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반 아편전쟁에서 20세기 중반 중국의 재통일에 이르기까지 병든 사자는 살쾡이나 이리는 물론 개나 고양이에게도 물어 뜯겼다. 산업화에 앞선 서구와 일본과 러시아는 중화주의(中華主義)를 동네북으로 만들었다. 단,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바람에 누구도 병든 사자로부터 살찐 사슴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1945년 미국이 일본을 물리쳐 준 덕분에 중국은 외세를 걱정하지 않고 통일의 대장정에 박차를 가해 4년 만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미국이 장개석에게 지원한 무기도 모조리 모택동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1949년 북경의 명령이 몽골을 제외하고 과거 청나라 영역 어디에나 미치게 되자, 모택동은 중화주의를 부활하여 예전의 가장 어여쁘던 두 조공국의 운명을 바꾸기로 결정한다.
 
 20세기 신화 중에 가장 화려한 것은 아마 베트남이 미국을 물리치고 통일을 달성했다는 것이리라. 중공과 소련의 지원이 없었다면, 베트남은 지금도 아프가니스탄처럼 혼란스러울지 모른다. 결정적인 도움은 중공으로부터 왔다. 1949년부터 중공은 월맹에게 6개 사단을 지원했다. 대대 규모밖에 없었던 호지명은 모택동이 무기와 달러를 제공하여 순식간에 6개 사단을 창설해 주자, 단숨에 프랑스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소련과 중공의 수작을 지켜보던 미국이 뛰어들자,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로 사상 무장한 베트남 공산당은 중소(中蘇)의 무기와 식량으로 미국도 물리쳤다. 아무리 그들이 사이공의 부정부패로 반사적 민심을 얻었다고 하지만, 중소의 지원이 없었다면, 특히 통일 중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월맹은 반란 세력으로 머물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뒤늦게 중국의 실체를 깨달은 미국은 월남을 버리고 중국을 얻기로 정책을 바꿨다. 1972년 미중 국교수립과 중국의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두 미끼로 미국은 뱀의 꼬리 대신 뱀의 머리와 몸통 아니 용의 머리와 몸통을 얻었다. 인도지나의 사이공 일대는 거대한 통일 중국에 비하면 너무도 작고 하찮은 땅이었다. 체면을 좀 구기기는 했지만, 미국의 국익은 오히려 수십 배 커졌다. 중국을 소련에서 떼어내 제삼자 내지 미국의 우방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중국의 개혁개방이 이뤄졌고, 소련과 동구는 정해진 대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사면초가에 몰린 베트남도 결국 1986년부터 철천지원수 미국의 시장경제체제로 슬그머니 들어왔다.
 
 호지명에게 6개 사단을 중무장시켜 준 모택동은 김일성에게도 6개 사단을 보내 주었다. 소련군과 미군이 물러가고, 바로 이어 모택동은 아시아의 천자(天子)로서 한반도에 깊숙이 개입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자마자, 그는 스탈린과 협의한 대로 팔로군 소속 조선족 출신 부대 6개 사단을 1949말부터 1950년초까지 김일성에게 돌려보냈다. 팔로군 164사단은 조선인민군 5사단으로, 166사단은 6사단으로, 139사단과 140사단과 156사단은 7사단으로 편입되었다. 4개 사단밖에 없었던 북한인민군은 전투경험이 풍부한 3개 사단이 늘어 7개 사단으로 편성되었다. 남북의 군사력이 결정적으로 기울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이 불장난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군은 서독에 그대로 주둔한 상태에서 소련군이 동독에서 물러가자, 1990년 동독은 동독주민의 질풍노도적인 요청으로 너무도 간단하게, 허망할 정도로 간단하게 서독의 기본법(헌법)에 편입되었다. 동독보다 훨씬 열악했던 북한은 건재했다. 왜? 동아시아에서 소련은 역사의 뒤꼍으로 사라졌지만, 중국이 역사의 안마당으로 성큼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북방정책으로 북한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스스로 북방정책을 폐기한 데다 패권주의자 중국으로부터 어떤 다짐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중국에 바란 것은 경제적 교류밖에 없었다. 중국은 북한에서 3백만이 굶어 죽어도 거들떠보지 않고 중국의 문화혁명 시기에 북한으로 도망 간 중국인처럼 뼈만 남은 탈북자를 보이는 족족 무자비하게 강제송환했다. 그것이 혈맹에 대한 중국의 보답이었다.
 
 중국은 일차적으로 아시아 패권을 노리고 이차적으로 세계 패권을 노린다. 중국의 아시아 패권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일본과 미국이다. 북한과 한국은 이 두 나라를 견제하는 지렛대이다. 중화주의의 전통적인 일개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단이다. 모택동이 염라대왕처럼 두려워했던 시장경제는 중국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제일 수출로 자신감이 넘친다. 두려운 것은 자유민주와 바다와 하늘이다. 중국의 바다는 너무 좁기 때문에 지정학적으로 중국의 세계 패권은 불가능할 것이다. 바다가 좁은 만큼 하늘도 너무 좁다. 그러나 아시아 패권은 능히 가능하다.
 
 한국의 시장경제는 더 이상 중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 중국의 입장에서 중동을 제외하면 무역 역조가 가장 심한 곳이 한국이지만, 그것은 중국의 경제 규모로 보나 발전 속도로 보나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닌 것 같고 순 엉터리 같은 한국의 자유민주는 중국에게 목의 가시이자 옆구리의 비수다. 그 뒤에는 미국과 일본이 작은 언덕 뒤의 태산처럼 버티고 있다. 한국의 자유민주가 임진강과 압록강을 넘어 일본과 미국의 힘을 실어 노도와 같이 밀려들면, 중국은 해마다 천안문 사태가 벌어질 수 있고 머잖아 아시아 패권은커녕 여러 개의 나라로 분열될 수 있다. 이것이 중국으로서는 가장 두렵다. 따라서 중국은 북한이 핵으로 장난치든 어뢰로 까불든 제5열로 깽판치든 북한의 등에서 손을 떼지 못한다.
 
 중국은 여전히 공산당 1당 독재체제다. 이것은 북한과 닮았지 한국과 닮지 않았다. 등소평이 박정희처럼 야당을 인정했더라면, 중국은 일찌감치 갈가리 찢어졌을지도 모른다. 일당독재지만 그것이 정치안정에 기여하여 지금까지는 기대 이상으로 잘해 왔다. 앞으로가 문제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나 수양제와 비슷했던 모택동의 공포시대가 지나고, 중국이 미국의 시장경제에 서서히 편입하면서 평화적인 권력교체가 이뤄진 것도 정치적 발전이다. 10년마다 최고지도자가 바뀌는 것이 2012년까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정치외교와 군사는 당총서기가 맡고, 경제는 국무원총리가 책임지는 이원화로 권력이 분산된 것도 정치적 발전이긴 하다. 그러나 구매력 기준 일인당 소득이 5천 달러를 넘어서면서, 6천만 공산당원과 그 가족(태자당)이 경제적인 이득을 독과점하는 것에 대한, 곧 분배정의에 대한 불만이 급격히 커지고 있고,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정치 참여 욕구도 용광로처럼 끓어오르고 있다. 중앙의 권력은 지방으로 각 성(省)으로 대폭 이양하지 않을 수 없다. 상향식 지도자 선출인 선거제도도 언젠가는 도입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중국의 진퇴유곡적 고민이 있다.
 
 정치안정 속의 세계 2위 경제대국 도약이란 승리에 도취되어, 중국의 소련판 분열이 두려워, 중국 공산당은 다당제 도입을 최대한 미룰 것이다. 제2, 제3의 천안문 사태가 터지지 않는 한, 중국의 당 지도부는 중국이야말로 민주주의를 가장 잘 구현한 나라라는 대외용 선전을 내면화하여 양심에 조금도 거리끼지 않고 도리어 측은한 눈길로 한국과 미국을 바라볼지도 모른다. 하여간 습근평이 2012년부터 10년간 중국을 이끌 동안, 최소한 2020년 소강(小康)의 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어쩌면 아득한 요순시대부터 고대했던 대동(大同)의 시대에 바야흐로 2050년 도달할 무렵까지는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를 유지하려고 할 것이다.
 
 2010년 5월 3일 김정일은 북경을 방문했다. 6자회담과 개혁개방과 천안함 피격 사건이 복잡하게 얽힌 와중에 으리으리한 환영을 받으며, 김정일은 국가주석 호금도와 총리 온가보와 군사주석 강택민 등 최고위급 인사들을 두루 만났다. 국빈 방문이 아니면서도 어떤 국가 원수보다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이건 겉모습이고, 속내는 달랐다. 중국은 개혁개방하라는 내정간섭적인 말을 노골적으로 건넸고, 김정일은 심사가 뒤틀려 <<홍루몽>>을 보지도 않고 하루 일찍 압록강을 건너갔다. 천안함에 대해 중국이 미국에 맞서 북한의 편을 들어 줌에도 김정일은 방중(訪中) 성과에 대해 크게 떠벌리지 않는다. 실패했다는 간접적인 증거다.
 
 재미있는 것은 김정일은 중국의 주요 인사를 빠짐없이 만났지만, 2012년부터 10년간 중국을 이끌 5세대 쌍두마차 국가주석 내정자 습근평과 국무총리 내정자 이극강은 못 만난 것 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호금도와 온가보가 중국을 이끄는 2011년까지만 김정일을 돌봐 주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정치야 어떠하든 개혁개방을 받아들이면 그 후에도 밀어 줄 수 있지만, 김정일이 개혁개방을 절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습근평과 이극강 체제가 들어서는 2012년에는 김정일을 제거하고 개혁개방파로 교체하겠다는 최후통첩적인 암시로 볼 수도 있다. 2012년을 강성대국 건설 원년, 곧 적화통일의 해로 선언한 김정일로서는 다급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제2의 6.25에 즈음하여 김일성이 모택동으로부터 실전 경험이 풍부한 5만 명 군인을 지원 받아 군 전력을 단숨에 두 배 늘린 것과 같은 지지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이번에 명확해졌다. 중국이 원하는 것은 경제든 정치든 북한이 소중화가 되는 것이다. 이어서 그런 체제를 한국까지 밀어 붙이는 것이다.
 
 
 김정일의 최고 후원자는 중국보다 한국의 친북좌파다. 이들은 무엇보다 한국에서 말과 글과 조직을 장악하고 있다. 북한군이 눈에 띄게 쳐들어왔건 눈에 보이지 않게 쳐들어왔건 상관없이, 어떤 경우에도! 북한이 저질렀거나 저질렀을 가능성이 99.99%인 사건에서도, 김정일의 편에서 생각하고 김정일 편에서 말하고 김정일 편에서 행동하는 한국의 친북좌파다. 중국의 은총이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김정일은 한국 곳곳에 진치고 있는 천군만마를 믿고 파천황의 도박판에 7천만 한민족의 운명을 걸지 모른다.
 
 2020년까지는 아시아 패권의 발톱을 드러내지 않고, 2050년까지는 세계 패권의 이빨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중국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모택동 사후의 중국 4인방 집단과 흡사한 김정일 집단이 이판사판 ‘서울바다 불바다 인천바다 불바다’를 실행에 옮길지 모른다. 그 시기는 주한미군의 군사작전권이 전환되는 2012년, 중국과 한국과 미국의 국가지도자가 새로 들어서는 2012년이 될 가능성이 크다.
    (2010. 5. 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