
척준신: 적진이 견고하여 좀처럼 돌파하지 못할 것 같은데, 공연히 쓸데없는 죽음을 당하 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소?
척준경: 너는 돌아가서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라! 나는 한 몸을 국가에 바쳤으니 의리상 가 만히 있을 수 없다. (爾可歸養老父 我以身許國義不可)
척준경이 없었으면 윤관의 9성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척준경은 원래 윤관의 부하가 아니었다. 재주를 가상히 여긴 윤관으로부터 아무 조건 없이 평생 잊지 못할 은혜를 입었다. 이것이 바로 의(義)이다. 척준경이 국가를 앞세우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분이고 오로지 윤관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도 돌보지 않고 심지어 부모에 대한 효도 도외시한다. 이 일은 현종의 증손자 대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면, 왜 개경에서 아무도 선뜻 현종을 따라나서려 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거란의 군대보다 오히려 자국의 백성이 더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때는 고려가 건국된 지 이미 100년이 다 되었지만, 아직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했다. 지방은 여전히 호족들이 다스리고 있었다. 태조는 29명의 왕비를 얻는데, 그가 유난히 색을 밝혀서 그런 게 아니다. 그것은 지방의 호족과 대등한 관계에서 명목상 신하 관계를 맺고 서로 침범하지 않기로 약조했다는 의미다. 왕건이 부처처럼 마음이 넓어서 그런 게 아니라 직속 군대가 약했기 때문이다. 기껏 5천이나 1만 명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오늘날 경북 선산인 일선의 일리천 마지막 전투에서는 약 10만 명을 동원했지만, 그것도 직속부대가 아니라 연합부대였다. 광종과 성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직 고려 왕실은 허약했다. 더군다나 현종은 강조에 의해 어느 날 갑자기 납치되듯 절에서 끌려와서 18살에 왕관을 썼다. 강조의 30만 대군은 이미 궤멸되었다. 강조가 전방으로 몽땅 군대를 끌고 갔기 때문에 개경을 비롯하여 임진강 이남에는 군대가 거의 없었다. 있더라도 반(半)독립 상태인 지방 호족의 군대였다. 조금만 이상한 마음을 먹으면 왕은 자기 백성에게 인질이 되거나 살해될 수 있었다.
실지로 현종이 지채문의 호위를 받아 남으로 달아날 때, 동네 건달도 10여 명이 몰려와서 ‘네가 왕이니? 가진 것 다 내놔. 왕비가 이쁘네, 나한테 좀 빌려 줄래? 만삭인 여자는 말고!’하는 식의 수모를 당했다. 처음에 같이 출발했던 자들도 하나둘 달아났다. 극적인 장면이 수두룩하지만 몇 개만 소개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삼례역에 이르니, 전주절도사 조용겸이 평복(이 말에도 주의하라)을 입고 왕의 행차를 맞았다.
박섬: 전주는 백제의 옛 땅일 뿐만 아니라 우리 태조께서 곱지 않게 보셨으니, 청컨대 전 하께서는 가시지 말기 바랍니다.
현종: 그렇겠구나.
왕이 장곡역에서 유숙하였는데, 조용겸이 왕을 그 곳에 머물게 해 놓고 왕을 끼고 호령하려는 야심을 품고 전운사 이재와 순검사 최집, 전중소감 유승건 등과 공모하고 갓에다 흰 깃발을 표지로 꽂고 북을 치고 함성을 울리면서 다가오므로, 지채문이 사람을 시켜 문을 닫고 단단히 지키니 적들이 감히 들어오지 못했다. 왕과 왕후는 말을 탄 채로 역의 청사에 있었고, 지채문은 지붕에 올라가서 물었다.
“너희들이 왜 이러느냐? 유승건이 거기 있느냐?”
지채문이 외치자, 적들이 수군거렸다.
“떴다!”
지채문이 계속 물었다.
“너는 누구냐?”
적들이 반문했다.
“너야말로 누구냐?”
이에 지채문이 다른 음성으로 꾸며서 대답하였으나, 적이 알아차리고 지껄였다.
“지 장군이네!”
지채문이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지목하여 말했다.
“너는 천총마 한조로구나!”
지채문은 왕의 명령으로 유승건을 부르니, 유승건이 말했다.
“그대가 나오기 전에는 내가 들어갈 수 없다.”
채문이 문 밖으로 나가 승건을 데리고 왕의 앞으로 가니, 유승건이 울면서 말했다.
“오늘의 일은 조용겸이 꾸민 것으로 저는 알지 못합니다. 청컨대 왕명을 받들고 조용겸을 불러 오겠습니다.”
왕이 허락하였더니, 유승건이 밖으로 나가서 그만 도망쳤다. 왕이 양협을 시켜 조용겸과 이재를 불러서 그들이 오자, 장병들이 두 사람을 죽이려 하는 것을 지채문이 소리쳐서 제지하고 그 두 사람을 시켜 대명왕후가 탄 말을 타고 가게 하다가 얼마 후에 전주로 돌려보냈다. --[고려사 열전 지채문 편]
이처럼 왕의 권위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채문의 기지와 용기가 아니었으면, 왕은 언제 비명횡사할지 몰랐던 것이다.
태조 왕건의 제2 고향인 나주 근처에서는 거란군이 쳐들어온다는 헛소문이 돌아, 왕이 깜짝 놀라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때 지채문이 왕을 다독거려서 제 자리로 돌아가게 한 다음, 내막을 알아보기 위해 친히 정찰했다. 알고 보니, 거란이 물러갔다는 하공진의 공문이 인편으로 도착한 것이었다.
현종은 후에 지채문의 의(義)에 대해 충분히 보상했다. 지채문은 왕의 총애를 믿고 함부로 나대는 일이 없이 조용히 살면서 정2품 벼슬까지 올랐다. 1026년 죽을 때도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덕종은 후에 부왕을 잘 모신 지채문에게 특별히 교지를 내렸다.
고 상장군 좌복야 지채문은 선왕께서 남녘으로 피난하실 때에 홀로 충절을 다하여 으뜸가는 공을 세웠다. 마땅히 그 공훈을 기록하여 후진들에게 충성을 권장할지어다. --[고려사 열전 지채문 편]
현종은 출생 과정이나, 성장 과정이나, 왕위 등극 과정이나, 왕으로 등극하자마자 겪은 참담함이나, 정신병자가 되기에 딱 알맞았다. 폭군이나 암군이 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러나 그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모든 역경을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그에 의해서 비로소 고려는 나라다운 나라가 되었다. 전국에 비로소 왕권이 미치게 하였다. 전국에 지방관을 보냈다. 그래서 세금도 전국적으로 거둘 수 있었다. 군대도 쉽게 동원할 수 있었다. 강감찬은 10만의 적을 맞이하여 20만 대군으로 반격했다. 오늘날의 행정구역은 현종이 마련한 것과 대동소이하다. 강감찬이 거란의 3차 침입을 격퇴하던 1018년 무렵에 현종은 행정망을 완비했던 것이다. 4경(京), 8목(牧), 15부(府), 129군(郡), 335현(縣), 29진(鎭으)로 편제하고 그 중 3분의 1 가량의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했다. 이렇게 영명한 군주가 지채문의 아무 대가 없는 의(義)가 없었으면 뜻을 반 자락도 펴지 못하고 비명횡사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절로 벌렁거린다. 정종(靖宗), 문종, 숙종, 예종 등은 중흥군주 현종의 아들, 손자, 증손자로서 찬란한 고려의 역사를 이어갔다. 고손자인 인종 대에 이르러 고려는 요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문헌공도 최충은 현종을 이렇게 평가했다.
나라가 바로잡힌 뒤에는 거란과 화친을 맺어 군사들을 쉬게 하고, 부세와 요역을 가볍게 하고, 재주 있고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여 정사(政事)를 공평하게 하였으며, 안팎이 무사하였으며 해마다 농사가 잘 되었으니, 가히 중흥의 군주라 일컬을 만하다. --[고려사절요 현종]
反正之後, 和戎結好, 偃革修文, 薄賦輕徭, 登崇俊良, 修政公平, 內外底寧,農桑屢稔,可謂中興之主矣
(2009. 5. 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