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左翼)이 싫은 이유

자신의 말을 정당한 것으로 주장하기 위해서 비열함도 꺼리지 않았다 인간이 ‘올바른 정의’하나만을 가지고 그것을 위해 평생 동안 살 수 있을까. 또한 물질적 이익과 역학적인 이해관계 하나만을 위해서 평생 동안 몰두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올바른 정의’하나만을 위해서 평생을 살면 바보가 되기 쉽고, 물질적 및 역학적인 이해관계 하나만을 위해서 평생 동안 몰두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추물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사는 모양을 들여다보면 사회에서 ‘올바른 정의’와 물질적 및 역학적인 이해관계는 동반자적, 정비례적 관계로 형성 되여 인간에게 활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현상을 가리켜 흔히 사람들은 맹물만 먹고살 수 없고 빵만 먹고도 살수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올바른 정의’와, 물질적 및 역학적 이해관계에 대한 욕구가 상반되는 것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든 그 두 가지 요소가 함께 숨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상대적인 두 가지 요소가 내면에서 키 다툼을 하며 존재한다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인간의 본성. 그 두 가지 요소의 균형을 맞추어 가며 사는 사람들이 정상이라면 그 두 가지 요소의 균형을 깨는 것, 이를테면 물질적 및 역학적 이해관계에 ‘올바른 정의’를 희생시키는 인간들을 비정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나름대로 그 ‘자신의 올바른 정의’에 집념하던 나머지 그 ‘자기만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에 불과한 정의’를 주장하기 위해서 자기도 모르게 어떤 비열함도 마다하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서해안의 북방한계선 지역에서 천안함이 어뢰공격으로 침몰된 지난 3월27일부터 한 달이 지난 4월 말. 당시 천안함 침몰이 북한군의 소행으로 드러나면서 한국사회는 격앙되던 분위기였다. 어느 날 본 방송국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자신을 한국시민이라고 소개한 그는 우선 한국사회에서 탈북자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장시간 ‘가르침’을 주었다.

그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탈북자들은 한국에 나와서 조용히 살아야 한다는 것 이였다. 한국의 경제도 어렵지만 탈북자들을 같은 민족이라고 받아주고 돌봐준다는 것, 그러니 조용히 살아야한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설치는가, 나중에 그는 탈북자들이 정치적인 문제에 끼어들어 날치고 있다는 말도 서슴없이 해댔다.

말 같지 않아서 전화를 끊는 필자에게 그는 이렇게 외쳤다. ‘당신들이 뭔데? 청와대에서도 천안함 사건은 북한 짓이 아니라고 하지 않아?!’ 결국 그는 스스로 자신을 발가벗겼다. 탈북자들을 멍텅구리처럼 생각했는지 아니면 멍텅구리로 만들어놓으려고 작정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그는 자신의 말을 정당한 것으로 주장하기 위해서 비열함도 꺼리지 않았다.

최근 평양을 찾아간 한상열 이도 그런 형태일 것이다. 그는 지금 자기가 어떤 사명에 목숨 걸었다고 나름대로의 생각을 할지 몰라도 그는 물에 빠진 김정일이 허우적거리며 잡은 지푸라기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주관과 객관의 차이는 이렇게 엄혹하다. 그러면 단순한 좌익에서 극좌(빨갱이)로 변한 한상열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원래 북한체제의 속성과 한국좌익의 속성은 절대 동침할 수 없는, 하늘과 땅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북한체제의 속성은 잔인한 폭압이고 한국좌익의 속성은 균형 잡힌 사회를 추구하는 것이다. 한국의 좌익을 김정일 무리와 ‘같은 것’으로 취급하면 그것은 분명 한국의 진보(좌익)를 모욕하는 것. 그러나 한국사회의 일부사람들이 자신들의 ‘좌익 사상’을 주장하거나 관철하기 위해서 철저히 김정일을 두둔하는 현상은 더욱 분명한 불순이다.

그런 현상은 좌익적인 이론을 주장하기 위해서 극좌가 되어버리는, 이른바 ‘자기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정의’에 집념하던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어떤 역학적 이해관계에 종속이 되는, 비열함도 마다하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현실이라고 볼 수 있다. 좌익이라는 의미는 변화를 추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험악하게 변하는 현상은 제어해야하지 않겠는가.

평양에 찾아간 한상열은 전 세계가 우려하고 규탄하는 김정일의 핵개발까지도 서슴없이 두둔해주고 있다. 이것은 한국좌익들의 이론에도 저촉되는 것. 이것도 ‘자기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정의’를 주장하기 위해서, ‘자기의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서 비열함도 마다하지 않는 이기적현상이라고 볼 수 있지만 명백한 것은 그렇게 존재하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탈북자 허석재 (출처: 자유북한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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