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無知)한 인민을 깨우쳐야 북한이 변화한다

5년 단기 권력으로 무한 권력자를 대화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눈뜨고 사기 치는 것인가. 박철 사건의 본질은 고리타분한 집단농 체계를 개선하려는 첫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등소평 식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북한 환경에서는 대단한 시도였다.

중국식은 경작지를 가족별로 나누어 주고 생산물까지 처분하는 개인화이다. 이에 비해 <박철 식>은 농민과 간부에 이르기까지 개인별로 경작지를 배분하여 농산작업만 하는 것이다. 즉 농산작업의 개인 도급화이다. 농사 작황으로 헌신도가 표현되기에 평농민보다 간부들이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 간부가 너무 많아, 즉 노는 사람을 없애고 각자 열심히 일하게 하는 것이다.

농업 전문이 아닌 박철이 왜 이 문제를 창안하고 실천하려 애를 썼을까. 지질학 연구원인 그는 직업상 전국을 다니게 되었다. 겸사 본 전국 농촌 현실은 노는 사람이 너무 많고 또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것이다. <쌀은 공산주의>라는 수령님의 교시처럼 중대한 식량문제를 해결할 비책, 즉 충성심이 발동하여 위와 같은 <농장포전 개인책임제>를 제시한 것이다.

훗날 그가 정치범에서 제외된 것은 이러한 순수한 충성심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박철 식>이 기존 식에 비해 혁신적임에도 된서리를 때린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색사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1년 도입한 후인 1986년에 문제 삼았을까. 결정적인 영향은 1986년에 일어난 중국에서의 시위 사건이다. 당시 호요방 당 총서기의 당정 분리운동의 여파로 천안문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당정 분리란 당의 행정지배를 없애 자율과 활력을 추구한 것이다. 훗날 이 문제로 호요방 총서기를 실각시킬 만큼 중국도 그런데 북한은 즉각 경기를 일으킨 것이다.

당의 지배력은 곧 수령의 지배력이다. 또 공산국가의 존재 방식이기 때문이다. 또 군중시위까지 일어나게 한 요소를 절대로 묵과할 수 없는 것이 북한이다. 이제 더는 변화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굳힌 것이 이때부터이다. 사실 북한도 그 이전에 변화를 시 하였었다. 그 첫 시도가 1979년 남포를 특별시로 만들고 국제 도시화하려 했다. 당시 남포농대 연구소에 있었던 필자로서 생생히 기억한다. 김일성은 남포시를 중국의 상해, 홍콩, 싱가포르, 미국의 뉴욕처럼 3년 안에 만들라고 했다. 아마도 1978년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에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또 내부의 완벽한 안정으로 권력 유지에 걱정이 없었다. 1980년 뽈스까(폴란드)에서 바웬사의 노조운동으로 충격을 받았지만 당과 근로단체와의 연계를 강화하라는 지시로서 그쳤다. 1983년에는 그 전에 철칙했던 <해외 합영법> 제출자를 불러 앉혀 이를 허용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8.3 인민소비품 생산운동>을 벌리며 단체별로 장사를 허용하기도 하였다.

선봉지역을 국제 자유무역지대화 하라는 선전과 소문도 자자했다. 1984년 김일성은 동구권을 방문하면서 <벌가리아(불가리아)에서 채소를 팔아 전자산업을 일으킨 혁신>. 로무니아(루마니아)제 찌프, 체코의 뻐스도 구입. 공산권 영화이지만 외국영화도 매주 방영, 단체로 춤도 허용 등 신선한 바람이 부는 것을 느끼기도 하였다.

한편 김정일은 과학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며 논문을 발표하며(1985년) 내적 교시로 남조선의 전자, 자동차 산업의 발전에 대해 언급하기도 하였다. 금방석에 연예인이 아니라 과학자를 앉혀야 한다는 말이 이때 나왔다. 과학자로서 그때 덕은 통행증을 마음대로 뗄 수 있었다고 경험한다.

이러한 배경하에 박철의 <농장포전 개인책임제>도 발산된 것이지만 변화는 여기까지였다. 1986년 <박철 사건>을 계기로 첫 제동이 걸렸고, 죽어도 안 된다고 결심한 것은 1989년이다. 천안문 사태와 로무니아 차우쉐스크 처형 사건의 영향이다.

소련과 동구권이 깨지고 김일성 사망 후 수 백만 북한주민이 굶어죽는 속에서도 <사회주의는 과학이다.>, <나에게 변화를 기대하지 말라!> 이것이 김 부자의 속성 중에 속성이다. 아사의 더미 속에서도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가다피와 후세인처럼 죽지는 않겠다고 최후의 카드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북한의 김 부자 세습과 대화해서 모든 걸 풀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 그들이 조롱하는 말 그대로 특등 머저리인 것이다. 김정일이 루비콘강을 건너왔다고 누구도 재치기 힘들만큼 환상적인 2000년 6.15 정상회담 분위기에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말했다. 아무리 변한다고 해도 중국 같은 개혁개방을 못하는 속성을 지녔다. 북한 인민을 각성시켜 그들에 의한 변화를 하는 것 이상 지름길은 없다. 그런데 현 남한 정권은 어떤가. 말 안 해도 그 결과는 다 알기에 약한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 5년 단기 권력의 표를 얻으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신들의 속성을 보면서도 무한 권력자를 대화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눈뜨고 사기 치는 것인가이다. 사기 치지 않은 위인 정치인, 집단이 언제 생길지 그날을 고대한다.ㅡ

<경제는 자본주의가 맞아(옳아)!> 1985년 당시 내가 있던 과학원의 과학자 사이에서 퍼졌던 말이다. 북한의 철학에도 정치는 경제의 반영이라고 했다. 경제가 옳으면 정치도 옳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이를 <다당제 정치>라고 북한에서는 말했다.

1985년 공산 종주국 소련에서 고르바쵸브의 등장으로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 전인 1978년부터 시행된 등소평 정책의 성공적 진전을 모두 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북한 엘리트들의 고민과 변화의 시도와 무관하지 않다.

북한 엘리트들은 소련과 공산권 붕괴 이전에 깨어있었다. 그 확신은 소련과 공산권 붕괴로 완전히 이루어졌다. 이제 남은 것이 무지한 인민이다. 라디오, 인터넷 없는 유일폐쇄 속에 있기에 무지할 수밖에 없다. 이들을 깨우쳐야 한다.

표가 없는 국민(북한)이기에 남한정치에서 철저히 무시되지만 북한 문제 해결사는 결국 그들이다. 중국과 소련, 공산권 모두 변화는 내부의 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북한도 북한사람에 의한 북한의 변화로 이루어지고 또 이것이 평화통일로 가는 길로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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