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장교와 종군기자가 합작으로 만든 날조를 스탈린 정권은 진실을 알고도 은폐헸다.
<기자와 함께 한 거짓의 위력과 그 끝>
북한에서 아주 감명깊게 읽은 소련 책이 있다. 그 감명이 잊혀질세라 일기장에 역력하게 남겨놓기까지 하였다. 남한에 와서도 이에 대해 높히 평가한 글을 쓰기도 했다. 책 제목은 <월로꼴람스크 대로(大路)>이다. 여기서는 영어식으로 <볼로꼴람스크 대로>이다. 볼로꼴람스크는 모스크바로 향한 주요대로인데 소독(蘇獨)전쟁 당시 이곳에서의 전투가 책 내용이다.
책은 머리말부터 박력있고 매력이 넘친다. 주인공인 장교는 기자보고 책상에 손을 올려놓으라고 한다. 거짓을 쓰면 단호하게 잘라버리겠다고 한다. 이렇게 진실만 쓴 책으로 북한에서부터 남한에 온 지 25년째 철석같이 믿고 있었지만 거짓으로 드러났다. 이는 1947년부터 조사하여 1948년에 완성한 소련정부 문서가 보여준다(*참조-나무위키)
이 거짓의 주모자는 바로 거짓을 쓰면 손을 자른다고 큰소리치던 장교의 진짜 모델인 파필로브 사단의 정치장교 세르게이 예고로프로와 크라스나야즈베즈다(Красная звезда, 붉은 별)지 종군기자 바실리 코로테예프(Василий И. Коротеев)였다.
이 기사는 당시 스탈린의 눈길을 끌었고 대대적 선전, 그 유명세로 70년이 지난 현재 영화로 제작될 정도이다. 이 영화 <판필로프 사단의 28인 용사>는 유투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화는 28인 용사들이 독일군 전차 18대 파괴, 800명 사살하고 전원 전사(전과는 뻥치기 하고 6명 생존, 그 중 반역행위자도 있음), 이처럼? 막심한 피해를 입은 독일군은 소련군 규모를 과대평가하고 퇴각, 덕분에 시간을 벌어 모스크바 사수에 크게 이바지하였다는 것이다. 영화가 아무리 유명해도 사기치는 영화가 되었다.
이보다 더 흥미롭고 놀라운 것은 날조라고 1948년에 밝혀졌는데도 묵과되어, 기념 군상과 공원까지 조성되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스탈린과 소련당국은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던 것이 거짓이라고 하기에는 그 후과가 좋지 않다고 보고 입막음을 하였던 것이다.
이런 사실이 노출된 것은 영화의 유명세 덕분에 진가(眞假) 논란이 일자 이를 잠재우기 위해 러시아 정부가 옛 문서를 공개하여 버린 것이다.
이 사건을 보며 대북전단 관련하여 생각해본다. 이른바 민간 대북전단의 원조로서 지켜본 바로- 기자와 함께 한 거짓의 위력과 그 끝을 논하게 된다. 꽹과리 치는 화려한 대북전단이 나타나자 강력한 자석에 끌리듯 기자들이 모여들고 진가를 떠나 떠들어댄다.
진가보다 기사감으로 제격인 것이다. 이 구미에 맞추어 더더욱 신나서 자극적으로 꽹과리친다. 결과 노벨상 다음이라는 하벨상을 받았고 대북전단하면 누구라고 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이것은 <대국민사기극>이라고 국회의원이 나서 구체적 근거로 밝혀도 별 지장없이 지속되어 오늘에 이른다.
사기에 대한 손절은 고사하고 그 유명세에 결국 보수우익은 물론 국회의원들도 얼굴을 함께하며 정의로 감싸안는 형국으로 굳어져 버렸다.
기자와 거짓의 궁합 결과는 <북한인권법>은 <삐라돕는 법>이란 누명을 쓰게 한다. 북한인권법은 미국, 일본에서 무난히 통과되었지만 정작 남한은 10년째 표류, 현재 통과되었어도 유명무실한 상태이다. 심지어 30살짜리 여자의 하명을 받아 <대북전단반대법>이 통과되었다. 여기까지 거짓의 위력함이 있다. 그 끝이 어딜까 지켜보아야 한다.
---------------------------------------------------------------
[참고자료]러시아 정부 기록과 관련 내용(나무위키)
2015년 기밀문서 공개로 밝혀진 진실
판필로프 사단의 28인 이야기는 전후 많은연구자들에 의해 그 신빙성이 의심된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러다가 판필로프의 28인 영화가 제작에 들어가고 다시금 논란이 커지자, 러시아연방 국립문서보관소는 2015년 7월 8일에 아예 의혹에 쐐기를 박는 기밀문서 스캔본을 인터넷으로 공개해버렸다.
이 문서는 1948년에 소련 최고군사검찰에서 판필로프 사단 28인 이야기의 진위 여부를 내사한 보고자료이다. 이 보고자료에서 소련 군사검찰은 공식적으로 이 영웅담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으며, 종군기자가 불확실한 카더라를 듣고 꾸며낸 소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내사가 이뤄진 계기는 1947년 11월, 하리코프 지방군사검찰청에 이반 도브로바빈(Иван Е. Добробабин)이 체포되면서부터였다. 이반 도브로바빈은 대전 중 독일군에게 부역(附逆)한 혐의를 받고 있었는데, 취조과정에서 자신이(당시 모두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던) 판필로프 사단의 28인 중 한 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전사한 게 아니라 11월 16일에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이후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해 독일군에게 점령된 고향(페레코프)으로 돌아갔음을 밝힌다.
그러나 계속된 조사 결과, 도브로바빈은 단순히 귀향에 그치지 않고 독일군에게 적극 협력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보조경찰대에 들어가 파르티잔 소탕전 및 강제노동인력 징용 등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다가 전세가 역전되어 우크라이나가 해방되자 다시 재빨리 소련군에 입대해 부역 사실을 감추려 했다.
소련 인민영웅이 멀쩡히 살아 부역행위까지 했다는 사실은 상당히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고, 자칫하면 체제 기반을 흔들 수도 있었다.
이에 소련 군사검찰은 조사 범위를 판필로프의 28인 영웅담 전체의 진상 조사로 확대하고, 니콜라이 아파나셰프(Николай П. Афанасьев) 중장을 책임자로 전면 내사에 들어갔다.
우선 해당 부대의 상급부대인 제1075연대 연대장이었던 일리야 카프로프(Илья В. Капров) 대령을 소환 조사하였다. 결국 카프로프 대령은 두보세코보에서 독일군 제11기갑사단과 격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28인과는 무관한 전투였음을 시인하였다.
계속된 조사 결과, 이 영웅담을 처음 취재, 보도한 《크라스나야즈베즈다(Красная звезда, 붉은별)》지 종군기자들마저 뒤늦게 날조 사실을 실토했다. 종군기자 바실리 코로테예프(Василий И. Коротеев) 등이 이 이야기를 처음 접한 것은, 이반 판필로프가 사단장이던 제316소총병사단의 정치장교 세르게이 예고로프로부터였다.
당시 제316소총병사단은 11월 18일에 사단장 이반 판필로프(Иван В. Панфилов) 소장이 전사하고 제8 '근위(혹은 친위) 판필로프' 사단의 칭호까지 얻으면서[3] 갖가지 무용담이 도배된 선전이 이뤄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예고로프는 11월 24일에 사단 사령부를 방문한 기자들에게, 판필로프 사단 소속 병사들이 독일군 전차 54대의 공격을 맞아 항복하자는 2명을 처단해가면서 최후의 1인까지 용전분투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 들었다고 떠벌렸다. 그러나 정확한 소속부대, 전투원 수, 전과는 물론 전투가 벌어진 날짜와 장소까지 기사에 필요한 디테일이 하나도 없었다.
이에 《크라스나야즈베즈다》지 기자들은 적당히 병사 숫자부터 28명(원래 30명 중 2명을 즉결처형하고 남은 인원)으로 맞추고, 이 숫자에 맞게 전사/실종자 명단에서 이름을 추려내었으며, 전과도 독일군 전차 18대를 격파하고 800명의 사상자를 입혔다고 부풀려서 영웅담을 창작해냈다.
이 기사가 11월 27일자로 《크라스나야즈베즈다》 지에 실리게 되자, 스탈린까지 관심을 갔고 호평하는 바람에 이야기는 점점 더 부풀려졌다. 처음 나간 기사에서는 28명만 싸웠다고만 하고 날짜와 장소는 대충 얼버무렸으나, 1942년 1월 22일의 후속 기사에서는 이 전투가 11월 16일에 두보세코보에서 있었다고 쓰고 갖가지 무용담을 추가로 창작해냈다.
이들은 당시 절박한 전황 속에서 소련 국민과 장병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이야기를 꾸며냈다고 자백했다.
또한 조사단은 전사했다고 알려진 28인의 행적을 샅샅이 추적한 결과, 도브로바빈 이외에도 사실 5명이 더 생존해있음을 밝혀냈다. 당시 혼란스러운 전황 중에 문서상으로는 실종자로 분류되어 있었으나, 실은 살아있던 사람들도 많았던 것이다.
이중 다닐 쿠제베르게노프(Даниил А. Кожубергенов)는 1942년에 적전 도주 죄목으로 NKVD에 체포되어 형벌 부대에 넘겨진 전력까지 있었다. 이들 생존자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영웅담에서 언급되는 전투 현장에 있지도 않았다는 증언까지 했다.
이러한 조사 내용을 종합하여 아파나셰프 중장은 판필로프의 28용사 영웅담이 완전히 날조된 것이라고 결론짓고, 보고서를 소련 정치국의 안드레이 즈다노프에게 제출하였다.
워낙 충격적인 내용이었기에 즈다노프는 이를 스탈린에게까지 보고하였다. 그러나 소련 수뇌부는 이미 대전 중에 대대적으로 선전된 이 영웅담을 철회하는 것은 민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결론을 내리고, 진실을 은페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아파나셰프 보고서는 기밀로 봉인되었으며, 관련자들에게는 철저한 입단속 조치가 내려졌다.
독소(獨蘇)전쟁 '판필로프의 28용사 영웅담'은 날조였다
- 이민복(대북 풍선단장)
-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2021-01-19, 11: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