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사태가 중화학공업 건설과 남북한 逆轉의 母胎와 계기가 되었다.
(1) 북한은 1968년 1월21일 무장특공대 31명을 보내 청와대 습격을 시도했다. 즉 1.21사태이다. 1월23일에는 동해에서 美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납치했다.
(2) 朴 대통령은 2월7일 경전선(慶全線) 개통식에서 "올해 안에 250만 재향군인을 무장시키고, 이에 필요한 무기공장도 年內에 건설할 방침"임을 밝히는 동시에, "全국민적 방위태세를 갖춤으로써만이, 북한의 도발을 막아낼 수 있다. 온 국민은 경제건설과 국토방위를 병행해야 할 것이며, 논두렁에 총을 두고 농사를 짓는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다. 즉 박 대통령은 國政의 지표를 경제제일주의에서 "一面 건설, 一面 국방"으로 수정했다.
(3) 朴 대통령은 "일하면서 싸우자", "우리 고장 방위는 내 손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4월1일 향토예비군을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이로써 향토예비군은 軍警이 전담하던 후방 對무장간첩작전에 一翼을 담당하게 되었다. 향토예비군의 무장은 긴급과제로 등장했다.
(4) 향토예비군이 창설된 약 1개월 후(1968년 5월 27일과 28일) 워싱턴에서 개최된 제1차 연례 韓美국방장관회의에서는 한국의 자위력(自衛力) 강화의 일환으로, 소구경(小口徑)화기(M16 자동소총) 생산공장을 한국에 건설한다는 데 합의를 보았다.
(5) 11월 2일 북한 무장특공대 100여 명이 울진(蔚珍), 삼척(三陟)지구에 침투, 1개월 이상 준동할 때, 향토예비군은 소탕작전에 큰 공을 세웠다. 향토예비군은 무기가 없어 전투에는 참가할 수가 없었다. 단지 경계망 구축이나 길 안내에만 동원되었다.
(6) 朴 대통령은 1969년의 國政지표도 "일면 건설, 일면 국방"으로 정했다. 이해 4월 동해에서 정보 수집중이던 미국의 EC-121 정찰기가 북한 전투기에 격추되어 탑승자 전원(31명)이 사망하였으나 군사적 보복은 없었다.
(7) 1970년 1월9일 연두기자회견에서도 朴 대통령은 "싸우면서 건설하는, 일면 건설 일면 국방의 해로 또 다시 정한다"라고 밝혔다. 3년째 "일면 건설, 일면 국방"이 國政지표였다. M-16 공장 건설이 추진되고 고속정이 건조되기 시작하고 국방과학연구소가 창설된다. 방위산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4大 핵심 공장 건설계획이 추진되었다.
(8) 1970년 6월 22일에는 朴 대통령의 목숨을 노린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사건이 발생하였다. 6월22일 새벽3시50분쯤, 특수훈련을 받은 북한 무장특공대 3명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안에 잠입, 현충문 지붕 위에 올라가 전자식 폭탄을 장치하려다, 그들의 실수로 폭발하였던 사건이다. 한 명은 피투성이 시체로 발견되었고, 다른 두 명은 軍警 예비군의 맹렬한 추격전 끝에 계양산에서 사살되었다. 이들 무장특공대는 6.25 기념식 때 정례적으로 참석하는 朴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요인들을 암살할 목적으로, 현충문에 폭약을 장치한 후 현장에서 200∼300m 떨어진 곳에서 무선식(無線式) 기폭장치로 폭파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로써 북한은 1968년의 1.21 청와대 습격사건에 이어, 두 번째로 대통령 암살을 기도했던 것이다(1974년 8월15일에는 朴 대통령을 노렸으나 부인을 죽게 한 文世光 사건이 일어났고 1983년 10월3일에는 버마의 아웅산 사건이 발생했으니, 북한은 우리나라 국가원수의 암살을 최소한 네 차례 시도한 셈이다). 정부기관 요원을 시켜 딴 나라의 국가원수를 죽이려 한다는 것은 전쟁 선포나 다름이 없다.
1970년 들어서 미국은 주한미군 2개 사단 중 7사단의 철수를 한국측에 통보한다. 북한의 위협이 늘고 있는데, 주한미군마저 감축되자 朴 대통령으로선 死活을 걸고 自主국방력 건설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해 韓日각료회의(7월21일∼23일)가 서울에서 개최됐는데, 朴 대통령은 청와대를 예방한 일본측 각료들에게 "미군이 영구히 주둔해 달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군의 현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현 상태에서 철수 문제가 나온다는 것은 시기상 적절치 않다"라며 그 고충을 털어놓았다. "북한이 단독으로 남한을 침공할 때, 이에 맞서 격퇴하려면 무엇보다도 국군의 현대화가 시급한데, 현재로서는 만족할 만한 상태가 아니다. 이런 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앞으로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朴 대통령의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朴 대통령은 1970년 8월15일, 25주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두 가지 평화적인 제안을 했다.
첫째, "북한이 무장공비 남파 등의 모든 전쟁도발 행위를 즉각 중지하고 소위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이나 폭력혁명에 의한 대한민국의 전복을 기도해 온 종전의 태도를 완전히 포기하겠다」라는 점을 명백하게 내외에 선언하고 이를 행동으로 실증할 때 …… 남북한에 가로놓인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해 나갈 수 있는 획기적이고 보다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할 용의가 있다 …… 또한 북한이 한국의 민주, 통일, 독립과 평화를 위한 UN의 노력을 인정하고 UN의 권위와 권능을 수락한다면 UN에서의 한국문제 토의에 북한이 참석하는 것도 굳이 반대하지 않겠다?"라는 제안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반도에서는 「대한민국만이 합법적인 정부라고 UN이 인정」하던 시절이다. 그런데 북한이 UN에 들어와도 좋다는 뜻이니, 가히 획기적인 제안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선의(善意)의 경제 경쟁」에 대한 제안이다. 광복절 기념사에서 朴 대통령은 "더 이상 무고한 북한 동포들의 민생을 희생시키면서 전쟁준비에 광분하는 죄악을 범하지 말고, 보다 善意의 경쟁, 말하자면 민주주의와 공산독재의 그 어느 체제가 국민을 더 잘 살게 할 수 있으며, 더 잘 살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사회인가를 입증하는 개발, 건설, 창조의 경쟁에 나설 용의는 없는가?"라고 김일성에게 제안을 했다.
朴 대통령이 이러한 경제 경쟁 제안을 하게 된 것은 경제건설에 있어서는 북한을 능히 앞지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국군의 현대화에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간을 벌자는 뜻이 깔려 있었다.
남한은 공업화의 출발이 북한보다 10년 가까이 늦었는데도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제1차 및 제2차 5개년계획을 성공적으로 초과 달성했고 앞으로의 전망도 밝았으니 70년대가 되면 북한의 공업(크게는 경제)을 모든 면에서 앞지르리라는 것은 명백해졌다. 남한의 60년대는 북한 경제를 추월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한 귀중한 10년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마침내 「어떤 체제가 좋은지 선의의 경쟁을 하자」는 朴 대통령의 제안으로 표출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세계의 빈곤한 나라들은 북한이 남한보다 경제적으로 월등히 앞서 있다고 알고 있었고, 그 이유로는 북한은 공산사회주의 방식의 경제개발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을 때이다. 자유민주주의는 돈 많은 나라에서나 적용되는 체제일 뿐, 경제적 후진국은 공산사회주의식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인식하고 있는 나라가 많았다.
그렇다면 朴 대통령의 제안은 실로 엄청난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보다 인민을 잘 살게 하는 경제이론이란 점에 존재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공산사회주의 방식보다 우월하다고 입증이 된다면 공산사회주의는 근본부터 무너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註: 현재 공산사회주의가 일시에 몰락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당시 朴 대통령의 제안은 공산사회주의의 근본이념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이러한 제안이 선진국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후진국 대열에 속해 있는 한국에서 나왔고 그것도 북한보다 경제적으로 뒤떨어졌다고 느끼고 있던 남한으로부터 나온 도전이었다. 더욱이 김일성으로서는 북한 주민들에게 「남한 주민들은 굶주리고 헐벗고 전기불도 없는 비참한 삶을 살고 있으니, 하루속히 통일을 해서 남한 주민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선전해 왔으니, 朴 대통령의 이러한 도전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중대사였다. 김일성의 절대권위에 손상이 가며 통치하는 데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김일성은 朴 대통령의 도전에 대해 즉각적으로 "철두철미 허위와 기만에 찬 모략전"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이렇게 되면서 남북한은 치열한 경제전으로 돌입하게 된다.
朴 대통령은 自主국방을 위하여는 기본 무기를 우리가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방위산업은 정밀 기계공업이다. 겨우 경공업 단계를 거치고 있었던 한국으로선 꿈도 꿀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방위산업만 전문으로 하는 군수공장을 만들 수도 없었다. 수요가 끊어지면 공장이 쉬어야 한다. 여기서 吳源哲 상공부 차관보의 창조적 발상이 등장한다. 民需用 공장을 짓고 그 안에 軍需기능을 포함시키자는 것이다. 평소엔 수출용 공장이고 필요시엔 무기를 만든다. 동시에 방위산업의 기반이 되는 중화학공업 건설에 매진한다. 중화학 공업을 건설하여야 수출액이 늘어나고 그래야 국방력을 강화할 수 있는 돈이 생긴다.
이렇게 하여 自主국방에 대한 박정희의 고민이 중화학공업 건설이란 돌파구를 찾게 되었다. 중화학공업 건설은 1970년대의 國政지표가 되었다.
중화학공업 건설에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일본의 경우 10년이 걸렸다. 政權 교체가 잦은 나라에서는 장기적 계획의 추진과 투자가 불가능하다. 중화학 투자에 정치적 고려가 들어가서도 안 된다. 중화학공업 건설 구상은 정치적으로는 유신체제 수립으로 이어진다. 朴正熙는, 정치적 비용을 최소화한 유신체제를 구축, 國力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하여야 중화학공업을 건설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동시에 공산주의의 유혹에 농민이 넘어가지 않도록 새마을운동을 시작, 소득증대 사업을 벌이고, 중산층 육성과 의료보험의 도입을 통하여 노동자들의 좌경화를 막으려 하였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은 6大 핵심 사업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전자(구미), 조선(울산, 거제), 자동차(울산), 기계공업(창원), 종합제철(포항), 석유화학(울산, 여천)이 그것이다. 이 중화학공업이 지금도 한국을 먹여살린다. 1.21 사태는 박정희를 분노하게 만들었고, 朴 대통령은 國力을 총동원하는 대응책을 강구하여 드디어 1970년대 말에 가선 남북한의 힘의 균형을 결정적으로 바꾸어놓는 것이다.
이번 천안함 사태는 朴正熙에게 진 북한정권이 정규전으로는 자신이 없으니 게릴라 전법으로 기습을 가해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북한의 강점이 아니라 약점을 보여주는 일이다. 3.26 천안함 사태가 李明博 대통령을 화 나게 만든다면, 그리하여 國力을 총동원한 對김정일 압박정책을 낳는다면 김정일 정권이 죽을 것이다. 당하고도 화가 나지 않는다면 죽는 쪽은 한국일지 모른다.
천안함 爆沈이 李明博의 1.21 사태가 되어야
- 吳源哲, 趙甲濟
-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2010-05-04, 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