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세습은 시대착오입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은 용감했다’는 세 세대의 무용담은 기억에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용감했다’는 두 세대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간혹 들었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은 용감했다’는 세 세대의 무용담은 기억에 없습니다.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일에 할아버지와 손주가 나란히 등장할 상황은 거의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연로하고 손주는 무슨 일을 성사시키기엔 너무 어린 까닭입니다.

그런데 지금 북녘땅에선 세 세대가 등장하는 사건이 극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평범한 일이 아니라 나라의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사안입니다. 북한의 최고지도자에 관한 일입니다.

할아버지 김일성-아버지 김정일-아들 김정운의 세 세대로 이어지는 ‘권력세습의 드라마’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드라마는 북한뿐 아니라 전세계의 지대한 관심사로 떠올랐습니다. 너나할 것 없이 권력세습 드라마의 절정과 결말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권력세습이 북한의 전매특허는 아닙니다. 중동지역의 회교국가 다수가 아직도 왕위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또 제 3세계의 일부 독재국가도 권력세습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권력을 세습하는 게 ‘식은죽 먹기’는 아닙니다.

舊(구)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 아래서 외무장관을 지낸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즉 개혁과 개방을 추진해 냉전 종식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셰바르드나제는 소련 해체로 탄생한 독립국가연합의 일원인 그루지아에서 1995년부터 2003년까지 8년간 대통령을 했습니다. 그가 초기 그루지아의 안정에 기여한 부분은 어느 정도 인정받을 만합니다.

하지만 셰바르드나제는 권력의 자리에서 불명예 퇴진했습니다. 권력을 아들에게 넘겨주려다 시민의 저항에 부닥쳤기 때문입니다. 뿔난 민심은 셰바르드나제의 권력승계 기도에 결사항전의 기세로 대들었습니다.

결국 셰바르드나제의 꼼수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그루지아 시민의 세습반대 투쟁은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열매를 맺어 ‘장미혁명’으로 불립니다.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북한과 비슷한 나라로 쿠바를 들 수 있습니다. 쿠바는 북한처럼 자립경제체제에 의존해 힘겹게 살림을 꾸려가는 나라입니다. 실권자인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의장이 2008년 건강상의 이유로 40여년간 장기집권을 마무리하고 권력을 내놓았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악화설과 후계체제 구축 가속화가 묘하게 맞물려 가고 있는 점에서 두 나라는 흡사합니다.

그러나 쿠바에서는 북한과 같은 노골적인 세습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권력을 아들에게 물려주려 하지만, 카스트로는 동생 라울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아들이나 동생이나 ‘오십보 백보’ 아니냐고 따질 수 있습니다. 권력이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이양되지 않았으니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그래도 세상물정 모르는 북한의 김정운과 수십년간의 국정경험을 갖춘 쿠바의 라울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북한 정부는 약체인 김정운의 체급을 부쩍 올려야 한다는 현실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각도로 묘수를 찾고 있습니다. ‘백두의 혁명전통 계승’ ‘만경대 가문’ 등을 반복해, 김일성-김정일-김정운으로 이어지는 혈통에 기반한 권력세습 에 주민들이 반대 의견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정치의 3대 악습인 혈연, 지연, 학연 가운데 가장 전근대적이고 폐해가 큰 ‘혈연의 고리’ 안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혈연만으로는 일이 술술 풀릴 것 같지 않습니다. 김정운이 차기 지도자로 결정됐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주민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고 합니다. 장막에 가려진 김정운의 존재 자체도 모르는 주민들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어리고 경험이 아주 부족한 김정운이 과연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 갈 수 있느냐고 반신반의 하는 반응입니다.

그래서 북한 당국이 김정운에 대한 우상화 전초작업에 착수했다고 합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권력승계 땐 ‘김정일이 어려서 항일운동에 동참했다’는 믿거나말거나 한 얘기로 혁명세대임을 강변했지만, 김정운과 관련해선 혁명세대의 후손이란 점 외엔 영양가 있는 홍보 재료가 궁해 보입니다.

김정일 위원장이 현지지도에 나갈 때 김정운을 데리고 다닌다고 해서 과연 김정운의 지도자로서의 업적이 얼마나 쌓이겠습니까?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발사 등으로 강성대국을 이뤘다며 그 공적을 김정운에게 돌리려 한다고 해서 세상이 기립박수를 보내겠습니까?

북한은 20대의 김정운을 30대 중반으로 둔갑시켜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 정도는 돼야 명함을 내밀 수 있다는 판단을 한 듯합니다. 일부 연예인이 나이를 고무줄처럼 늘였다 줄였다 해 빈축을 사곤 하지만, 한 나라의 최고권력을 어린 아들에게 넘기기 위해 나이를 부풀리는 데는 혀를 차게 됩니다.

그래도 성이 안 찼는지 경력도 뻥튀기 한다고들 야단입니다. 이미 오랜기간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는 인식을 주기 위해서겠지만, 선거에 당선되기 위해 경력을 조작해 망신을 당한 남한의 일부 정치인을 연상케 해 씁쓸한 뒷맛을 남깁니다. 있는 그대로, 능력 그대로의 모습으로 심판을 받더라도 3대 세습은 시대착오적입니다. 하물며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전혀 검증되지 않은 새파란 김정운을 내세운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크게 잘못된 일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봉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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