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와 천안문사태

광주사태로 한국은 둘로 셋으로 갈라져 마침내 반미친북의 나라가 되었고, 천안문사태로 중국은 하나로 뭉쳐 일약 G2로 부상했다.

 

 중국이 경제 부문에서 17년의 차이를 두고 한국의 발자취를 따라오던 중, 지식인을 중심으로 경제만이 아니라 정치도 한국을 이상향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무렵부터였다. 전세계적으로 한국에 대한 인식이 개천벽지(開天闢地)하게 된 1988년 서울올림픽 후에는 그것이 노골화되었다. 12억 입의 트위터는 무서웠다. 첫 한류였던 셈이다. 등소평이 수렴청정(垂簾聽政)하면서 1980년부터 내세운 호요방 공산당총서기(재임 1981~1987)와 조자양 국무원총리(재임 1980~1987) 쌍두마차가 민심이라는 손오공의 여의봉을 들고 등소평의 부처님 손아귀에서 쏜살같이 벗어나고 있었다. 1987년 등소평은 새끼손가락을 까닥하여 호요방을 손바닥에서 떨어뜨렸다. 한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 물었던 것이다. 총서기직은 조자양(재임 1987~1989)에게 돌아갔고, 총리직은 주은래의 양아들로서 자유민주를 혐오하던 이붕(재임 1987~1998)에게 돌아갔다.

 

 분을 삭이지 못하던 호요방이 1989년 4월 덜컥 죽어 버렸다. 천안문 광장에 추모행렬이 순식간에 50만 명으로 늘어났고 이들은 좀처럼 물러갈 줄 몰랐다. 4월 27부터 6월 4일 사이에 200만으로 늘어났다. 전세계에 중계방송되었다. 탱크 앞에 맨손으로 삿대질하는 학생 모습은 서방세계에서 자유민주의 위대한 승리로 비쳤다. 홀로 남은 조자양은 이들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5월 15일 월드 스타 고르바초프의 북경 방문에 큰 기대를 거는 듯했다. 그 기세 그대로 ‘시대에 뒤떨어진’ 등소평마저 밀어낼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붕이 등소평의 뜻을 받들었다. 1989년 6월 4일 인민군이 1천여 명의 단식자를 포함하여 비무장 시위대를 그대로 밀어버렸다. 중계방송은 그 날 새벽부터 중단되었다. 얼마나 죽었는지, 얼마나 다쳤는지 아무도 모른다. 100여명에서 10,000여명까지 아직도 추측이 난무한다.

 

 중국의 지식인들이 이상향으로 여기던 한국은 이미 이 무렵 자유민주의 틀에서 벗어나 곳곳에서 중국의 인민민주 또는 북한의 주체민주를 따르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처음에는 극소수 극렬분자의 자해공갈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점선(點線)과 진지와 외곽은 대학에서 문화계로, 문화계에서 재야로, 재야에서 유비통신으로, 유비통신에서 범 시민단체로 거의 방해 받지 않고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절대다수 자유민주 세력을 수식어 안 붙은 ‘민주’의 우산 아래 하나하나 접수했다. 그들은 말과 글을 알았다. 조직을 알았다.

 

 결정적 계기는 1980년의 광주사태였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살인마였고 카터(재임 1977~1980)와 레이건(재임 1981~1988)은 살인마의 두목이었다. 반독재와 반미는 시대의 주류였다. 그 누구도 전두환을 위해 변명할 수 없었고 그 누구도 평시 및 전시작전권을 소유한 미국의 간접적 책임에 대해 무죄를 주장할 수 없었다. 입술 모양이 살짝 변해도 그 순간 그는 독재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골수 사대주의자로 따돌림 당했다.

 

 광주사태는 여전히 성역(聖域)이다. 신성불가침이다. 누구도 거기에 대해 털끝만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조심스럽게 사실관계조차 제기할 수 없다. 오로지 영화 <<화려한 휴가>>의 눈으로만 보아야 한다. 중국의 천안문 광장에서는 시위대가 실탄을 장전한 총은커녕 가짜 권총 한 자루 들지 않았지만, 등소평의 인민군은 검은 커튼 뒤에서 드르륵 갈겨 버렸다. 그 후 13억만이 아니라 70억이 21년이 넘도록 입을 다물고 있다. 중국은 미국과 더불어 G2라고 너도나도 칭찬과 아첨의 대열에 끼인다. 중국을 미국발 세계 경제 금융위기의 구세주로 떠받들기 바쁘다.

 

 수사기록을 샅샅이 뒤진 지만원 예비역 대령에 따르면, 광주에서는 시위대가 17개 시군에 흩어져 있던 38개의 무기고를 불과 4시간 만에 습격하여 카빈과 수류탄과 군용차량까지 동원했다. 총기만 5,403정이 넘었다. 1995년 김영삼 정부에서 재조사한 바에 따르면, 총상 사망자 128명 중 군인의 개인화기 M-16에 의한 사망자는 91명이었다. 예비군의 개인화기 카빈에 의한 사망자는 27명이었다. 민간인 총 사망자는 166명으로 1985년 1차 조사 때보다 4명 늘었다. 군인은 23명이 사망했고 경찰은 4명이 사망했다. 군인 23명 중 12명은 부대 간의 오인사격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1985년 전두환 정부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민간인 총상 사망자 116명 중 M-16 총상 사망자는 36명이었다. 나머지 80명이 군인의 총이 아닌 총에 희생되었다.) 어느 쪽이든 군인의 개인화기가 아닌 총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가 만만찮다. 한편, 민간인 부상자는 377명이었고 군경 부상자는 265명이었다. 사망자와는 달리 부상자는 민간인과 군경이 큰 차이가 없다.

 

 탈북자로 구성된 자유북한군인연합(회장 임천용)은 2006년 12월 공개기자회견을 통해 26년간 지성소(至聖所)에 드리웠던 커튼을 한 자락 북 찢었다. 광주사태에 북한의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주장이었다. 그들은 2009년에는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을 발간했다. 탈북자 16명의 증언과 20명의 설문내용을 모은 책이었다. 그들의 말과 글은 의문의 안개를 비추는 한 줄기 빛인 듯하다. 아직 법정에서 증거로 그 책이 채택되진 못했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M-16이 아닌 총에 의한 민간인 희생도, 아직도 치를 떨게 만드는 여러 잔혹한 피살도 깨끗하게 설명된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광주에 파견된 북한의 특수부대가 광주시민과 계엄군을 이간시켰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광주 시민과 그들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이용당한 셈이다.

 

 광주사태는 그 후에 벌어진 일이 더 중요하다. 광주사태 이후 대한민국의 사상과 양심이 알게 모르게 바뀌었다. 8.15해방과 6.25를 통해 미국과 빵을 나눠 먹고 피를 나눠 마신 형제 사이가 된 한국에서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반미가 나중에는 친북이 다수 한국인의 정서가 되었다. 어느 사이에 좌우를 가리지 않고 반공은 군사독재와 동의어가 되었다. 간첩 다음에는 꼭 조작이란 꼬리표가 붙었다. 대부분의 국민이 광주에 크나큰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 광주사태는 토론의 대상에서 아득히 비상하여 양심의 별이 되고, 대한민국 정통성의 초석이 되었다.

 

 광주를 민주성지로 확신하는 사람치고 햇볕론자가 아닌 사람이 드물다. 그들에게 독재자 김일성과 김정일은 화해와 퍼주기의 대상인 민족이지만, 제2의 6.25를 방지하는 최대의 방패인 주한미군을 계속 유지한 레이건이나 부시(광주사태 당시 미 대통령이었던 카터는 저승사자로서 어금니를 악물고 주한미군 철수로 협박하며 박정희에겐 인권을 외치고, 김일성에겐 평화의 천사로서 목구멍 근처의 하얀 이빨까지 드러내며 무조건 평화를 외쳤으므로 면죄부를 받음)는 사악한 제국주의자이다. 독재자 김일성과 김정일에겐 핵개발비든 미사일개발비든 독재자 품위유지비든 달라는 대로 황송한 마음으로 주어야 하지만, 불쌍한 북한주민에겐 진실의 풍선 하나 날려서도 안 된다. 거기 5억 달러가 아니라 1달러도 넣어선 안 된다. 그건 냉전적 사고에서 비롯된, 남북화해에 찬물을 끼얹는 반민족적 적대 행위다. 개성공단이든 금강산이든 귀하디 귀한 달러를 절대 북한의 근로자나 접대원에게 직접 주어선 안 된다. 오로지 독재자 김정일이 임명한 노동당 간부에게 일괄적으로 고스란히 건네주어야 한다. 어떻게 쓸지, 누구에게 줄지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의심하면 될 일도 안 된단다.

 

 독재자 김정일 집단의 인권유린은 독재자 히틀러 집단의 인권유린보다 악랄하고 야비하더라도, 한국은 국가인권위원회조차 확인할 수 없다고 발뺌해야 한다. 일개 무덤에 북한 1년 예산의 3배를 쓰느라 300만을 굶겨 죽인 것도 확인할 수 없다며 입을 닫아야 한다. 굳이 말하려면, 자연재해를 들먹여야 한다. 그때까지 북한이 지상낙원이라며 자본주의 국가 그 어떤 국가에게도 손을 내밀지 않은 김정일에게는 아무런 책임을 묻지 말아야 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울타리 없이 살던 중국과 러시아가 아니라 엉뚱하게 그때까지 사실상 아무런 교류도 없었기 때문에 존재할 수가 없었던 한국과 미국의 경제제재 조치를 탓해야 한다. 그것이 반미친북의 한 단면이다.

 

 등소평의 천안문 평화시위 무력 진압을 개탄해 마지않는 일부 서구인들은 놀랍게도 현대판 진시황제 모택동의 3천만 직간접 학살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는다. 한국인은 대체로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한 천안문사태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모택동의 3천만 학살에도 침묵한다. 어느 전직 대통령은 모택동도 제일 존경하고 등소평도 제일 존경한다고 고백했다. 반미(反美)는 좀 해도, 아니 억수로 많이 해도 되지만 반중(反中)은 절대 안 된다는 뜻이리라. 독재자 김정일의 유일 든든 후원국은 지도자가 누구냐에 관계없이 무조건 받들어 모셔야 한다는 사대주의적 발언일지도 모른다.

 

 1992년 1월 등소평은 남쪽 지방을 한 바퀴 돌았다. 그는 천안문 광장을 청소한 정치 1번지 북경의 이붕이 아니라 자유민주 시위대를 한 명도 다치지 않고 말로써 귀가시킨 경제 1번지 상해의 당서기 강택민을 당총서기 자리에 앉혔다. 이붕은 그대로 총리 자리에 눌러 앉혔다. 약 2년간 강택민도 이붕도 등소평의 눈치만 살폈다. 세계도 의심의 눈초리로 등소평을 관망했다. 등소평은 남쪽의 개방 지역을 한 바퀴 돌면서 강택민에게 경제 부문의 개혁과 개방을 계속하라며 그의 넓은 등을 두드렸다. 등소평은 급진주의가 아닌 점진주의가 가장 빠른 개혁개방임을 주지시켰다.

 

 정치는 알지만 경제는 모르는 이붕의 총리 자리에 등소평으로부터 경제를 안다고 칭찬 받은 유일한 인물 주용기가 앉은 때는 등소평이 죽은 다음해인 1998년이었다. 등소평식 점진주의였다. 아니나 다를까, 중국은 10% 내외의 고속성장을 그 후 20여년간 계속했다. 등소평은 예로부터 권력이양이 유난히 어려웠던 중국에서 강택민과 주용기 다음 세대 지도자로 호금도와 온가보까지 죽기 전에 점지해 두었다. 5년 임기 두 번연임은 그 후로 하나의 전통으로 굳어졌다. 2012년에는 이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습근평과 이극강 체제가 들어선다.

 

 오늘날 등소평을 보고 독재자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국에도 다른 나라에도 거의 없다. 천안문사태로 그를 비난하는 사람도 드물다. 어쩌면 작은 희생으로 큰 희생을 막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조자양과 이붕이 강택민과 주용기처럼 총이 아닌 말로써 민도가 낮은 중국에겐 너무 버겁고 미심쩍은 자유민주란 이름의 포퓰리즘에 대한 환상을 깨뜨려 한 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기를 바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결단의 순간이 오자 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런 등소평도 전두환에 비하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독재적이었다. 그는 일당 독재를 그대로 유지했고 선거는 아예 도입할 생각조차 안 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단임도 실천하고 다당제 하에 국회의원 선거도 계속하고 대통령 직선제도 허용한 전두환은 경제만 유례없이 호황을 누리게 한 게 아니라 자유민주도 상대적으로 선방했다. 아무리 청문회를 열고 수사망을 좁혀도 광주사태에서 그가 발포 책임자였다는 것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사실상 당시 실권자였던 그에게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북한의 특수부대가 광주에 투입되었다면, 어쩌면 그가 북한의 거대한 도발을 저지시켰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통일되면 어떤 형태로든 전두환은 재평가될 것이다.

 

 전두환은 사상전에서 졌다. 광주사태 이후 대학은 사실상 코뮌 상태였다. 그것은 최루탄이 터질수록 더 강화되었다. 전두환은 말과 글에서도 졌다. 전두환의 언론통폐합도 대자보와 문학과 철학과 사회과학의 입은 닫을 수 없었다. 민족과 통일과 민주는 광주의 성역으로 속속 빨려 들어갔다. 민족이 단군의 후손인지 김일성 민족인지, 통일이 자유통일인지 적화통일인지, 민주가 자유민주인지 인민민주인지, 그건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마다 달랐다. 386운동권 일부 외에는 누구도 커밍아웃하지 않았다. 단지 행동으로 김정일에 대한 태도로, 북한인권에 대한 말과 행동으로 짐작할 따름이다. 하여간 김대중은 지금도 어린 양이고 전두환은 사악한 늑대다. 김대중은 죽어도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고, 전두환은 살아도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죽어 있다.

(2010. 6. 12.)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