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만큼 못 본다

너희가 이 어린이와 같아지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한때 한국의 식자연(識者然)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던 말이다. 유홍준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약간 건방진 어투로 쓴 지극히 상식적인 이 말이 늦봄의 들불처럼, ‘어린 백성’의 무리들과 고상한 자신을 차별화하고 싶어 하는 선무당 지식인들의 머릿속 가랑잎에 불이 붙어 겁나게 퍼져 나갔던 것 같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이 말은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카이사르의 명언을 인용하면서 크게 유행시켰다. [갈리아 전기(戰記)]에 나온 건데, BC 56년 카이사르의 부장 중 한 사람인 사비누스가 노르망디의 베넬리족을 상대로 싸울 때 첩자를 보내, 로마군이 겁쟁이요 일부가 몰래 밤을 틈타 위기에 처한 카이사르를 도우러 갈 거라는 거짓 정보를 제공하는데, 정황상 충분히 믿을 만했다. 카이사르가 후에 이런 미끼에 덜컥 걸려드는 야만족을 경멸하여 쓴 말이다. 막상 시오노 나나미는 이 전투 장면에서는 이 말을 안 쓰고 다른 데서 여러 번 써 먹는다. 특히 그녀는 카이사르는 범인과는 달리 보고 싶은 않은 것도 본 통찰력 있는 위인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써 먹는다. 라틴어 원문을 찾아보니까, “Homines id quod volunt credunt.”로 되어 있다. 영어 번역본은 “Men willingly believe what

they wish.”이고, 박광순은 이것을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쉽게 믿어 버리게 마련이다.”라고 새겼다. ‘quod'가 관계대명사 'what'에 해당하고 'volunt'는 영어의 'voluntary'에서 보듯이 ‘간절히 바라다’에 해당한다. ‘credunt'는 영어의 ‘credit'에서 보듯이 ‘믿는다’는 뜻이니까,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는 바로 그것을 믿는다.’가 원문에 가장 충실한 뜻인 듯하다.

 

 순전히 가설의 산더미로 이뤄진 비과학적인 정신분석학과 달리 의식과 기억에 대해 분자생물학과 신경과학은 철저히 증거를 찾아 겸손하게 접근함으로써 물리화학적인 생리를 조금씩 밝혀내고 있다. 그 결과 칸트의 선험 지식과 로크의 백지 상태가 둘 다 옳다는 것이 드러났다. 유전적으로 타고난 인식 능력이 바로 선험 지식이고, 환경 요인과 개인의 노력에 의해 늑대 소년도 되고 아인슈타인도 된다는 것이 백지 상태다. 이렇게 되는 핵심 요인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의 뇌가 수행하는 선택과 집중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이 경험하고 알고 느낀 것을 미루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여 정체성을 유지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매 순간 뇌에 들어오는 정보가 너무도 많기 때문에 그것에 나름대로 우선순위를 두지 않으면 언제든지 목숨을 잃을 수가 있다.

 

 근본적인 한계는 어떤 인간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예외를 벗어나는 작은 증거들, 다시 말해서 진리의 전당이라 확신하는 개인적 또는 집단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는 사소한 예외들에 겸손한 사람들은 한 발 앞서 희미하나마 미래를 들여다볼 수 있고 시대착오적인 시대의 통념 내지 시대의 광기에서 한걸음 비껴 설 수 있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믿고 싶은 것만 보는 게 인간이라는 말을 뒤집으면, ‘아는 만큼 못 본다’는 말도 된다. 벌거숭이 임금님의 징그러운 나체를 본 어린이의 이야기가 이런 면을 잘 드러낸다. 사람들은 임금님은 가장 좋은 옷을 입는다는 관념의 노예가 되어, 사기꾼 재단사의 농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칭찬하고 아첨하고 감탄하기에 급급하다. 그러나 어린이는 임금님이 좋은 옷을 입는지 안 입는지 모른다. 옷과 맨살은 구별할 줄 안다. 어린이도 알긴 알되 구경꾼 중 가장 적게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핵심적인 인식 능력은 가장 날카롭다.

 

 “너희가 이 어린이와 같아지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가르침이 바로 이와 같은 인간의 맹점을 잘 지적한다. 날카로운 인식을 가지려면, 아는 것을 잊어 버려야 한다.

 

 오늘날 한국은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갈가리 찢어져 있다. 매일 눈을 마주치는 동족이자 이웃이자 형제자매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위헌적 6·15 선언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한 하늘을 머리에 일 수 없는 원수로 여기고 민족의 이름으로 다름 아닌 민족의 피를 보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급변하는 현실의 거대한 물줄기는 보지 못하고, 성리학적 정통성과 마르크스적 계급투쟁과 민족적 배타성에 갇혀 스탈린과 모택동과 김일성 이어서 김정일과 김대중의 아름다운 말과 추악한 행동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전 세계 사람들이 열이면 아홉은 훤히 보고 천둥처럼 듣는 것도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 돌처럼 단단하고 산처럼 거대한 지식 때문에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 완전히 망하기 전까지 그들은 절대 깨닫지 못할 것이다. 김정일의 건강을 보아, 김대중의 나이를 보아, 호금도의 음흉함을 보아, 촛불 하나 끄지 못한 이명박의 기회주의를 보아, 개성의 인질 100여 일을 보아, 김정일의 막가파식 핵 지진과 미사일 폭죽 쇼를 보아, 점점 기세등등해지는 한국의 방송을 보아, 진실의 날이 멀지 않은 듯하다.

     (2009.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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