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억 통의 전화와 1천 통의 편지>란 제목으로 2001년에 발표했던 글입니다.
[무산된 가족상봉]
제6차 남북장관회의가 아무 성과도 없이 끝났다. 금강산에서 하겠다던 제4차 남북이산가족상봉도 무산되었다.
왜 남북은 정상끼리 만나 공동선언문까지 합의하여 만방에 알렸음에도 이렇게 민간 교류가 어려울까. 북한 당국의 주장처럼 미국에 보수정권이 들어서고 테러 사태 이후 한국에서 취한 군의 비상경계태세가 과연 이유가 될까. 한국의 보수 세력들이 발목을 잡아서 그럴까.
[중국인과 독일인의 교류]
중국과 대만, 옛 동서독과 남북의 교류를 먼저 비교해 보는 것이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중국인과 독일인의 민간인 교류와 경제 교역은 너무도 흡사하다. 요란한 소리가 전혀 없이 간단한 조치 하나로 민간인이, 국민이, 인민이 원하는 대로 거의 100% 서로 만났다.
[연 2백10만 명(양안), 연 1천3백만 명(동서독)]
현재 중국과 대만 이른바 양안 사이에서는 일 년에 대만에서 중국으로 2백만 명, 중국에서 대만으로 10만 명이 드나든다. 1988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1년 전에 이미 서독에서 동독으로 667만 명, 동독에서 서독으로 675만 명이 들락거렸다. 통일되기 전 동독 인구가 고작 1천7백만 명이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 숫자가 상대적으로 얼마나 많은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연 1천 통의 편지(남북)]
반면에 남북 사이에는 그렇게 신문, 방송이 요란을 떨었지만, 남북 문제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고 자화자찬하는 현 정부 들어서도 1998년부터 2001년 7월까지 방북 21,761명, 방남 913명밖에 안 된다. 그나마 민간인의 가족상봉은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들었지만, 고작 1,152건밖에 안 된다. 서신교환은 3,096건이다. 연 평균 1천 통도 안 된다는 말이다.
[처음이라서 그런 게 아님]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 처음이니까 그렇지, 라고 변명하고 싶겠지만 독일인과 중국인의 교류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1964년 11월(저 유명한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본격화되기 8년 전) 동독각료이사회에서 연금수령자(노인)는 4주간 서독을 방문할 수 있다고 결의하자, 서독에서는 즉시 방문하는 이들 모두에게 100마르크씩 환영금을 주었다. 그 해에 바로 100만 명의 동독인이 서독의 친인척과 상봉했다. 1972년 10월에 양독 사이에 통행조약이 발효된 이후에는 동서독 합해서 연 1천만 명이 드나들었다. 1975년 한 해만 해도 동독에서 서독으로 137만 명, 서독에서 동독으로 773만 명이 자본주의를 구경하고 공산주의를 견학했다.
서신 왕래는 이미 1968년에 서독에서 동독으로 1억5백 만 통, 동독에서 서독으로 1억1천5백만 통이 오갔다. 1972년부터는 편지는 오히려 줄어드는데, 그 이유는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75년에 이미 서독에서 동독으로 연 1천만 통, 동독에서 서독으로 4백만 통으로 전화가 불이 났다. 통일되던 해는 합해서 5천만 통화가 접속되었다.
[자유로운 새와 떠다니는 라면 봉지]
중국인은 어떨까? 이들도 독일인과 비슷하다. 1988년 민간인 왕래가 허용된 후 바로 60여만 명의 대만인이 중국을 방문했다. 1999년까지 총 1,547만 명의 대만인이 대륙을 밟았고 44만 명의 중국인이 섬을 휘젓고 다녔다. 편지는 1988년에 4백만 통이, 1999년에는 1,350만 통이 바다를 새처럼 가볍게 날아갔다. 전화는 현재 1억7천8백만 통이 호떡집에 불난 듯이 시끄럽다. 반면에 남북 사이에는 편지도 날아가지 못하거니와 단 한 통의 전화도 민간인 사이에선 울지 못한다. 하늘을 나는 새만이 남북의 숲을 자유로이 오갈 뿐이다. 라면 봉지만이 파도를 타고 남에서 북으로 흘러갈 뿐이다. 계란을 넣어서 먹으면 훨씬 맛있습니다, 라는 소식을 싣고. (특급 대우의 조종사 이웅평의 귀순 이유. 아, 남조선에 가면 계란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겠구나.)
[개방적인 자본주의 국가와 폐쇄적인 공산주의 국가]
개방적인 자본주의 국가와 폐쇄적인 공산주의 국가의 교류는 폐쇄적인 공산국가가 문을 열면 절로 이루어진다. 공산체제의 기득권자들이 인민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면 절로 이루어진다.
북한 당국은 민간인 교류에 전혀 관심이 없다. 오로지 정치 선전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기껏 100명 단위로 공개된 장소에서 만나게 해 놓고 전세계가 떠들썩하게 생색을 내는 데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허위의 안개는 진실의 햇빛을 쬐면 하루아침에 걷혀 버린다. 북한은 이를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다. 자유왕래를 허용하는 순간 이 세상에서 가족을 가장 중시하고 성질이 제일 급한 민족인 한민족은 한 달 안에 천만 명이 헤어진 가족과 만나 부둥켜안고 뒹굴게 되어 있다. 그러면 북한의 사정이 속속들이 알려지고 한국 사정도 속속들이 알려진다. 북한 당국자는 이것이 제일 두렵다.
[자신 없는 북한]
북한은 남북은커녕 북한 안에서도 통행이 극도로 통제된 사회이다. 사생활이 거의 없다.
이유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동독과 중국은 공산국가이지만 일찍이 개인우상화를 한 적이 없다. 모택동은 악몽의 문화혁명 중에도 자신의 과거를 숨긴 적이 없다. 자기 아버지에게 젊은 시절에 대든 것도 가감 없이 전했다. 아예 그는 자기 가문에는 관심 자체가 없었다. 자기 자식도 외국에서의 전쟁에 내보내 죽게 한 비정한 아버지다.
[자신에 찬 개방개혁 이후의 중국]
등소평 이후 개혁개방의 길로 나서면서 중국은 비록 사는 것이 대만에 형편없이 뒤졌지만, 인민의 지지로 장개석을 물리쳤다는 자부심에, 우월한 도덕심에서, 1988년 이후엔 1인당 소득은 상대가 안 되지만 나라 전체로 볼 때 섬은 오히려 본토에 전혀 상대가 안 된다는 사실에 자신감이 넘쳤다. 얼마든지 고향을 방문해서 사람도 만나고 투자도 하고 용돈도 주라는 것이었다. 교류하면 손해는 없고 이익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동독의 긍지와 인민 사랑 그리고 실리주의]
동독은 주민의 탈출을 막기 위해서 1961년 베를린 장벽을 쌓았지만, 나름대로 공산체제에 자신과 긍지가 있었다. 어정쩡했던 서독과 달리 동독은 나치 잔당을 확실하게 처단했던 것이다. 1964년 처음에는 아무 영향력이 없는 노인들의 방문을 허용했지만, 서로 왕래해도 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자기 체제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굶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일인 장기 집권(기껏해야 교류가 본격화된 이후 호네커의 18년 집권)도 없었고, 부자세습도 없었고, 군비 확장에 혈안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군이 아니라 전인민의 비상경계 태세를 56년 동안 한 번도 푼 적이 없는 극도로 통제된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보여 주어도 크게 꿀릴 것 없었기 때문에, 자기 체제가 무너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면적으로 교류를 확대한 것이다.
오히려 동독은 여러모로 이익이 된다고 생각해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편지 왕래에서도 한꺼번에 돈으로 챙겼다. 물론 터무니없이 청구하지는 않았다. 연 3,000만 마르크를 받았다. 편지 한 통에 0.3마르크, 우리 돈으로 150원 꼴이었다. 딱 우표 한 장 값이었다. 1977년 이후에는 8,500만 마르크를 받았다. 일인당 환영금 100마르크를 백만 명이 받아 가면 이것은 1억 마르크였는데, 100만 명 방문에 이것은 서독으로서는 아주 싼 값이었다. 그들은 이처럼 매우 합리적이었다. 안내원 외에는 주민 한 명 만나지 못하게 하고 그저 산 한 번 둘러보게 하고는 1년에 인원에 관계없이 무조건 1억4천만 달러(약 3억 마르크)를 챙기고 챙겨 주는 통 큰(엽기적인) 남북한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아마 북한 주민이 일 년에 백만 명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 북한은 1인당 만 달러로 계산해서 해마다 100억 달러를 달라고 할 것이다. 남북 가족 상봉에 한 명 당 이리저리 계산하면 만 달러를 훨씬 상회할 것이니까.
[희망과 망상]
희망은 좋다. 그러나 희망은 냉철한 현실분석 후에, 상대가 있을 때는 상대를 주도면밀하게 파악한 후에, 목표를 제대로 정한 후에, 한 치도 소홀함이 없이 침착하게 성심 성의껏 노력할 때에야 겨우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짓는 법이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화려한 망상을 현실에 발을 굳게 디딘 거룩한 희망으로 착각하는 게 아닌지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남을 탓하기 전에. 하늘에서 월척의 물고기들이 비 오듯 쏟아지길 기다리지 말고.
[건달과 미인]
다정은 병이 아니지만, 짝사랑이 소토킹으로 이어지면 그건 확실히 병이다. 건달도 그런 얼빠진 미인은 상대해 주지 않는다. 그 몸과 돈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건달은 어린애처럼 천진하게 웃다가도 느닷없이 약점이 잡힌 꽃 같은 미인에게 돌 주먹을 날린다. 사랑에 눈이 먼 미인은 박력과 폭력을 구별 못한다. 눈이 밝아진 후엔 이미 늦다. 옛날부터 건달이 흔히 달걀 든 미인 마누라를 데리고 사는 게 우연이 아니다. 억울하게 납치된 경우도 있지만, 제 발로 찾아간 경우도 그 못지않다.
(2001. 11. 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