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협과 유혹 사이

봄도 겨울 같고 가을도 겨울 같다.  

 사람을 움직이는 방법은 크게 둘로 나뉜다. 첫째는 강제와 위협이고 둘째는 설득과 유혹이다. 강제와 위협은 손해의 채찍, 설득과 유혹은 이익의 당근을 각각 제시한다. 강자가 약자의 의지와 욕망을 무시하고 자신의 의지와 야망에 따라 약자를 움직이는 방법이 강제와 위협이고, 강자든 약자든 서로의 의지와 욕망을 존중하여 강자가 약자에게 또는 강자가 강자에게, 약자가 강자에게 또는 약자가 약자에게 현재 상대방이 가진 것보다 더 나은 것을 논리와 이성으로 제시하는 방법이 설득이라면 직관과 감정에 호소하여 새로운 것에 군침을 흘리게 만드는 방법이 유혹이다. 상대방이 약자이면서 동시에 사랑의 대상자일 경우 그의 판단력이 미숙할 때는 강제와 위협이 대체로 더 효과적이다. 부모와 스승의 역할이 어려운 것은 강제와 설득의 비율을 자녀와 학생의 성장 속도에 알맞게 조절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성을 담당하는 대뇌피질과 좌우의 뇌를 이어주는 신경다발이 별로 발달하지 않는 여섯 살 이전의 어린이에겐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안 돼!’ 한 마디면 끝난다. 인격을 존중한답시고 차근차근 구질구질 설명하면, 아이는 하품하며 괴로워하다가 루소 아버지와 페스탈로치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는 순간, 바로 금단의 열매를 움켜쥐려 한다. 


 어린이가 여섯 살만 되면 이성이 급속도로 발달하기 시작하여 나이든 사람이 윽박질러도 심지어 때려도 고집을 꺾지 않는 경우가 빈번해진다. 이를 감안하지 않고 강제와 위협으로 일관하면 여러 가지 심리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것은 타고난 성격을 말하는 것이고, 실제로는 대략 열 살까지 인적 관계와 물적 환경에서 형성된 습관과 성격이 거의 평생 간다. 불가항력적인 외생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특이하게 보내지 않는 한, 그 후로 인생관은 거의 유지된다.


 사회 환경과 국가 권력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구촌 시대에도 과거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미국인과 이라크인, 한국인과 북한주민은 각각 판이한 세계에서 산다. 전자는 ‘문명의 충돌’로 두 차례나 총부리를 겨누었고, 후자는 불과 60년 전만 해도 통일신라 이래 1400년간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졌지만 지금은 ‘이념의 전쟁’으로 경찰과 깡패처럼 달라졌다. 인종과 언어, 역사와 지리가 판이하지만, 한국인과 미국인이 비슷하고 이라크인과 북한 주민이 비슷하다. 미국에선 강제와 위협이 폴리스 라인을 벗어난 지대와 뒷골목 세상에나 존재한다. 한국도 자유민주의 설득과 자본주의의 유혹이 공기처럼 익숙하다. 북한은 설득과 유혹이란 개념 자체가 없다. 북한 공산당에겐 한국의 설득이 감언이설의 선전으로 들리고 한국의 유혹은 구밀복검(口蜜腹劍)의 선동으로 보인다. 세 살에서 여든 살까지 적대계층에서 핵심계층까지 오로지 강제와 위협으로 유지되는 북한은 인구의 3분의 1이 감독관이요 감시자다. 감시감독에서 자유로운 자는 2천만 명 중 오직 한 명뿐이다.


 몸은 젖과 꿀이 흐르는 한국에 두고서 마음은 독극물과 오물이 흘러넘치는 김정일의 북한과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에 저당 잡힌 자들이 방송과 인터넷을 총동원하여 따발총 소리보다 요란하게 목소리를 높인 나라가 있다. 그들은 김정일과 사담의 조직적 인권유린은 내재적 관점에서 실은 독재자의 관점에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눈이 없는 총칼 앞에 안타깝게도 쓰러질 수밖에 없는 수백 수천 무고한 희생자는 집중조명하면서 부모자식이 날강도에게 학살된 양 길길이 뛰었다. 그들에게 노근리와 관타나모의 여남은 억울함과 안타까움은 천인공노할 짓이지만, 강제 수용소로 유지되던 북방의 두 외세를 끌어들여 자행한 김일성의 수백만 동족 학살은 미완의 통일전쟁으로 이해되고 김정일과 사담의 수백만 기아 살인은 제국주의에 맞선 자주독립 국가의 통치 과정으로 양해되었다. 


 자유민주의 설득과 시장경제의 유혹이 아니라 민주의 가면 뒤에서 독재의 강제를 사모하고 복지의 깃발 아래서 공산주의의 위협을 앙망하는 자들이 권력의 칼을 잡고 글의 펜과 말의 마이크를 독과점하면서, 설득과 유혹의 반세기 든든 지킴이 법망(法網)을 갈가리 찢고 자유와 풍요의 반세기 믿음직 길라잡이 정부조직을 초현대식 고층빌딩의 유리창을 돌멩이로 박살내듯이 무차별로 아작내기 시작했다. 정부의 최상층과 여당과 여당 2중대와 시민단체와 노조와 방송은 치외법권을 맘껏 누리며 대한민국의 근간을 친일과 독재로 몰아세우고 광란의 춤을 추었다. 대한민국의 가치관은 뒤죽박죽되어 버렸다.


 뒤죽박죽된 대한민국의 가치관을 바로잡으려는 생각도 없고 감히 그것을 입 밖에도 못 내고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며, 생떼와 억지와 폭력의 깽판세력을 현실의 영순위 파트너로 인정하는 것이 중도실용이다. 새 권좌를 선물한 대한민국 가치관 되찾기 운동은 도리어 찬밥 신세다. 대한민국의 정통우익보다는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야당과 썩 잘 어울리는 낙선자 친위대에게 노른자위도 주고 흰자위도 챙겨 준다. 일등공신들에게는 칼슘이 듬뿍 들었다며 껍질만 던져 준다. 이런 새 집권자들에게 선군독재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이 눈에 들어올 턱이 없다.

―오해라고? 

―중상모략이라고? 

―그럼 대답해 보시라.

 대북 진실방송을 되살리기는커녕 진실풍선 하나 못 날리게 가로막는다. 아무런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UN의 물 타기 인권결의안에 당당히 참석하는 것으로 할 일 다한 듯 크게 생색낸다. 동방정책 약 10년 전에 이미 연간 백만 명이 무려 한 달 동안 자유와 풍요의 땅에서 머물었고 베를린 장벽에 금이 갈 무렵에는 동서 양쪽으로 천만 명이 오간 것은 아는지 모르는지 ‘준비 없는’ 게르만 통일을 감히 비판하고, 저들이 대한민국의 헌법보다 신성시하는 6․15 선언 10년이 다 되도록 편지 한 통 전화 한 통 오가지 못하고 이쪽에서 터무니없는 과다 비용을 100% 부담하는 연례 상봉쇼에 감지덕지하고 메아리 없는 비핵을 외치며 핵무기의 개발과 대량생산에 필요한 시간만 계속 벌어 주면서 ‘준비하는’ 한민족 통일을 만천하에 홍보한다. 비판과 비방을 구별하지 못하여, 촛불 하나 없는 저준위 비판에는 소신 같은 독선으로 맞서고 달걀과 벽돌과 화염병이 필수품으로 등장하는 최상급 비방에는 타협 같은 굴종으로 백 일도 좋고 천 일도 좋고 말없이 인내한다.    


 봄도 겨울 같고 가을도 겨울 같다. 중도의 강제와 실용의 위협이 서서히 진용을 갖춘다. 자유민주의 설득과 시장경제의 유혹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하나둘 사라진다.

       (2009.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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