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톤 야네기'

정말 고마운 사람들(3)복서의 만고불변 공통언어 “레프트 올리고 턱 붙여” 막스는 공산당선언에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했다. 노동자의 공통언어는 단결인 것이다. 복서(boxer)의 만고불변 공통언어는 “레프트 올리고 턱 붙여”다. 왼쪽 손을 높이 올리고 턱을 가슴에 붙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복싱의 기본자세요 최상의 방어 자세다. 하지만 경기 시간이 흐를수록 왼손은 내려가고 턱은 들린다. 보통 사람은 턱을 가슴에 붙이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그 자세로 경기를 하라고 가르친다. 인체구조가 그렇게 하기 힘든 구조인데 경기를 한다고 하여 그렇게 되겠는가. 더욱이 안 될 뿐이다. 그런데 복싱을 한 탓에 그 자세가 몸에 익은 나머지 그런 모습이 체화되고 굳어진 사람이 더러 있다.

어느날, 덩치가 나(山)만 하면서 턱을 가슴에 딱 갖다 붙이고 걷는 애가 파출소장과 함께 들어와서는 주위를 흘끔거리며 선생님 방에 들어갔다. 행실을 보면 복싱의 문외한인데 자세로 보면 상당한 경지의 복서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긴장감이 흐르고 침묵이 도장을 지배했다. 그 와중에 어느 형님이 “저 새끼. XX동. 급사 새끼인데…” 했다. 웃음과 기침이 침묵을 몰아내고 줄넘기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렸다.

잠시 후 그 아이와 소장이 선생님 방에서 나왔고, 소장은 아이만 남겨두고 갔다. 이내 선생님이 나를 부르기에 갔더니 “너와 너는 친구로 지내라. 나이는 너가 많지만 도장에는 너가 후배다. 그러니 너거는 친구다.” 엿장수도 선배를 겁내는 세상에 나는 좀 떨떠름했지만 그 애는 좋아했다. 앞으로의 일을 아무도 모른 채 구경꾼들의 웃음소리만 맑았다.

그 당시는 구경거리는 물론 오락거리도 귀한 시절이었다 권투방 밖에는 항상 구경꾼이 와글거렸고, 스파링이라도 할 때는 구경꾼이 도장 안에까지 떠밀려 들어오기도 했다. 갑자기 구경꾼들 사이에서 호통소리가 터졌다. 하얀 두루마기를 잘 차려입은 중늙은이가 “이놈들. 여기가 수양하는 곳이지 사람 패는 데냐?”며 고함을 친 것이다. 스파링을 할 때는 보고 배울 사람은 배운다고 침묵하고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친다고 다만 속삭인다. 다른 일에 신경쓸 틈이 없는 것이다. 오로지 두 선수의 숨소리와 치고 맞는 소리만 계속될 뿐이다. 그런 가운데 반늙은이(中老輩)의 야단은 높아만 갔다.

선생님이 참다가, 참다가 나왔던지 호통친 사람에게 “이 새끼야. 이기. 니 도장이가?”라 했다. 이에 그 아저씨는 말 한 마디 안 하고 부리나케 나가버렸다. 선생님은 신체가 정말 장대했다. 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사자가 포효라도 하는 것처럼 울려서 들렸다. 그래서 보통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은 무슨 말을 하는지 잘못 알아들어 대화가 잘 안되었다. 선생님은 단 한번도 구경꾼들에게 소리친 적이 없었다. 그 날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상황을 파악한 형님들이 처음으로 “너희들 돈 있으면 좀 내놓아 봐라” 했다. 몇몇이서 돈을 드렸다. 형님 한 명이 그 돈을 갖고 나가서 막걸리를 사왔다. 그리고 선생님게 드리면서 “선생님 고정하십시오. 저희들의 불찰입니다” 했다. 불찰임이 맞았다.

운동을 먼저 마치고 가는 형님들이 선생님의 “막걸리 한 되 사온나” 하는 말씀을 돈이 없어서 들어 드리지 못했던 것이다. 무슨 일에서였던지 그날은 외상배기로 사 오는 형님도 없었던 것이다. 권투방에 월회비도 안 내고 다니는 사람이 열에 아홉이었던 시절이었다.

병원이 귀하고 그 문턱이 높던 시절에 우리 선생님은 마산 시민의 팔다리를 고쳐 주는 사람이었다. 어깨나 팔이 빠지고, 발목을 접지르거나 뼈를 다친 사람은 모두 선생님에게 왔던 것이다. 막걸리 한 되가 치료비였다. 탁주를 한 잔 자시면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많은 경험담을 애기해 주고, 근엄하면서도 다감한 선생님이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선생님은 의령이 고향인데 모내기철에 서로의 논에 물을 먼저 대려다가 크게 맞는 것을 보고 일본에 가서 권투를 배우고 프로 선수생활을 했다.

그의 별호 '피스톤 야네기'를 모르면 그는 마산 토박이가 아니다. 그 별호 ‘피스톤’이 말해 주듯이 그는 역기나 아령을 절대 못 들게 했다. 스피드 위주의 복싱을 했고 빼어난 아웃복서였던 것이다. 그의 가르침이 한 세대를 건너뛰어 빛을 발한 요즘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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