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같은 사람에게 장교 계급장을 준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이십대 광주의 육군 보병학교에서 함께 훈련받았던 동기들 몇 명이 역삼역 근처의 참치 집에서 모였다. 대충 40년 전이었던 그 시절 우리들은 대부분은 고시공부를 하다가 군복무의 데드 라인에 걸려 장기 법무장교 시험을 치르고 군에 입대했었다. 10년을 복무하면 변호사 개업을 할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당시 나는 간이 나빠져 오전부터 피곤에 절어 절간의 뒷방에 누워 있어야 했다. 더 이상 공부하기 힘들다는 생각이었다. 계속 연기하던 군복무도 내게 다가오는 쓰나미였다.
그 순간 장기 법무장교라는 밧줄이 앞에 있어 정신없이 그걸 잡았었다. 군에서 법무관 부족을 채우기 위해 5년 만에 시행하는 시험이었다. 입시로 비유하면 일차에서 떨어지고 이차시험에 간신히 합격해서 이류 학교에 들어간 것 같았다. 중학입시 때도 그런 적이 있었다. 명문중학교를 들어가기 위해 밤잠을 자지 않고 공부했다. 그러다가 합격하지 못했다. 그러다 버스 안에서 내가 소망했던 학교의 교복을 입은 친구들을 보고는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썩어가는 다다미방에 누워 천정의 파리똥 자국을 보고 암담했던 경험이 있었다. 뭐든지 단번에 세상을 쉽게 달려갈 수 있는 안정적인 레일 위에 오르는 일이 없었다. 대학입시 때도 그랬다. 내 성적은 가고 싶은 학과에는 한참이나 미치지 못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안 오르기로 했다.
훈련소로 들어간 우리들은 당시 소수의 정예만을 뽑는 사법고시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합류해서 훈련을 받도록 부대가 편성되었다. 그중 한 사람이 되는 게 그렇게 부러웠던 빛이 번쩍이는 것 같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장밋빛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다. 몸이 아팠던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중대장에게 집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했다. 당시 중대장은 열외로 최대한 쉬면서 지낼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버텨보라고 했다. 나는 엘리트 집단 속에서 고문관이 되었다. 시답지 않은 인간으로 보는 쌀쌀한 눈길이 바늘같이 날아와 박혔다. 바보 같은 미소와 무표정으로 나는 순간순간을 넘겨야 했다. 훈련을 받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흑은 백과의 대비를 통해 더욱 암담한 검은 색이 되는 것 같았다. 자존심 강한 엘리트들은 달랐다. 나중에 법원장을 지낸 그중 한 사람은 형제들이 모두 천재라고 소문이 난 명문가였다. 그는 운동신경은 부족한 것 같았다. 절벽에서 도르래에 매달려 다른 절벽으로 하강하는 도르래를 잡고 내려가는 훈련을 받을 때였다. 조교는 그의 행동을 보더니 다칠 것 같다면서 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반발했다.
“다른 사람이 다 하는데 왜 내가 못하겠소? 할 거요.”
그는 고집을 피우고 절벽에 걸린 도르래를 잡고 하강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그는 속도 조절을 하지 못하고 반대편 종착점 바위에 발을 부딪쳐 뼈가 부러졌다. 다음날부터 그는 목발을 짚고 고문관 대열에 함께 했었다. 그런 팽팽한 자존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장소이기도 했다. 비록 훈련기간이지만 거기서 고문관이 되면 평생 좁은 법조계에서 시답지 않은 인간으로 평가된다고 하면서 그들은 조심했다. 한순간 인간에 대한 평가가 나중에 대법관이나 장관이 될 때 결정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것 같았다. 그게 엘리트 사회의 한 단면이기도 했다. 나는 그 속에서 쓰레기 같은 위치가 되어 최고 엘리트 집단의 내면을 속속들이 들여다 보고 있었다. 내무반의 옆에 있는 사람이 나를 보면서 이상하다는 듯 이런 말을 했다.
“너 같은 사람에게 장교 계급장을 준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그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천재 소리를 듣고 자란 사람이었다. 고시도 별 무리 없이 바로 합격했다. 말하는 그의 표정에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천재는 보통사람의 무능을 이해하지 못할 뿐이었다.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겉으로는 히죽 웃었지만 여린 마음은 칼에 베인 것 같이 피가 흘렀다. 그는 내가 가장 가지고 싶던 걸 소유한 사람이었다. 훈련이 끝나고 나는 동기생 한 명과 함께 배속된 군단사령부에 가서 첫 근무를 하기 시작했다. 같이 근무하던 옆자리의 법무장교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같은 중위 계급장을 달았다고 같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그는 나의 위치를 명확히 각인시켜 주었다. 그는 지도하는 입장이라는 얘기였다. 맞는 말 같기도 하고 맞지 않는 말 같기도 했다. 그는 우리 방에 들른 헌병장교에게 이렇게 그와 나와의 차이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었다.
“나는 잠시 복무를 마치고 나가서 판사를 하고 법원장이 될 사람이지만 여기 엄 중위와 박 중위는 그냥 군의 장기 복무 장교일 뿐이예요.”
그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옆에 있는 짝퉁 같은 나의 존재가 불쾌했는지도 모른다. 동기생인 박 중위도 비슷한 처지였다. 훈련시절 함께 보초를 설 때 그는 가난한 지방대 출신이라고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았다. 초급장교 월급으로 그는 하숙을 하기에도 힘이 든 것 같았다. 그와 나는 부대 내의 사병막사 옆에서 같이 지내기도 했었다. 그는 얼마 후 부대 앞 논바닥에 블록으로 움막 같은 집을 지어 그곳에서 묵기도 했다. 그는 윗사람에게 철저히 순종하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도 한계가 있었던 것 같았다. 그가 어느 날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기는 제대해서 판사가 되고 법원장이 되고 출세할지 몰라도 너무 무시하고 차별하는 게 화가 나서 사무실 문을 닫아걸고 내가 울면서 항의했어. 너만 사람이고 우리는 사람이 아니냐고”
그 다음해 우리는 같은 날 최전방 철책선 지역의 나란히 있는 사단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마장동 버스터미널에 가서 시외버스를 타고 북쪽을 향해 눈 덮인 들판 길을 한없이 올라갔다. 차별은 곳곳에 존재했다. 군의 지휘관들은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바로 법관이 될 사람들만을 요청했다. 우리들은 최전방 철책선 지역으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들은 나름대로 그런 차별을 견디어 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나와 같은 감정을 가졌던 박 중위는 군에서 보내주는 미국유학을 가서 박사와 미국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국내 대학에 가서 다시 법학을 보다 깊게 공부하는 동기도 있었다. 긴 군대생활에서 나름대로 차별받지 않는 탈출구를 찾기 위해 다시 고시에 도전하는 친구도 있었다. 나도 중간에 사법시험을 쳐서 긴 군대생활의 중간에서 튀어나와 개인법률사무소를 차렸다. 군 장교생활도 여러 가지 장점이 있었다. 인내하면 장군이라도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제복을 입는 규제된 생활이 맞지 않았다. 엘리트들의 마음에 한번 낙인이 찍히면 평생 그게 나의 흉터로 남은 것 같았다.
여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 항소심 법정에서였다. 재판장이 광주 보병학교 시절 같이 훈련을 받던 우수한 사람이었다. 그는 법무관으로 제대를 한 후 사법부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주변의 변호사들은 그가 진행하는 재판부로 가면 혼이 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제왕처럼 법대에 높이 앉아서 재판을 받는 사람들을 질책한다고 했다. 그 시절 서슬이 퍼렇던 판사들의 모습이기도 했다.
“도대체 이게 뭡니까?”
그가 재판장석에서 손에 내가 쓴 항소이유서를 흔들며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나는 그의 눈빛에서 의도적으로 나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린 것을 느꼈다. 아니 그보다 더 못했다. 그는 고문관을 하던 나를 기억하고 내가 쓴 항소이유서까지 철저한 무시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취지를 썼는지 모르겠는데 말이야.”
아이는 돌을 던지는 게 장난일 수 있지만 개구리는 죽을 수 있다. 방청석에 의뢰인이 있는 앞에서 하는 재판장의 그 한 마디는 담당 변호인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말이었다.
그들의 뇌리에 한번 찍히면 다시 일어설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와의 희미한 인연을 기대하는 마음의 끈을 속에서 스스로 툭 잘라버리면서 말했다.
“무슨 취지인지 재판장께서 모르시겠습니까? 저는 여덟 자로 압축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 네 자로까지 줄여서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그게 뭔데요?”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상.참.작.바.랍.니.다. 라는 여덟자입니다. 존댓말을 빼죠. 정.상.참.작. 네 글자면 충분하네요.”
나는 법대 위에 있는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눈빛과 눈빛이 부딪쳤다.
“넘어 갑시다.”
그가 그렇게 말을 하고 재판이 끝이 났다. 그들은 법원장이 되고 검사장이 되고 대법관이 되고 민정수석이 되면서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사십 년 세월이 흘렀다.
어느 새 모두들 기나긴 인생길의 산과 바위를 넘고 강을 건너 모든 게 거의 끝이 난 육십대 중반의 노인이 되어 조촐한 음식점에 다시 모인 것이다. 법무장교 동기생들 중에는 긴 군 생활을 인내하고 장군들이 되기도 하고 국내 유명대학의 교수가 되기도 했다. 군 생활중 사법고시를 쳐서 합격하고 난 후 법원장이 되고 대법관이 된 동기생도 있었다. 변호사 개업을 한 후 대형로펌의 대표로 활발히 활동을 하는 친구도 있었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살다보니 인생의 장거리 경주에서 모두들 결승점을 무사히들 통과한 것 같았다. 세월의 강물 위에 모든 기억들이 흘러가면서 아름다운 추억으로 변해 있었다. 이런저런 덕담들을 나누다가 아직 국내 대형로펌의 현직 대표를 아직 맡고 있는 동기생이 맑은 노란빛의 백세주로 입을 축인 후 말했다.
“우리가 38년 전 9월3일 입대해서 유격훈련을 갔을 때 말이야. 우리들 기를 죽이려고 조교가 제일 먼저 이단 옆차기로 우리중의 한 사람을 질러 나가 떨어졌잖아? 그게 송민식이었어. 그때 그걸 보고 김대권 후보생이 바로 나서서 우리 모두 유격훈련 보이코트 한다고 선언했었지.”
기억력들이 대단했다. 대형 로펌의 대표로 있는 그는 어릴 적부터 ‘공부 선수’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훈련 첫날 머리를 깎은 후 내게 진주낭군가를 가르쳐 주었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그 때 이단옆차기를 당한 송민식의 삶의 행보가 특이해. 송민식은 내 고교 1년 선배인데 우리 시절 사법 행정고시 양과를 소년 등과했으면 대단한 거잖아? 미남이고 머리가 총명한 건 말할 것 없고 거기다 인품도 괜찮았어. 판검사를 거쳐 정계에 나가 두각을 나타낼 줄 알았어.”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속칭 고문관으로 취급되면서 외톨이가 되어 구석에 있을 때 그가 말없이 보내주던 미소가 따뜻했었다. 말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 천재기질 송민식 선배는 정말 이 사회에서 번쩍거리는 지위에 앉을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판검사를 하지 않고 변호사도 잠시 하다가 때려치웠어. 그리고 철학에 대한 책을 쓰겠다고 하면서 일찍 골방에 틀어박혔어. 한번은 책을 썼다고 하면서 나한테 발행된 책을 스무 권쯤 가져다 주더라구. 내가 한 부를 가지고 나머지를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지. 피드백을 하려면 내가 읽어야 하잖아? 그런데 몇 장을 넘기지 못하겠는 거야. 내가 차원이 낮은 범인(凡人)이라 그런지 몰라도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는 거야. 내가 책을 나누어준 다른 친구들도 도저히 못읽겠다고 하더라구. 그 책을 쓴 송민식은 그 다음에도 세상에 나오지 않고 소식이 없어졌어. 부인이 약사라고 했는데 부인이 벌어서 먹고 산 것 같아. 이제 우리 모두 육십대 중반의 노인이 됐는데 천재급이었던 송민식도 이제는 반짝하기는 틀린 거잖아? 대단한 인물이었는데 말이야.”
보석 같은 인물이라고 꼭 세상 무대에 서야 하는 것일까. 세상은 이 나이에도 알 수 없는 게 많았다. 이십대 중반 차별에 대항해 싸우고 눈물을 흘렸던 동기 박 중위는 어느새 보석이 되어 있었다. 그는 군에서 육군 소장까지 했다. 군 생활을 마친 그는 잠시 중견로펌의 대표를 하다가 국제사법재판소의 형사재판관이 됐다. 케냐에서 십여 년간 재판관 생활을 하다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있는 국제사법재판소로 옮겨 근무하고 있었다. 국내 우수한 법관들도 가지 못하는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그가 잠시 귀국해 동기생 모임에 참석해 있었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박 장군, 광주 보병학교나 군단사령부에 근무할 때 우리가 하던 말 생각나지? 차라리 탈영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었지. 그런데 장군이 되고 국제 형사재판관까지 성공하게 된 비결을 얘기해 보지.”
젊은 시절 같이 고생을 하던 인연은 서로 간 마음의 창을 활짝 열어놓게 하고 있었다. 그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군대생활을 할 때부터 아래로 내려가고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훈련시절부터 흙수저 출신이었던 우리들이 불공평한 처지를 자각하고 그대로 인정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 내가 그동안 국제형사법정의 법대 위에 앉아 있어 보니까 재판을 받으러 오는 전범들보다 내가 더 아래에 있다는 생각이 들더구만. 나름대로 자기 나라에서는 최고의 권력자들이었잖아? 내가 낮아지고 없어져서 더 이상 존재가 없어질 정도가 될 때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나를 들어 올려 주시더구만. 그렇지 않으면 나 같은 흙수저가 어떻게 별을 두 개나 단 장군이 되고 국제형사재판관이 되겠어?”
그의 겸손은 위장하거나 불순물이 섞여있지 않는 진정한 겸손이었다. 그는 겸손이 강점이었다. 훈련받을 때부터 철저히 겸손했다. 교만한 동기생들에게도 그는 친절했다. 군대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삶은 온유와 겸손 그리고 길고 긴 인내의 생활이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복을 내리시는 게 틀림없었다.
그 자리에는 장군을 하다가 전역한 다른 동기생들도 있었다. 금수저 출신보다 인내를 가지고 불가마를 견뎌온 흙수저들이 결과적으로 더 훌륭하게 되는 것 같았다. 부유하거나 명문대 출신보다 가난하면서 일류대학 출신이 아닌 사람들이 더 잘된 것 같기도 했다.
고시공부를 하다가 형편상 법원직원이 되고 거기서 다시 군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교가 되었다가 장군으로 전역한 동기생이 있었다. 초급장교 시절 오토바이를 타고 전방의 시골 읍 부근에 있던 그의 집으로 더러 놀러갔었다. 군부대에서 제공하는 바라크 집이었다. 그 역시 공부하며 길고 긴 인내의 세월을 보냈다. 앞에 앉아 있던 그가 이렇게 말했다.
“딸을 시집보내는데 말이야. 사돈집에 이것 저것 사보내면서 생각해 보니까 평생 나를 위해서는 한 번도 돈을 써 본 적이 없는 것 같았어. 그래서 갤럭시 매장에 가서 여기서 제일 비싼 자켓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이백만 원이라는 거야. 그래서 그걸 샀지. 이제는 나도 내 몸을 사랑하기로 했어. 그런데 그걸 입고 어디 갔다가 커피가 한 방울 떨어져서 얼룩이 지니까 신경이 쓰이더구만. 그래서 편한 싸구려 옷으로 다시 입고 다녀.”
인생은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이었다. 초창기에 누가 더 빨리 달리느냐보다 자기와의 싸움을 하면서 끝까지 완주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았다. 젊은 시절은 누가 금수저인지 아닌지 출세를 했는지 못했는지 부러워하고 질투도 했었다. 세월이 지나보니까 그런데 모두 무상한 것이다. 별게 아닌 것 가지고 도토리 키재기를 하고 울고 웃고 했었다. 몇 년 전 뜬금없이 전화가 왔다. 처음 군대생활을 할 때 차별을 한다고 내가 감정이 상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고등법원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옛날에 같이 지내던 추억이 불쑥 떠올라서 전화를 걸었어요. 한번 놀러 와요. 맛있는 밥을 살게.”
그의 말에는 정이 듬뿍 담겨있었다. 그는 자신의 옛날 일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이란 그런 것이다. 알았다면 그런 차별을 느끼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아니라 내가 열등의식으로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고마워요. 한번 찾아가지 뭐.”
마음 속 깊은 곳의 어두운 곳으로 빛이 확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삶의 매듭을 풀어버릴 때인가 보다.
우연히 길에서 훈련시절 내무반 옆에서 자던 사람과 만났다. 그는 오랜 판사생활을 마치고 노년을 자유롭게 사는 것 같았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훈련시절의 얘기를 한 마디 했다.
“내가 고문관을 할 때 너한테도 장교 자격을 주는게 이상하다는 말이 가슴에 박혔었는데…”
내가 그 말을 솔직히 꺼냈다.
“내가 그런 말을 하다니. 내가 그때 제정신이 아닌 놈이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정말 미안해요.”
그가 깜짝 놀라 말했다. 이제는 모든 매듭을 풀고 화해를 하는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요즈음 장례식장이나 묘지를 가면 죽은 사람들을 소개하는 화면이나 묘비를 보면서 묘한 생각을 한다. 살았을 때는 지위나 재산이 사람들을 수없이 많은 종류로 갈라놓는데 죽으면 그 모든 게 태어난 날과 죽은 날 사이에 끼어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영혼들이 하늘에서 모여 삶을 사는 동안 즐겁게 놀지 못하고 너무 쓸데없이 심각했다고 폭소를 터뜨린다는 것이다.
광주 보병학교의 고문관
- 엄상익(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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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29, 22:59












여기저기서 엄변호사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무료로. 강송식선생님이 미혼시절 우리고등학교에서 영어시간에 해리벨라폰테의 베네주엘라를 가르쳐주시던 기억과 겹쳐 엄변호사님을 오래전부터 기억하고 있지요. 참 경성방직 김연수사장님 재판이야기 책 2권은 여기에서 유료구입했었습니다.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교훈이 되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 흔치 않은대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내면의 아름다움이 태양처럼 제 마음에 비춰 따뜻해 집니다
오늘 선생님의 글을 본것으로 하루가 즐거울거 같습니다
부디 건강하시어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좀더 듣게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