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하늘을 지킨 '도깨비'(팬텀)를 보내면서

퇴역하는 팬텀, 그 40년의 회고 목차
1 팬텀공군이 되기 까지
2 안보환경의 먹구름
3 한 미간 갈등을 빚은 양대 사건
4 팬텀기를 인수해 온 사람들
5 팬텀기 40년의 애환
6 그들이 남긴 교훈
7. 확실한 억제력을
8 獻 詩 -팬텀을 탄다.-


필자 경력 공사 9기 임관 1961
팬텀기 인수요원으로 渡美 1968
제 151전투비행대대 창설요원 1969
제 153 전투비행대대 초대 대대장 1978
제 11 전투비행단장 1987
공군정보참모부장 1988
합참 전략기획부장 ,국방부 군비통제실장 1989-1992
남북고위급 예비회담 군사대표 1990- 1991
공군소장 예편 1992
미국 스탠포드 대학 국제군축연구소 객원연구원 1993-1994
한국 항공진흥협회 상근부회장 1996-1998
한국 보훈 복지 의료공단 이사장 2003-2005
재향군인회 정책자문위원, 성우회 운영위원 (현재)

학력 공군사관학교 졸
공군대학 지휘관 참모과정 수료
한국국방대학원 , 인도국방대학원 졸
연대 행정대학원 고위정책과정 수료
서울 행정대학원 국가 정책과정 수료

제목 팬텀공군 40년의 회고

1. 팬텀공군이 된 시대적 배경

한국 공군이 팬탐기를 보유하게 된지가 40년을 넘는다.
F-4E만을 남겨 두고 F-4D는 기체 수명의 한계로 퇴역을 하게 된다니 태평
양을 넘어 팬텀기를 인수해 온 한 사람으로서 그 애환이 남 다르다.

40년 회상에 앞서 한치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최근의 한 반도 안보 환경이
다.
남북 군사적 대치 상황에서 발생한 두차례 서해 연평 해전과 그 연장 선상에
서 보이는 북한의 도발행위다.
우리의 영해에서 당한 최근의 천안 함 격침사건을 두고 어떤 형태로 응징보복
을 해야 하며 그 이후 정책대안은 무엇인가?
그 해법은 역사의 인식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새삼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은 100년 전 나라를 잃은 뼈아픈 과거
사가 있음에도 위기관리를 소홀히 해 왔고 이는 역사인식의 부족에서 이다.

“뒤를 돌아서 멀리 볼 수 있다면 앞을 향해서도 그 만큼 멀리 볼 수 있다 “
이 말은 세계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20세기의 위대한 정치가요 오늘의 대
영제국을 있게 한 윈스톤 처칠 경이 남긴 명언이다.

한때 팬텀기는 한국공군의 주 전투기로서 그 동안 북으로 부터의 전쟁을 억제
해 왔다. 그 팬텀기가 퇴역을 한다.
우리는 그 전폭기가 지녔던 국가안보의 전략적 의미가 얼마나 컸으며 그 전폭
기를 어떻게 확보하게 되었나를 되 돌아 보고 그 당시 시대적 상황과 국가 지
도자들의 어려웠던 결단들을 재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국가안보를 지탱해 나길 해법을 찾을 수 있다.

1960년대 한국의 안보는 북의 다양한 대남 공격으로부터 위태로웠다.
월남전으로 격심했던 분단 국가의 이념 전쟁 과 그 전쟁의 중심축에 미국과
한국이 함께 있었다. 한미 동맹을 내세워 월남전을 함께 치뤘다. 휴전선 넘어 북한이 호시 탐탐 있음에도 미국의 월남 파병 요청을 거절 할 수가 없었다.
왜냐 하면 주한미군을 월남으로 옮기면 한반도가 그만큼 위태롭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적 안보환경과 그 당시 남북간의 시대 상황이 우리가 미국으로 부
터 그 세기적 전폭기를 가지게 했고 협상의 저변에는 국가 지도자의 역사인
식이 있었기 때문에다.

한국 공군이 팬텀기를 갖게 된 순간은 1969년 8월 29일,오후 3시다.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태극 마-크를 은빛 날개와 동체에 새긴 8대의 팬텀기가 태평양을 횡단해 대구 기지에 안착했다.
아시아 국가에서는 최초의 역사적 사건이고 감격의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40년이 더 지난 오늘에 있어 이 나라 대한민국의 영공을 굳건히 지켜 온 F-4D 팬텀 전투기가 드디어 퇴역 식을 갖고 그 창설 부대 또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하니 그 간의 애환과 감회가 사뭇 크다.

그러나 40년간의 조국의 하늘에서 남긴 정신과 영혼은 영원히 기념비적 모습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는 함께 그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 조명하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2. 그 당시 시대 상황은 이러 했다.

한국 공군이 F-4D 1968년 9월 팬텀기를 보지하게 된 배경은 오늘날 합동참모 본부의 장기 전략 기획서나 공군의 연차적 차세대 전투기 확보계획에 의거 해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기본계획에 의가 했다면 최소 5년 내지 10년은 기다려야 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세계 열강이 주목하는 F-4C/D 전폭기를 가진 나라는 미국,영국 ,이스라엘 뿐이었다. 일본 자위대도 갖지 못했었다. 그런 전폭기를 갖게 되는 급변적 상황이 한반도에 도래한 것이다.

월남전의 구정 공세가 격심했던 그 당시 한국 공군력의 주력기는 F-5A와 F-86F 세이버 전투기 뿐이었다. 그래도 공군은 실전의 좋은 기회라고 판단 1개 대대 파병이 준비되고 있었지만 결국 대북 남아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신문 사설들의 우국의 여론 때문에 끝내 월남 파병을 하지 못했다.

낡은 C-54 수송기로 월남파병의 공수지원을 담당 했을 뿐 한국 공군의 주
전투력은 3000만의 불침번이라 이름하면서 주한 미 공군의 팬텀기와 함께
대북 억제력으로 남았다.

소위 군부와 유신체제에 저항했던 일부 민주화 세력들이 월남파병을 용병이라 무책임한 정치 발언들을 했지만 월남전에 한국이 한미동맹의 일원으로 파병을 하지 않으면 주한 미군을 뽑아 내겠다는 미국의 강경한 파병요청을 받아 드리기 까지 박정희 대통령의 고뇌는 깊었다.

공군 본부는 무기획득 목적상 공군 증강 5개년 계획에 F-4D도입 계획을 갖고는 있었지만 합참이나 국방부 입장에서 볼 때 공군에 현존 전력인 F-5A를 추가 도입해서 지상군 지원을 위한 근접지원 작전용 전투기에 관심이 있었을 뿐 전쟁 지도부와 종심 깊은 전략 요충지를 강타 할 수 있는 F-4 팬탐기 도입은 그 당시 상상도 못 할 때였다.
설혹 F-4D를 구매하려 했어도 미국은 정책적으로 팔지 않는 그런 최신 전략 폭격기였다.

그 당시 월남전에서 제공권을 장악했던 미국의 해 공군의 주력 기였던 팬탐기를 단 기간 내에 대한민국이 특별한 미국 군원으로 1개 대대 분을 받아 내게 된 배경에는 한 반도의 전쟁 발발 위기상황으로 몰고 간 2가지 사태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당시 긴박했던 상황들을 되 돌아 보면 하나는 -1968년1월 21일 북한의 특수부대 청와대 기습사건-과 또 하나는 -1월 23일 원산에 끌려 간 프에블로 미 정보함 피납사건-이다. 이 두 사건이 동시에 맞 물려서 한미간의 갈등과 이해로 인해서 한 반도를 전쟁 위기 상황으로 몰아 갔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청와대 기습사건을 두고 북한과 전면전을 각오해서라도 바로 응징 보복을 해야 했고 미국의 입장에서는 한국측의 단독 응징보복이 전쟁으로 비화할 경우 동시에 2개의 전쟁을 감당키가 어렵다고 판단해서 기필코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막아야 했다.

또한 피납된 프에블로 승조원 78명도 구출 해야만 했다. 이 협상을 위해 미국이 무력 행사도 불사한다는 배수진으로 항공모함 두 척을 원산만으로 배치했다. 한국을 배제한 채 북한과 직거래를 한 것이다.

3. 한미 갈등을 빚은 양대 사건

1968년 1월 21일 고도로 훈련된 북한의 무장 공비 31명이 미군 사단지역의 군사분계선을 뚫고 대남 침투 해 와 청와대 뒷산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오후 청와대를 습격하려 종로구 청운동 까지 들어 왔으나 경찰 심문에 걸려들자 기관총을 난사했고 그 자리에서 종로 경찰 서장과 경찰관 민간인이 숨졌다.
육.공 경찰 합동 작전으로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무장 공비 31명 중 28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했다. “박정희 목 떼로 왔시다” 생포한 김신조의 거침없었던 진술로 밝혀 진 것이 이른 바 -1.21 청와대 기습사건-이다.

특명에 따라 공군은 전쟁을 각오하고 응징 보복작전을 준비했고 의주에 있는 폭격 사단을 1차 기습 폭격을 계획 했으며 행동반경이 짧은 F-5A전투기에 그나마 보조 연료 탱크를 자리에 까지 폭탄을 만재하고 24시간 대기했다.
이 보복 응징작전이 전면전의 도화선이 되면 선제 공격으로 전 공군의 전투기는 기 계획 된 비행장을 일순 동시에 강타 제공권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당시 임무편대는 수원기지에 있는 정예부대 102대대 에 임무가 떨어 졌다.
국가 통수권자의 결정만을 남겨 두고 당시 공군은 장지량 참모총장의 전쟁 준비지침으로 비상상황에 돌입했다.
F-5A전투기로는 전투행동반경이 너무 짧아 출격편대는 전방 기지로 전진 배치가 되어야 했다.
이러한 응징보복계획의 준비는 그 후 1983년의 아웅산 사태 때에도 극비에 있었고 이때는 팬텀기로 준비했지만 결국 실행되지 못했다.

상환전개는 설상가상으로 이틀 뒤인 1월 23일 오후 3시경 원산 동쪽 동해상에서 미국의 정보 수집함 푸에불로 호가 북한에 나포되어 원산 만으로 끌려 승조원 83명이 억류됐다. 북한의 영해를 침범했다는 것이다.

미국으로 볼 때 심각한 문제는 억류된 부크 함장을 포함해 83명의 미군을 프에블로와 함께 안전하게 귀환 시켜야 하는 문제이다.
프에블로 사건 이틀 전인 1.21.북한 특수 부대의 청와대 기습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동맹국으로서 응징보복에 지원은 커녕 이에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프에블로 사건에만 몰두했다.
한국정부를 배제한 채 미국은 북한을 상대로 직접 협상했고 전술한 바 같이
새로운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북한을 위협했다.

이로 인하여 한미간 갈등이 심화됐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모종의 비밀 정책
을 수립하게 된 것이다.일전을 각오한 단독 응징 보복이 그것이다.

청와대 기습 사건에 대한 응징 보복으로서 1차 적으로 공군이 응징 보복을 하고 전쟁으로 확대 된다면 전면전이 불가피하며 이 때는 공군의 선제 공격을 감행 한다는 전략구상이다.
북한 의 전쟁 지도부와 전략 요충지, 핵심 공군기지 등 전역을 일시에 강타하여 전승의 주도력을 갖는 다는 것이다. 극비의 기본 계획이 주한 군사고문단과 대사관을 통하여 백아 관에 보고됐음은 불문가지다.

한 반도 전쟁을 막기 위하여 존슨 대통령의 특사로 사이러스 밴스가 왔으며 두 차례 (2.12-13)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훗날 카터 정부의 국무장관이 되었으며 그의 회고록에서 당시 존슨 대통령의 주문은 -박(pak)이 북침하는 것을 막아라- 라는 것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때 양국간의 입장차이와 긴박했던 안보 상황을 감지 할 수 가 있는 대목이다.

이 대목에서 보면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대북 보복 의지를 막기 위해서는 특사가 가지고 온 보따리를 다 풀어야 했다. 반스 특사가 빤스가 되어 돌아 갔다는 일화가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결연한 의지를 엿보게 한다.

한 반도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베트남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 반도에서의 제2전선은 미국으로서는 정치적 전략적 무리가 크게 있음을 존 슨 행정부가 판단 한 것이다.

월남전에 한국군의 증파를 더 요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박대통령의 독자적
북침과 주한 미군의 무용론(철수론)까지 서슴지 않는 상황이 전개되자 회유
책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국군 전력 증강을 위한 특별군사 원조 1억불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분누를 삼키며 일단 응징 보복계획을 유보해야만 했고 결국
특별 군사원조 1억불을 받았다. 대신 무기 구입 우선 순위 결정을 우리가 할
것을 제안했다.
장차를 대비한 응징 보복력과 전쟁억제력의 핵심 전력인 팬텀기를 요구한
것이다.

미국은 팬탐 기는 한국공군이 운영 할 수 없는 비행기라는 이유로 반대 했
어나 결국 미국이 한국의 요구를 받아 드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국가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이 보여 준 국가이익과 국가안보를 위한 강력한
의지를 표출과 결단의 진 면목이라 할 것이다.

양국 간의 합의사항에 따라 이해 8월 한미 국방장관 회의를 최초로 와신턴
에서 갖었다. 여기서 팬탐기 도입과 나머지 각군에 배당된 사용에 대한 구체
적인 양해각서가 작성되었다.

4. 팬텀기를 인수해 온 사람들

박 정희 대통령의 결단으로 한국 공군이 팬탐기를 갖기에 이르게 되자 공군에서는 누가 그 팬텀기를 인수해 올 것인가 가 초미의 관심이 됐다.
선발에 선발을 거쳐 전방석 조종사 8명 후방석 조종사 8명 도합 16명이 선발되었다.
그 해 10월 한국 공군의 최고 조종사 16명중 후방 석 요원 8명이 먼저 미국으로 떠났다.
16명의 조종사 선발의 기준은 이러했다.
공군본부의 기본 지침은 전방 석 요원 8명과 후방 석 요원 8명을 선발하데 계급 별로 안배 할 것. 전방 석 조종사는 소령 급 이상 후방 석 조종사는 대위이상, 애국심 강하고 비행능력이 탁월하며 선발에 앞서 영어 능력평가를 거처 기본 자격 대상을 1차 걸러냈고 계급별로 각 비행단 지휘관이 추천한 조종사를 대상으로 공군본부 선발 위원회에서 최종 선발했다.
선발된 조종사들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전방석 조종사 8명 대령 진치범 (공사2기), 중령 김인기 (공사3기), 중령 강신구(조간6기), 중령 김재수 (공사5기), 중령 이재우(공사5기), 중령 이원순 (공사5기), 중령 한증근(공사5기), 소령 박근태(공사6기).

후방석 조종사 8명 소령 전춘우 (공사6기), 소령 이성복(조간8기), 소령 강상원 (공사7기), 소령 서진태(공사8기), 소령 안창명(공사8기), 대위 박재현 (조간 15기), 대위 임병배 (공사9기), 대위 박종권 (공사9기).
이상 16명이다.

인수 요원 16명중 10월에 먼저 떠난 후방석 요원 8명은 3개월간의 항공 전문 용어교육을 택사스주 안토니오에 있는 Lackland 공군기지에서 받았다 그 후 팬텀기가 있는 목적지인 Arizona주 Tucsan에 위치한 David-Monthan 공군 기지로 갔다.

그곳에서 6개월 간의 눈물 겹고 혹독하고도 철저한 비행훈련을 받았다.
전방 석 요원 8명도 후방 석 요원 8명에 합류가 되었고 짝을 지워 비행하면
서 생과 사를 같이 했다. 100여명의 정비지원 요원들도 뒤 따라 왔다.
1969년은 월남전이 한창이던 때, 우리를 지도했던 비행 교관들은 월남전에 참전 했던 최고의 베테랑 급 조종사들이 우리를 가르켰다.

미국서 팬텀기 훈련을 마치고 후방석 요원 8명은 모든 교육자료와 전쟁교리와 보조자료들을 가지고 먼저 귀국해 부대 창설를 준비했다.
전방석 요원 8명은 미공군 의 공중급유를 수 차례 받으면서 태평양을 횡단해 왔다.
그 감개와 교육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 오던 그 환희와 감동, 팬텀 공군의 주역이요 산실을 맡았던 그 긍지와 열정이 오늘날 우리들 모두에게 긍지와 명예를 ,한국 공군에게는 억제력을 갖게 했고 우주로 향한 공군이 되게 했다.

그 날 팬텀기 도입 환영식에는 국방장관과 주한 유엔군 사령관 겸 한미연합 사령관이 직접 대구에 내려와 한국공군의 비약적 도약을 경축했다.

드디어 도입한 팬탐기를 운영할 최초의 비행부대가 대구기지에서 창설했다.
1969년 9월 23일 의 일이다.
제 151전투비행대대라 명명했고 대대 창설의 이 뜻 깊은 행사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임석하여 감격스러운 격려사를 남겼다.
이렇게 해서 한국 공군이 세기적인 전투기요 폭격기 팬탐기를 아시아 국가
로서는 최초로 팬탐기를 갖게 되었다.
참으로 감격과 감동의 순간이었다.

그 해 10월1일 국군의 날에 한강에서 대통령을 모시고 100만이 넘는 국민
의 뜨거운 박수 갈채와 환호를 받으며 팬탐 공군의 위용을 만방에 과시했다.
국립 현충원 옆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곳 한강이 내려 다 보이는
명수대가 대통령과 3부 요인을 모신 본부석이고 사열대였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났다.
건국 60년을 지나 군도 60년을 맞았다. 오늘의 공군은 불모지대에서 이룩한
위대한 과학의 상아탑이라 할 수준으로 발돋움했다.
그 동안 팬텀기를 주축으로 그 누구도 범 할 수 없는 날쌔고 막힘이 없는
억센 날개로 대한민국의 영공을 지켜 왔다.

그 속도는 마하 2.4로 그 이상의 전투기도 없다. 북으로 북 만주와 동으로
독도를 지키고 서로는 서해와 중국을 넘어다 보는 눈과 발을 가진 전투기다.

가장 높이 날아 가장 멀리 볼 수이었던 20세기의 명품 전폭기였다.
그 억센 날개를 이제 서서히 접다니, 팬텀이여 그 이름 영원하여라.

5. 팬탐기 40년의 애환

40년을 되 돌아 볼 때 참으로 대단한 전폭기를 대한민국 공군이 가지게 된
것이고 이 전폭기를 인수하려 태평양을 건너가는 그들의 각오와 결의는 글
로서 표현이 쉽지가 않다.

부여된 임무를 위하여 불기둥을 내 뿜으며 활주로를 떠나는 팬탐기의 위용
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스스로 팬텀기 조종사인가? 하는 자문을 하리만치
장엄하다.
특히 야간 비행시는 이륙하는 팬텀기를 보노라면 엔진에서 분출해 내는 두
줄기의 불 기둥은 우주를 향한 로켓드의 발사장면보다 더 장엄하다.
그들의 애국심과 호국정신은 그 불기둥 보다 더 뜨겁고 붉었다.
누가 그들의 우국충정을 진실되게 알겠는가 ?!

그 40년간 조국 영공의 불침번 역을 자랑스럽게 영광스럽게 한 점 부끄러움 없이 팬탐기를 조종했던 빨간 마후라의 사나이들, 그들의 출격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았고 어떤 어려운 임무들도 제일 먼저 감내하고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최초 18대의 팬탐은 150여대로 증강했다.
가난했던 우리국민은 팬탐기를 더 갖기 위해서 초등학교 어린이 까지 방위성금을 모았다. 그 방위성금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던 중고품을 사 드렸다.
그 후 율곡 계획에 힘 입어 최신형 팬탐기 F-4E 3개 대대를 추가 도입했다.
.
나는 팬텀기 인수 요원 16명의 한 사람으로 후방석 조종사에서 전방석 조종사로, 편대장 ,시험비행 조종사, 비행대대장을 거쳐 비행단장에 이르기 까지
수 많은 애환을 같이 했다.
40년의 긴 세월 동안 수백 명의 팬텀기 조종사가 양성되었다.
그들은 KF-16D와 F-15E 최신예 전투기를 조종하는 현대화 공군의 초석이되고 주력이 되었다.


그 동안에 많은 희생도 있었다. 새로운 과학의 문명 앞에서 예견치 못했던 사고로 여러 전우가 사라져 갔다.
팬텀기 조종사로 작전 중 순직한 아버지를 따라 그 아들이 조종사가 되고 그 또한 팬텀기로 순직한 사고 소식은 그들의 가족을 통곡 케 했고 우리 모두의 가슴을 찢었다.
우리는 모두의 사생관은 그러했다. 세월이 가면 전투기도, 빨간 마후라의 사나이들도 다 함께 사라지는 것이 세상사 정리가 아니든가?

낙이불음(樂而不淫)하고 애이불상(哀而不傷)이라 스스로 자중자애 하면서 살아 온 그들이다. 이미 이 길을 선택했을 때 각오했던 길 이었다.

우리가 눈물을 흘렸을 때는 애기와 함께 돌아 오지 못한 동료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눈물이기 보다 동료의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가련해서 내 일 같아서 함께 울었다.

1970년대 와 80년대 팬탐기 조종사들은 1주일에 3일은 비상대기실에서 밤을 새웠다. 북의 간첩선의 침투가 잦았고 간첩 작전의 지침에 따라 전략 폭격기인 팬탐 기는 간첩 잡는 주력기처럼 작전의 최 일선에 출동대기를 했다.
모 기지인 대구에서 강능, 군산, 수원 기지에 365일 1개 분대 (2대) 씩 최
전방 기지로 비상 출동조로 파견되었으니 지휘관 참모와 임무조종사, 정비사,
무장사 등 지원요원들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오죽했을까?
년 중 휴무 일도 없이 각 비행단은 교대로 취약시간 대에 초계비행을 했다.

청와대 기습 사건에 대한 응징보복을 하지 못하고 그 대가로 받았던 세기적
전폭기를 대 간첩 작전의 주력으로 전락해야 했던 국방부와 합참의 전력 운
용개념도 지적이 됐다.

공중급유기만 있었어도 팬텀기 전력을 몇 배로 배가 시킬 수 있는 것을 아직도 공중급유기 한대도 확보 못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다.

응징보복과 전쟁억제를 위해서 확보한 전투기들 F-4E, F-16D,F-15E 등
현존 최신 전력을 몇 배로 발휘 할 수 있도록 공중급유기의 도입으로 장거
리 타격능력을 신장시켜야 할 것이다.

한 때 바위 성금으로 팬텀기를 사 들였다. 조종사들은 내 목숨처럼 아끼며 팬텀기를 몰았다. 동체에 -방위성금 헌납기-라 새겼다.

방위성금에 감사하고 애국심으로 보답하기 위해 5개 도시에 바위성금 헌납기 편대로 감사편대 비행을 한 적이 있는 데 제주시에서 공군본부에 항의가 왔다.
제주도도 방위 성금을 냈거늘 왜 감사와 축하비행이 없냐는 것이다.

공군본부의 지시에 따라 필자가 직접 편대장이 되어 당시 새로 만든 제주도 5,16도로를 일주한 후 제주시 상공을 초 저공으로 엄청난 비행 굉음을 내며 감사비행을 했다. 이렇듯 국민적 애환이 얼 킨 전폭기다.

새벽의 초계비행, 심야의 야간 비행, 400만의 불침번이라 했던 전천후 전폭기, 해 마다 승진 사격장에서 한국 공군력의 위력을 만 유감없이 과시하여 국민의 신뢰를 받았던 팬탐기에 정열을 다 바친 전우들이 또 있다.
기름때와 더위와 추위, 비바람에 시달린 얼굴들 정비사들과 무장사들, 많은
지원요원들이 오늘도 활주로를 떠난 애기를 기다린다.

그들의 사명감과 애국심을 우리 모두가 잊어서는 안 된다.

팬탐기 도임의 계기로, 40년 동안 그들이 바친 피와 눈물과 땀으로 대한민국 공군은 성장했다. 오늘날 KF-16D, F-15E로 선진국 수준의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음을 인식하고 팬탐기가 남긴 교훈으로 현존 전력을 극대화 시켜야 한다.

6. 팬텀기가 남기는 교훈 .

역사의식을 가지고 우리가 스스로가 함께 남긴 -팬탐의 40년 발자취-을 되
돌아 보고 소명의식을 새롭게 할 때 PHANTOM의 지난 이야기에 진정한 의
미가 있다.
역사는 반복한다는 사실을 재인식하고 다가 올 미래를 예측하며 국가안보의
최적의 비전(Vision) 을 가지고 결단 할 수 있다면 오늘 한국 팬탐 공군 40
년의 회고는 국가안보를 위한 의 결단과 교훈으로서 가치가 있다 할 것이다.

151전투비행대대 창설준비는 후방석 요원 8명이 먼저 귀국하여 했다.
그들이야 말로 최초의 산실과 산파 역이다.
드디어 전방 석 요원 8명은 진치범 대령을 선두로 태평양 횡단비행으로 대
구 기지에 안착했다. 역사적 순간이었다. 3번의 공중급유를 받았다. 오키나와
가데나 미 공군기지에 착륙해서 성조기 대신 동체와 날개에 태극 휘장을 새
겼다.
그때가 1969년 8월 29일 오후 2시다. 임충식 국방장관을 임석 상관으로 하
여 한미 고위장성이 다수 참석한 가운데 팬탐기 환영행사가 대구 기지 군사
령부 격납고 앞 광장에서 이루어 졌다.

1969년 9월 23일 최초의 팬탐기 비행 부대로서 제 151 전투비행대대의 창
설식을 가졌다.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고 3부 요인과 유엔군 사령관 마이클리
스 대장과 한미 고위 장성이 참석한 가운데 공식행사를 갖인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부대기를 최대 부대장 진치범 대령이 받았다.

대구기지가 새로이 F-4D 모기지로 하고 장차 전략공군의 비전을 가지고 김
포에 있는 공군 제 11전투비행단이 내려 와 오늘의 모습이 된 것이다.

최초 팬탐기를 도입 한 이래 40년을 거치면서 F-4D대대 5개 대대로 발전
했고 율곡계획에 힘입어 F-4E 3개 대대 분을 순차적으로 도입하여 막강한
팬탐 공군으로 성장하면서도 제공작전의 능력을 배가시킬 수 있는 공중급유
체제를 갖추지 못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럽다.

만시지탄이 있지만 현존 공군의 전력을 최대화 시킬 수 있는 긴요한 방책의
하나는 공중급유기를 하루 빨리 도입해야 것이다.

팬텀기는 사라지지만 후속 F-4E와 신예 F-16D,그리고 F-15E 등 현존
전력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요체는 공중급유시스템으로 전투행동반경을 3
배-4배 배가시키는 것이다.
장차 가져야 할 공중급유체제는 현존 전력의 극대화가 되는 지름길이며 한
국공군이 전략공군으로 발전하는 도약대가 될 것이다.
.
월남전이 종식되고 미공군의 퇴역하는 팬탐기는 아리조나 주 David-
Monthan기지에 치장되었고 그 곳에 치장된 F-4D전폭기를 추려서 사 들였
음도 기억하자.그곳에는 4000대가 넘는 폭격기 전투기 수송기가 치장되어
있으며 최근에는 미 공군의 퇴역하는 C-130H등이 그곳에 안치되었다는 소
식이 있다. 우리가 MIMEX로 구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팬탐기를 인수 해온 16명의 조종사들은 각자의 주어 진 책무 속에서 팬탐
공군의 주역답게 최선을 다 했다.
대부분이 장군으로 승진했고 참모총장의 직분으로, 국회위원의 직위로 전역
후 대한항공의 조종사로 공군발전과 항공운송 육성에 크게 이바지 했다.
인수 요원 16명 중 2명은 유명을 달리했다 (소장 강신구 소장 박근태)
우리가 양성했던 여러 팬탐기 조종사들 또한 뜻하지 않은 비행사고로 순직
해 갔다.
양성된 젊은 팬텀 조종사들은 F-16, F-15로 기종전환을 했고 오늘의 현대
화 공군의 살아 있는 주역이 됐다. 더러는 전역 후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항
공에서 활약하고 있다.

40년이 지난 지금 이 나라 하늘을 굳건히 지켜 낸 F-4D 팬텀기가 퇴역 식
을 갖는다. 그리고 때를 같이 해 제151전투비행대대가 오늘 역사 속에 묻히
려 한다.

애기 팬텀기과 함께 사라져 간 전우들, 지금 살아 있는 팬과 톰의 사나이들,
그리고 제151전투비행대대는 대한민국의 공군의 역사에 남아 영원할 것이다.

7. 확실한 억제력으로서의 공군 역

최근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보이는 한국 전투함 천안 함이 서해에서 격침
되었음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누구로 부터의 공격인지 아직 확증은 없다.
이 영해에서의 외부 공격은 분명한 대한민국의 체제에 도전이다.
휴전 이후 최대의 희생이자 최대의 충격이다.
평화유지를 위하여 평시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다.

청와대 기습사건, 아웅산 폭파사건, 김포공항 테러, KAL기 폭파사건 등과
최근의 1,2차 연평 해전에 이어 북한은 100배 1000배 보복을 천명했고 그
후 서해 백영도 서남 해역에서 천안 함이 추정되는 어뢰 공격으로 격침 되
었음을 비추어 볼 때 북의 잠수함 공격이 자명하다고 본다.

역사는 반복하는 것이다. 40년 전 청와대 기습 사건 때와는 달리 우리공군도
충분한 응징 보복 능력을 갖추었다고 본다.
국가지도자의 결단과 국민의 단결이 필요한 때이다. 신중한 판단과 결단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정치권은 정한 바 있는 한미 양국간의 전시 작전 지휘권
이양 시기를 (2012년 4월 12일)를 상황 개념으로 그 시기를 늦추어야 할 것
이다.
팬탐 공군이 남기는 40년의 교훈을 새겨서 확실한 억제력을 확보하고 국가
의 의지를 확고히 해야 할 때다.
현존하는 주력 전투기는 모두 공중급유의 수용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공
중급유기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음은 이적행위라 할 수 있다.

이제는 한국 공군은 F-16공군을 넘어 F-15공군으로 우주 공군으로 발 돋움
했다. 하루 속히 공중급유기를 확보하여 앞으로 있을 독도를 비롯한 영토 분
쟁과 동서해 배타적 경제수역을 지키고 해군과 함께 무역국으로서 1000리
핵심해역을 지킬 수 있는 전투행동 반경을 확대하고 신장시켜 야 한다.

영국공군이 승리한 사실적 전사 하나를 든다.
1984년 4월 남미 아르헨티나는 자국 앞에 있는 포크랜드 섬을 되 찾기 위
하여 영국과 일전을 벌렸다.
영국의 폭격기와 전투기들의 공격에 굴복했다.
영국은 공중 급유기를 앞세워 수 만리 먼 본토에서 출격했고 아르헨티나의
해군과 군사시설을 여지없이 강타했다.
이와는 반대로 아르헨티나는 공중급유기는 있었으나 당시 주력기 미라지에
공중급유시스템이 없었다. 결국 항공세력의 현장 열세로 항복했다.

한국공군은 공중급유 시스템을 가진 팬탐기를 비롯하여 차세대급 전투기를
확보했지만 결국 40년이 지나도록 공중급유기를 확보치 못했다.
주 된 이유는 전력증강사업의 우선순위에 계속 밀리고 공중급유체제가 주변
국을 자극한다는 전략논리였다. 독도와 배타적 경제 수역, 1000리 핵심해역
을 지키려면 공중급유 시스템을 가져 공중세력을 배가시켜야 한다.

만시 지탄이 있지만 국가안보를 위해서 더 이상 공중급유기 확보계획을 뒤
로 연기해서는 안 된다. 항공세력을 극대화 하기 위한 단초의 하나다.

경제 성장에 힘 입어 우리 군도 발전했다. 그러나 북의 대남 적화 통일 전략
은 계속 될 것이고 주변국의 안보 환경 또한 예사롭지 않다.

응징보복과 전쟁의 승기와 억제주력은 지상군이나 해군에 있지 않고 거부
할 수 없는 침투력과 파괴력 그리고 융통성을 발휘하는 항공세력에 있다는
엄연한 전사적 사실을 국방부와 합동 참모본부의 군사 전략가들은 더 이상
자군을 위하여 침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군의 이해관계를 떠나 전군적 차원에서 국익차원에서 전력증강을 묘색하
고 그 사업의 우선순위와 자원 배분에 있어 소명인식을 새롭게 해야 한다.

응징보복과 전쟁 억제력의 또 하나의 전사적 교훈는 이스라엘 공군이다.
그들은 전쟁을 불사하는 지도자의 결단과 단결된 국민의 애국심과 보복력의
확보다.
그 힘의 수단은 항공세력이다. 공군력 하나로 나라를 지키고 있다.

우리의 합동참모본부도 전군의 통합전력 발휘를 하고자 조직을 개편한지가
20년이 지났다. 항공세력을 키우려 한다면 각 군별로 분산관리 할 것이 아
니라 전문 군이 통합하여 전력발휘를 극대화시켜야 한다.

항공세력의 운용에 있어 기본 원칙은 항공 전력을 통합해서 운용하는 것이
다. 전쟁 교리적으로 표현하자면 항공세력은 통합되어야지 나누어서는 안된
다. 이를 -공군력의 불가분의 원칙-이라는 것이다.

기동성과 융통성으로 집중과 분산 침투와 강타 이것이 전승의 요체이다.
이 원칙을 지킬 때 제공권을 확보 할 수도 있고 지상군과 해군을 적기에
지원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선도하고 열어 갈 수 있는 것이다.

통일은 한때 우리의 지상과제였다.
미국을 위시한 주변국들은 그 동안 우리의 낭만적 민족주의를 지적해 왔고
지금도 경계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 정부가 친북 좌경 화 세력에 동조되고 극렬했던 반미
사상이 그것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고 북한의 체제의 도전과 침략행위에 대하여
강력한 국가의지를 갖지 않는다면 종전과 같은 대남 적화 전략은 계속될 것
이다. 결국 국가 안보는 위태로울 것이 자명하다.
내 나라를 지키겠다는 범 국민적 안보의식 또한 어느 때 보다 긴요한 때다.
통일시대를 위해서도 북의 위협을 막고 전승을 위해서 확실한 억제력이 공
군력으로 구축되어야 한다.

이것이 팬탐 40년의 교훈이다. 2010.4.22

8.. 팬텀기 조종사에게 바치는 헌시

헌시 팬텀을 탄다. 박 종 권 공군소장(예)

- 이 詩는 필자가 당시 제151전투비행대대 제1편대장 시절 팬텀기 조종사들과 하늘을 나르며 나눈 애환의 시 한편이다.
- 어느 때쯤 두만강을 따라 북만주 건네보며 초계비행을 할 까?! 남북 통일을 염원하는 전투조종사들의 애국심을 담은 詩다.
- 1973년 신년 원단에 국민에 보내는 메시지로서 공군신문 전면에 실었던 詩다. 당시 詩題는 -팬탐을 탄다- 이지만 원 詩題는 새벽비행이다. 시집 하늘에 산다 에서.
아직 동이 터 오르기 까지 시간이 이르다.
이륙 예정시간 06시
사랑하는 아내는 벌서 일어나 커피를 끓이고 있다.
아이들의 잠든 모습,
계집아이는 인형을 안고 둘째 놈은 엎드려 자고 있다.

새벽의 따끈한 커피를 마시노라면
무사하기를 바라는 아내의 눈길
조종복에 빨간 머플러를 목에 둘러 문을 나서면
2월의 하늘 바람은 차고 별은 외롭다.

황량한 활주로, 팬텀기 주위엔 이미 밤의 정적은 없다.
반가이 맞는 믿음직한 정비사
날개를 나란히 할 억센 요기의 모습
시동 장비의 요란한 엔진 소리

이미 임무를 위한 약속은 되어 있다.
이제 새벽의 먼동이 서서히 밀려 오고
육중한 전폭기는 생명을 얻어 활주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생명선인 긴 활주로를 따라 편대는 이륙됐다.

지금 나에겐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이륙완료 후 요기로부터의 응신
“No 2 엔진계통 이상 없음 오버”.
“일 번기도 양호하다 대형을 유지하라 오버”.

이제 우리는 누구도 범 할 수 없는 강한 독수리
기수는 하늘로 치 솟으며 북으로 향 한다.
누가 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동방의 등불이라 이름 하였는가!

멀리 동해 찬란히 솟아 오르는 태양
아침의 신비 서러운 안개 속에 움직이는 산하
아, 내 조국은 정영 아름다운 강산
영공엔 레이더에 잡힌 어느 항적도 없다.
어느 누구도 노략 할 수도 없고, 되어 서도 안 될
동해의 만 곡선을 따라 펼쳐지는 이 조국의 모습
새벽의 초계비행은 더 높고
더욱 빠르다.

수도 상공의 초계비행
이 높은 고도, 이 빠른 음속
동해와 서해가 한눈에 보인다.
멀리 원산 만이 보인다.

푸른 하늘이여

어느 때쯤 이렇게 이름다운 강산을
패기 찬 요기와 함께 두만강을 따라
북 만주 건네 보며 동이 터오는 하늘
초계 비행을 할까.

1973.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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