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의 어느 하루에 관한 기록>
정치란 무엇인가?
사람을 지향하는, 가치를 지향하는 공적 활동 아닌가?
사람이 빠져있다면, 가치가 빠져있다면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 수치일 뿐이다!
우리 정치가 외면한 한 '사람', 박원순 위력성추행 피해자의 일상, 목소리가 이 글에 담겨 있다.
<피해자의 어느 하루에 관한 기록>
집을 떠나온 지 두 달, 병원을 떠나온 지 한 달이 지났다. 두 달의 시간 동안 울고, 좌절하고, 절규하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지만 결국 지금 여기에 나는 살아 숨쉬고 있다.
얼마 전 이 동네의 맛집을 찾아갔었다. 지난 번에 갔을 때 입맛이 없어서 남겼던 돈까스가 아른거리던 오늘, 엄마와 다시 그 식당을 찾았다. '처음 먹었을 때보다 훨씬 맛있다'는 생각을 하며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나서는 기분이 퍽 상했다.
약봉지를 꺼내 손으로는 잘 뜯어지지도 않는 비닐포장을 이빨로 얼른 찢어내고도 선명하게 보이는 정신건강의학과, 이름 석자, 복용약 목록을 누가 볼까 싶어 얼른 가방에 쑤셔 넣는다.
'얼마나 더 오래 이런 삶을 살아야 할까.' 약에게 고마운 순간도 있다. 테이블에 엄지손가락만한 벌레가 기어가는 것을 보며 환갑이 다 된 엄마가 화들짝 놀라는 순간, 나는 이제 더이상 함께 호들갑 떨지 않는다. 그토록 조그만 크기로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내는 존재에게 위협감을 느끼며 해를 가할 수는 없다.
처음에는 휴지로 살며시 갈 길을 다른 방향으로 놓아주고, 식사를 계속하는 중에 다시 나타난 벌레에 또 한 번 크게 놀라는 엄마에게 "그렇게 놀라는 엄마의 감정이 부럽다"고 말하며 벌레 위로 컵을 뒤집어 덮어 잠시나마 엄마의 불안과 벌레라는 존재를 분리시킨다.
나는 벌레가 두려워 잠시 컵을 덮어놓았다. 이 컵을 들면, 그 벌레는 여전히 살아있을까? 심장마비나 산소부족으로 죽어버렸을까? 아니면 마법처럼 사라져버렸을까? 죽든 살았든 여전히 나는 위협감을 느낄까?
아직 잘 모르겠다. 세상을 향한 불안과 나를 잠시 분리시켜주는 이 약으로 인해 나의 존재가, 나의 상태가 드러나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약봉지를 꼬깃꼬깃 챙긴다.
2020.9.11.
'나는 벌레가 두려워 잠시 컵을 덮어놓았다'
- 김재련(변호사)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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