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떠나서 하는 4대강 논쟁의 虛妄함

帝王學談論/選擇의 岐路 (帝王學談論 2010.7.8.木) (恒山硏究室 恒山 金 裕 赫)
主題417호: 選擇의 岐路

사람의 일상적인 행동은 兩者擇一過程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양자 중 택일은 사회적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여겨진다.
왜냐하면 社會的 事象(social phenomena)이란 相對性을 價値分化의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기 쉽게 예시한 맹자의 글귀를 인용해서 설명할까한다.

맹자는 말하기를, 생선도 내가 좋아하는 것이며, 곰발(熊掌)도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 중 한가지만 취해야 한다면 생선을 버리고 웅장을 선택할 것이다 (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마찬가지로 내가 살기 위해서는 목숨도 버릴 수 없으며, 정의도 또한 버릴 수 없다, 그러나 목숨과 정의를 다 보존할 수 없다면 내 목숨을 버릴지언정, 정의는 버릴 수 없다고 하였다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

여기에서 시사하는 명백한 사실은, 사물을 선택하는 과정에서는 그 사물이 지니는 價値性을 기준으로 하며, 生과 死를 선택해야하는 과정에서는 떳떳하고 명예롭게 삶을 영위하기 위한 道義性을 기준으로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岐路의 분기점에서 선택을 결정하는 기본적인 가치는 곧 義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가 義理 없는 귀신이 되지 말라(莫作人間無義神)는 안중근 의사의 詩句와, 義를 보거든 목숨을 던져라(見義授命)는 교훈도 이와 상통한다.

선택이란 결국 양자택일일 수밖에 없는바, 그 양자라는 두 개 이상의 대상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단순한 取와 捨의 문제가 아이다.
왜냐하면 생선이냐 웅장이냐 하는 경우처럼 비교우위적인 것을 선택해야할 때도 있지만, 두가지 모두를 선택해서는 안 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생선도 도적놈의 장물이요, 웅장도 도적놈의 장물일 경우에는 양자택일의 정당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그 하나가 지니는 唯一不變의 가치성이 무엇인가를 인지할 수 있어야한다.
공자는 말하기를 “하늘은 사람에게 있어서 유일신이다(天是人之唯一神也)” 라고 하였다. 즉 하늘이란 최고의 이치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치에 맞는 것은 모두가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치는 사물이 존재하는 근본이요 원천에 해당한다.
중용에서는 본립도생(本立道生)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거니와 이는 이치가 바로 서면 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모든 사물은 스스로 존재하기 위한 법칙을 지니고 있다하여 이를 유물유칙(有物有則)이라한다.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사물을 다룰 때 원리원칙에 입각하여 최선의 방법을 선택해야한다는 것을 귀띔해준다.

지도자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일수록 근본가치에 해당하고 원리원칙에서 벗아나지 않는 개념의 그 하나를 선택할 줄 아는 고차원의 판단능력과 식견을 지녀야 한다.그 이유는 지도자로서 선택한 길은 그것이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설득려을 지닐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율곡 선생이 이퇴계 선생을 처음으로 예방한 것은 이퇴계선생이 58세요. 이율곡선생이 23세 때이었다. 35년이나 연령차이가 나는 노학자와 한 청년학도의 만남이었다. 이율곡은 도산서원으로 찾아가 이퇴계 선생을 배알하기 위하여 시 한수를 써서 전해 올렸다. 소자구문도 불투반일한(小子求聞道 不偸半日閑)이라, 즉 소자가 선생님께 도를 청해듣고자 합니다. 반나절 이상은 시간을 뺐지 않겠습니다. 라고 아뢰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두 분은 만나게 되었는데, 반나절이 아니라 2박3일간 자리를 뜨지 아니하고 토론이 계속 되었다. 그 때 토론의 主旨는 주일무적(主一無適)이었다.
즉 一을 主元으로 하면 더 나갈 곳이 없다는 뜻이다.
一은 곧 하늘이요 理致인 것이다.
그리고 도덕적으로는 敬이 곧 一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퇴계 선생의 철학을 敬의 철학이라 일컫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두 분이 장시간의 토론을 통해서 공감했던 것도 이일기만수(理一氣萬殊)이었다. 즉 이치는 하나로 통하고 기질은 각각 다르다는 뜻이다.
이기일원(理氣一元)이냐 이기이원(理氣二元)이냐 이기일원적이원(理氣一元的二元)이냐 하는 것도 이일기만수론(理一氣萬殊論)으로 귀결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양자택일과정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 를 구별하기 위한 가장 원천적인 기준은,
첫째는 하늘로 통하는 천리(天理:攝理)요,
둘째는 사물로 통하는 사리(事理)요,
셋째는 도의적으로 통하는 경의(敬義:敬內義外)이어야 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천리(天理:攝理)는 우주의 질서정연한 운행을 보증하는, 인간이전의 상황이요, 사리(事理)는 인간에 의한 관리를 요하는 객관적 세계의 상황이다.
그런가하면 경의(敬義)는 인간이 스스로를 통제하는 자율세계의 덕목이다.
때문에 인간이 천리를 어기면 용서를 받을 길이 없고,
사리를 어기면 시비에 휘말리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 처신함에 있어서 경의를 잃는다면 상도(常道)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선택의 논리로서 정의할 수 있는 것들이다.

5를 선택할 것이냐? 6을 선택할 것이냐? 하는 것은 양(量)의 다과(多寡)를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5가 善이냐/ 6이 善이냐? 하는 것은 양과는 별개의 개념으로서 선악(善惡)에 관한 문제다.
그리고 5를 좋아하느냐? 6을 좋아하느냐? 하는 것은 선악의 개념이 아니라 호오(好惡)의 문제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5가 옳으냐? 6이 옳으냐? 하는 것은 호오(好惡)의 개념이 아니라 시비(是非)에 관한 문제다.

5와 6을 놓고 양자택일함에 있어서 양의 다과냐? 선악이냐? 호오냐? 시비냐? 하는 최소한 4가지 차원의 관점에서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요구에 부닥치게 된다. 그 4가지 차원의 것은 V 자 개념의 상대성을 지닌다.
그러나 그것을 Y 자 개념으로 발전시켜보면 V 밑에 I 자가 있다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5라는 것도 I의 분화현상(分化現象)이며 6이라는 것도 I의 분화현상이기 때문에 5와 6이 각각 발원점(發源点)으로 되돌아간다면 5도 6도 모두 I 로 내포된다.
그럼으로 양자택일의 선택은 V 라는 기로에서 할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Y 의 기초위에서 선택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Y에는 天理와 事理와 敬義의 개념이 응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退栗討論에서 주제가 되었던 주일무적(主一無適)의 I은 모두에게 더욱 통용될 수 있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작금에 정가 일우에서는 4대강개발문제를 놓고 일부 야당계 도지사들이 찬성했다 안 했다 하는 문제에 관하여 정당차원의 정쟁발언을 계속하고 있다.
한 가지 고소(苦笑)를 자아내는 것은, 현장의 도지사들은 찬성한다고 의지를 밝혔는데 중앙당 측에서는 찬성한 것이 아니라고 역설하고 있다.
찬성하다고 말을 한 사람이 있고, 그 말을 부정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바,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국민들은 빈축을 터트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한 정당 내에서 그 같은 엇박자가 드러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4대강 개발의 본질은 물(水)에 있다. 그런데 반대하던 사람들은 물은 보지 아니하고 소요예산이 어떠니, 당론이 어떠니 하고 물 이외의 이슈만을 가지고 논쟁해왔다.
그러나 현지 행정책임자인 도지사로 부임해서 물을 보니 반대해서는 안 될 일임을 깨달은 것이다. 江域 개발 찬반문제를 물을 제쳐놓고 왈가왈부한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현지의 주민들 앞에서 다시는 들어내지 안 했으면 한다.
그리고 선택은 기로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 단계에서 해야 한다는 것도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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