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 예찬

게으름은 창의력의 원천이요, 인간 발전의 원동력이다.

 

“천릿길을 단숨에 달릴 수는 없을까.”

부지런한 사람은 이런 헛된 망상에 빠지지 않고 새벽같이 일어나 괴나리봇짐을 졌다. 봇짐에 주렁주렁 짚신을 매달고 그는 걷고 또 걸었다. 발이 부르트고 입안이 타도 걷고 또 걸었다. 하루 100리씩 열흘 만에 한양에 도착했다. 그보다 부지런한 사람도 있었다.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100리 길을 내쳐 달렸다.

“아테네가 이겼다!”

아테네 사람들의 눈물 콧물 환호 속에 그는 환한 웃음을 머금고 숨을 거두었다. 그 후예들이 이제는 42.195km를 2시간 5분 안에 뛴다. 몸무게가 3kg 정도 빠지지만, 그렇게 빨리 달리고도 과학적 섭생과 훈련으로 완주 후에 죽는 사람이 없다.

 

게으른 사람 중에 야생마를 주목한 사람이 있었다.

“저 놈을 잡아타고 가면 엄청 빠를 거야.”

말 타기는 쉽지 않았지만, 어느 게으른 사람이 마침내 성공했다. 아무리 빠른 사람도 말 탄 사람을 당할 수는 없었다. 후에 등자를 이용해 말을 타고 바람처럼 달리며 뒤로도 화살을 날리던 종족들이 일자무식의 한 사람 주위로 모여 들었다. 그가 말 위에서 채찍을 들어 가리키자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불과 몇 십 년 만에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제국이 태어났다.

 

어떤 게으름뱅이가 안방에서처럼 편안하게 앉은 자세로 비오는 날에도 비를 안 맞고 먼 길을 말처럼 빨리 달릴 수 없을까, 방 안에 틀어박혀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마침내 몇 미터 스스로 가는 탈것이 나타났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비웃었다.

“걷는 게 빠르겠다!”

그러나 머잖아 말보다 두세 배 빠르고 기름만 새로 넣으면 줄기차게 밤낮 달릴 수 있는 자동차가 나왔다. 시속 300km가 넘는 기차도 등장했다.

 

 어떤 게으름뱅이가 생각에 잠겼다.

“저 강을 물고기처럼 건널 수 없을까.”

 부지런한 사람은 아무 말 않고 일단 물에 들어갔다. 돌처럼 쑥 갈아 앉고 연신 물을 마셨지만, 마침내 성공했다. 과학적 섭생과 훈련 덕분에 이제 1500m의 물길을 14분 34초대에 오가는 사람도 있다.

 어떤 게으름뱅이가 몸에 물을 안 적시고 물 위로 가는 방법이 없을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다가 뗏목을 만들었다. 노를 젓지 않고 바람을 이용하는 방법을 고안한 게으름뱅이도 있었다. 마침내 바람도 파도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의 힘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바다 위를 뭍에서 말 타고 달리듯 달리는 배를 만들었다. 유럽의 한 작은 섬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들은 머잖아 세계를 지배했다.

 

 어떤 게으름뱅이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새처럼 훨훨 날 수 없을까.”

 어떤 부지런한 밤손님이 3층 옥상에서 다른 3층 옥상으로 날개도 없이 순전히 다리의 힘으로 날아가다가 떨어져 죽었다. 두 건물 사이는 불과 2.5m!

어떤 형제가 수만 년 게으름뱅이들의 소원을 풀었다. 스스로 하늘을 나는 배(ship)! 처음에 그것은 불과 100m밖에 날지 못했다. 그러나 불과 그로부터 70년도 안 되어, 인간은 우주선(space ship)을 타고 날아가 달에서 작은 발걸음을 내딛었다.

 

 모름지기 게으름은 창의력의 원천이요, 인간 발전의 원동력이다. 세상 사람들이 온통 개미나 벌처럼 부지런하다면, 인간은 고작 지금도 원시적인 농업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게을러야 헛된 생각에도 빠져들게 되고, 게을러야 멋진 생각도 떠올리고, 게을러야 세상을 바꾸는 문명의 이기도 발명하게 된다. 게으른 사람만이 자신의 게으름에 비추어 다른 사람의 게으름을 이용할 생각을 하게 되고, 일단 그런 목표가 세워지면 누구보다도 부지런히 끈질기게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면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아무 것도 않고 빈둥거리는 시간이 많아야 한다.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고 공부하는 사람은 생각이 막히기 쉽고 마음이 딱딱해지기 쉽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심도 부족하기 쉽다.

 

 전염병으로 대학이 문을 닫자 고향으로 내려가 냇가에 앉아 심심해서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뉴턴은 <만유인력>도 발견하고 <미분적분>도 발견했다.

 양지 바른 곳에서 손 하나 까딱 않고 ‘시간이 뭘까, 공간은 뭘까?’ 어릴 때부터 이런 공상을 거듭하던 아인슈타인은 20대 초반에 <상대성원리>를 발견했다. 아인슈타인은 후일 프린스턴대로 갔는데, 거기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빈둥거려도 좋고, 하루 종일 잡담해도 좋고, 하루 종일 잠자도 좋았다. 강의도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으면 되었다. 논문에 대한 의무감도 없었다.

 원자폭탄을 개발한 뉴멕시코의 로스앨라모스 연구소에도 그런 데가 있다. T분과라고 불리는 이론분과다. 100명이 넘는 과학자와 수학자들은 봉급을 엄청 많이 받지만 강의나 논문에 대한 부담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가장 참신한 아이디어는 여기서 쏟아진다. <카오스 이론>도 거기서 나왔다.

 

 쉬는 시간, 노는 시간, 아무 간섭도 받지 않고 아무 것도 않고 빈둥거리는 시간, 일상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한국 학생들의 방학은 공부할 것, 체험해야 할 것이 더 많다.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때 방학은 정말 즐겁게 지냈다.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농사를 많이 거들었고 여름엔 꼴 베기, 겨울엔 나무하기가 의무였지만, 그것은 휘파람을 불면서 후딱 해치우고 실컷 놀았다. 고등학교 대학교도 거의 비슷했다. 책은 읽되 학교 공부와 관련 없는 책을 읽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별 성취는 없지만, 늘 뒤쳐졌지만, 조바심이 나지 않았다. 나름대로 느긋했다. 어느새 50대 중반이 되었지만, 나는 혼자 있어도 전혀 심심하지 않다. 호기심이 끝이 없다. 부화뇌동하지 않는다. 내 나름대로의 생각이 샘솟는다.

 

 한국은 정부가 연구비를 줄 때, 연구자의 땀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피를 요구한다. 피를 말린다. 제안서다, 계획서다, 중간보고다, 중간의 중간보고다, 중간의 중간의 중간보고다, 결과물 아웃라인 제출이다, 결과물 예비제출이다, 결과물 최종제출이다, 회계 중간보고다, 회계 최종보고다, 하여 시집 못 가고 죽은 달걀귀신처럼 시시콜콜 간섭한다. 정작 연구자는 연구에 집중하는 시간보다 정부의 잔소리에 대비하는 시간이 더 많다. 그렇게 연구자를 믿지 못해서는, 쥐꼬리 권력 휘두르는 맛에 삶의 짜릿한 보람을 느껴서는, 세계적 결과물이 나오기 어렵다. 가끔 국내 학자의 논문이 네이처나 사이언스, 셀 등에 얼굴 논문으로 실리는 것은 거의 기적이다. 황우석 사건도 아마 정부의 피 말리는 잔소리 문화가 한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느긋하게 기다렸으면, 줄기세포 분야에서 한국이 틀림없이, 설령 그가 아닌 사람에 의해서도,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2010. 7. 29.)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