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가 필요한 곳은 많다. 노동과 휴식, 섭취와 배설, 웃음과 울음, 말과 침묵, 남자와 여자 등은 어느 한쪽을 취하고 다른 하나를 버릴 수 없다. 그들은 각기 분모를 공통으로 갖는 어느 반쪽이다. 하나가 양(陽)이라면 다른 하나는 음(陰)이고 그 둘이 합하여 태극(太極)을 이룬다. 그것이 중도요, 통합이요, 조화다. 노동과 휴식은 삶을 공통분모로 갖고, 섭취와 배설은 신진대사를 공통분모로 갖는다. 웃음과 울음은 감정, 말과 침묵은 의사소통, 남자와 여자는 인간을 공통분모로 갖는다. 따라서 둘 다 반드시 필요하며 둘 사이에 시계추처럼 일정한 진폭 사이에서 동적(動的)인 균형을 취해야 한다. 중간의 어느 지점에서 가만히 방관하는 정적(靜的)인 균형은 중도가 아니라 기회주의다.
 
 하루 24시간 중 8시간 노동하고 수면 포함 16시간 휴식하는 게 중도이지, 노동도 아니고 휴식도 아니고 마냥 빈둥거리거나 일에 대한 걱정으로 내내 낑낑거리는 것이 중도가 아니다. 섭취와 배설도 마찬가지다. 아무 것도 안 먹고 전혀 싸지 않는 것은 도사(道士)나 양반, 부처나 구루, 양귀비나 클레오파트라가 할 일이 아니라, 시체가 할 일이다. 부단한 신진대사로 일정한 몸을 유지하는 것이 생명체의 근본이므로, 적당히 먹고 적당히 움직이고 시원하게 싸야 한다. 그것이 중도다. 동적인 중도다. 남녀도 마찬가지다. 인간을 공통분모로 하되, 남자나 여자 어느 한쪽이 되어 서로 조화롭게 사는 게 중도이지, 한 몸에 남녀의 상징을 다 갖춘 남녀추니가 되어, 플라톤의 터무니없는 상상처럼 남녀 한 몸을 이뤄 신에 대항하던 신화시대의 완벽한 인간인 양 고고하게 사는 게 중도가 아니다.
 
 중도가 아예 설 자리가 없는 곳도 많다. 물과 불, 선과 악, 삶과 죽음, 진실과 거짓, 법치와 깽판, 정의와 불의, 평화와 전쟁은 따로따로 있어야 한다. 그들 사이에 타협이 있다거나 조화를 이룰 수 있다거나 중도가 바람직하다고 하는 것은 궤변이요, 억지요, 위선이다.
 
 1860년 2월 27일, 시골의 한 변호사가 뉴욕의 한 강당에서 발목이 다 드러나는 껑충한 옷을 입고 꾸부정하게 서서 길고 긴 연설을 마치자, 잠시 동안 죽음 같은 정적이 흘렀다. 오로지 들리는 것은 씩씩거리는 가스난로 소리밖에 없었다. 이윽고 1500여명은 모자를 던지고 발을 구르고 눈물콧물을 쏟으며 강당의 지붕이 날아갈 정도로 환호했다. 그 다음 날 뉴욕의 4대 일간지는 일제히 7,715단어의 그 연설을 한 자도 빠짐없이 보도했다. 훗날 그의 연설 중 가장 유명한 추모사가 278단어임에 비추어 그 연설이 얼마나 긴 것이었나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연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키다리 시골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요상한 궤변에 우리, 속지 맙시다. 옳음과 그름 사이에 중도를 찾을 수 있다는 궤변, 죽지도 살지도 않은 사람을 찾을 수 있다는 허접스런 궤변, 모든 진실한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사에 대해 오불관언(吾不關焉)하는 정책이 있다는 궤변, 진정한 연방 지지자들이 연방 해체주의자들에게 굴복할 것을 미합중국이 애원한다는 궤변, 하나님의 계율을 뒤집어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회개해야 한다는 궤변 따위에 우리, 속지 맙시다.
 
 Let us be diverted by none of those sophistical contrivances wherewith we are so industriously plied and belabored - contrivances such as groping for some middle ground between the right and the wrong, vain as the search for a man who should be neither a living man nor a dead man - such as a policy of "don't care" on a question about which all true men do care - such as Union appeals beseeching true Union men to yield to Disunionists, reversing the divine rule, and calling, not the sinners, but the righteous to repentance ...
 
 
 제우스 링컨의 천둥과 벼락에서 분명히 드러났듯이, 진실과 거짓, 정의와 불의, 법치와 깽판 사이에 중도는 있을 수 없다. 여기서 중도를 주장하는 자는 실재로는 거짓과 불의의 편이면서 진실과 정의의 편인 양 위장하여, 진실을 호도하고 정의를 조롱하고 법치를 유린함으로, 거짓이 진실을 이기고, 불의가 정의를 능멸하고, 깽판이 법치를 다스리게 하려는 자들이다.
 
 각 시대는 각 시대의 사명이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큰 문제는, 아니 세계에서 가장 큰 문제는, 북한인권이요 북한의 전쟁 위협이다. 그것은 인터넷을 5분만 검색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현존하는 한국의 으뜸 적이요 인류의 주적이다. 인권유린이 숱하게 많았지만, 많지만, 많겠지만, 북한처럼 조직적이고 악랄하고 장기적인 인권유린은 없었고 없고 없을 것이다. 히틀러도 스탈린도 모택동도 크메르루지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미국의 목화밭 노동착취도 어림없이 이에는 못 미친다. 6.25와 핵실험과 서해교전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50년 이래 오늘날까지 대를 이은 북한의 침략과 도발은 단 한 해도 누그러뜨린 적이 없다.
 
 그럼에도 한국인은 극도로 말을 아끼며 천하태평하게 정체불명 중도를 취한다. 민족화해를 합창한다. 인권선진국인 미국도 유럽도 일본도 이따금 빈 수레만 울린다. 북한의 인권유린을 보란 듯이 방조하는 달러 금고 중국의 눈치를 살핀다. 북한의 독재자에겐 개혁개방 시늉만 내고 계속 인권유린하고 계속 대량 살상 무기를 개발하고 양산하라며 돈도 주고 쌀도 주고 비료도 준다. 딱 자르는 일은 절대 없다. 오히려 저쪽에서 달러 창구를 완전히 닫을까 봐 전전긍긍한다. 한국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반세기 평화를 지킨 주한미군의 뒤통수를 치고, 군 개혁을 외치고 정신력을 강조하며 국방비를 확 줄이고, 실질적으로 15만 명에게 군 면제 혜택을 주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나도록 군 복무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한다. 전임자의 대못도 안보에 관한 한 손도 안 댄다. 9급 공무원이 할 일에서, 국가 원로가 할 말까지 시시콜콜 간섭하며 연일 말의 홍수를 쏟아내고 개탄의 분노를 무시로 터뜨리는 역대 대통령들이 북한인권에 관한 문제만 나오면 침묵 또 침묵이다. 안보 문제만 나오면,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이나 6.25동란 직전처럼 평화 무드에 젖어 얼렁뚱땅 술렁술렁 넘어간다.
 
 오로지 전 국토의 토목공사화요, 오로지 권력다툼이다. 오로지 자화자찬이다. OECD에 가입했다며, 선진국이 됐다며 희희낙락하다가 하루아침에 쪽박 차던 희비극도 경고가 되지 못하는 모양이다. (2010. 1. 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