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민족을 입에 달고 다니는 정치인 중에 제대로 군대에 갔다 온 사람들이 많지 않다.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나는 장교복을 입은 육군 대위 출신이 지휘하는 학생부대의 군인이었다. 엠원 소총을 들고 총검술을 하고 눈을 감고도 총기를 분해 조립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었다. 그리고 우리는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워야 했다. 첫 문장이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였다. 나는 전체주의 독재국가의 한 병사로 키워졌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아무래도 역적 기질을 물려받았던 것 같다. 교장 선생님이 만들었다고 자랑하는 문장인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기 싫었다. 개인인 내가 그냥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때는 저녁에 국기가 내려올 때 멀리 가까이서 차렷 하고 부동자세로 서 있어야 했다. 그때 그냥 내 할 일을 한 적이 있었다. 잠시 후 상급생이 다가와 나의 뺨을 때렸다. 국가관이 부족하다는 의미였다. 그게 시대의 분위기였다.
대학 일학년 무렵이었다. 나는 데모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미팅을 하고 도서관에서 소설 한 권 읽는 게 훨씬 즐거웠다. 그런데 대학에서 시위가 일어날 때면 학생지도부에서는 꼭 나같은 인물을 시위대의 맨 앞에 배치했다. 그것도 도망을 치지 못하도록 스크럼을 짜게 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힘차게 전진하라고 데모 주동자들이 선동했다. 민주화를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그게 된다고 해도 나같이 정치적이지 못한 평범한 집안의 아들들은 별로 달라질 건 없다는 생각이었다. 전문시위꾼들은 국회의원 보좌관자리라도 꿰어차고 정치 쪽을 기웃거리겠지만 우리는 동원된 이름없는 군중의 한 명이었다.
데모 때 보면 벌써 힘 있는 집안과 개뿔도 아닌 집안의 아들은 차이가 났다. 한 친구가 경찰차를 향해 돌을 날려 유리창을 깨다가 검거됐다. 그 친구는 저녁 때 훈방되어 나왔다. 아버지가 국회 위원장이고 여당의 실력자라고 했다. 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던 또 한 친구도 나왔다. 아버지가 은행 지점장이었다. 빽 있는 집, 돈 있는 집 자식들은 다 법의 그물에서 빠져 나왔다. 나같이 맨 앞에 있다가 사진이 찍히거나 잡힌 힘없는 집 아이들은 자칫하면 국가보안법 위반자였다. 석방은커녕 실컷 두들겨 맞고 신세를 조졌다.
병역 문제에서도 있는 집, 없는 집의 자식들 사이에서 차이가 났다. 힘 있는 집 아이들은 병역면제가 많았다. 학교시절 멀쩡하던 친구들이 갑자기 군 복무가 불가능할 정도로 건강이 나쁜 걸 몰랐던 것 같았다. 군대를 가도 방위병으로 집에서 동사무소로 출퇴근을 하든가 서울지역의 편한 부대에 가서 근무를 했다. 나중에 그들 대부분의 진단서가 가짜인 걸 알았다.
나는 가기 싫은 군대를 장교로 끌려갔다. 훈련소에 입소해서 먼지가 풀풀 나는 연병장을 끌려다니면서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나라 지키는 보람에 산다’고 꽥꽥 소리쳐야 했다. 속으로는 나라 지키는 보람보다는 내가 하던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눈이 두껍게 덮힌 전방으로 갔다. 수은주가 영하 이십 도 아래로 떨어지는 휴전선을 밤새 적의 선전방송을 들으면서 순찰을 돌곤 했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안보를 책임진다고 했다. 그냥 닥쳤으니 그 일을 할 뿐이었다. 우연히 군대 생활을 남들의 두 배 이상 했었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당당하려면 군대를 갔다 오고 세금을 내야 한다. 그게 국민의무의 전부라는 생각이다.
기업도 수다를 떨 게 없다. 기업은 이익을 내는 게 목적이다. 열심히 돈을 벌어 세금만 내면 된다. 국가는 그 돈으로 살림을 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면 되는 것이다. 기업보고 사회사업과 공익을 위하라고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본질은 이익이기 때문이다.
나는 변호사업을 하고 재산을 증식하면서 이것 저것 합쳐서 수십억 원은 국가에 세금을 낸 것 같다. 남에게 뒤지지 않게 기부도 했다. 그만 하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맡기 싫었어도 기본적인 국민 노릇은 한 것 같다. 그냥 자기가 선 자리에서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하면 되는 게 아닐까. 국가와 민족을 입에 달고 다니는 정치인 중에 제대로 군대에 갔다 온 사람들이 많지 않다. 나라를 위한다는 의원 중에는 뒤에서 탈세하는 사람도 많다. 껍데기는 가고 알맹이만 남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나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 싫었다
- 엄상익(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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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9, 14:36












나도 대2 마치고 자원해서 군복무 갔고
최북방선 그추운 철원에서 군생활 했지만
군에 끌려갔다는 생각은커녕
총 하나 들고 나라 지킨다고 생각하며
2년3개월 고된 군복무였지만 아예 즐기고자 애썼다.
인생사를 겪고 세상물정 알고 보고 역사의 무게를 겪어보니
국민교육헌장이 얼마나 값진 명문이고 가치가 큰지 깨달아
중고시절 외우고 잊었던 그것을 다시 암기해보기도 하였다.
참고로 국민교육헌장은 서울대 박종홍 교수를 중심으로
각 분야 학자들이 초안을 쓰고 국회 통과해
이를 박정희 대통령이 반포한 거로 알고 있다.
5천년 가난에 찌들고 종살이하던 민족 국민이
새나라 새시대를 한번 염원하며 가보겠다는데
뭐가 그리 문제인가.
삐딱한 넘들이나 삐딱하게 볼뿐이다.
아래 베스트코리아 님의 글과 뜻이 지당하다고 본다.
사람의 생각이 이렇게 극명하게 다를 수 있구나.
나도 군 생활을 꼬박 3년을 했지만 군대에 끌려갔다는
생각은 그 때나 지금이나 해 본 적이 없다. 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에 그것이 억울할 것도 우쭐할 것도 아니란 입장이다.
국민교육 헌장도 그렇다. 난 그것을 외우고 암송 하는 것이 그 때나
지금이나 즐겁고 신나면 신났지 우울하거나 불만인 적은 없다.
5.16 혁명 시 난 서대문 노타리에 있었다. 먼진 몰랐지만 그냥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 같아서 좋아했다. 비록 지독한 가난
때문에 마포에서 서울역으로, 종로로, 청량리로 전차비도 없어서
걸어 다니긴 했지만. 사실 그 땐 그게 부끄럽거나 힘든 건 아니었다.
혁명 후 1, 2년이 지나면서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해갔다.
꿈만 갔았다. 그 많던 깡패들, 넝마주이들은 사라지고, 여기저기
일자리가 생겼다. 소위 가내 공업, 가발공장, 요코공장, 토끼고기
,셈벵이 과자공장, 반지공장, 인형공장....등등 하루가 다르게
더 나은 세계로 변해갔다.
어느듯 세월이 흘러 난 박정희 대통령이 이룬 문명의 덕택으로
그토록 원했던 대한민국의 여권을 쥐고 전세계를 원도 한도 없이
다니며 구경했다. 이 모든 행운을 난 박정희 대통령의 은혜로
돌린다.
결국 난 처음부터 지금까지 박정희 시대를 긍정하고 감사한다.
그런데 거의 동시대를 살았고 또 살고 있으며 박정희가 남긴
유산을 말로는 거부하는지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그 혜택을
다 누리면서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다를 수 있음을
보면서 인간의 생각이란게 하루 아침에 변하거나 굳어 지는 게
아님을 엄씨의 글을 통해 재확인하게 된다.
감사합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 깊이 공감합니다. 군대가 좋아서 간 사람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의무이니 선택의 여지가 없이 끌려갔던 거지요. 그러게 徵集 아니겠습니까. 노동 또한 부모 봉양하고 처자식 먹여살리기 위한 이기적인 욕망에서 한 행동일 뿐이구요. 아담 스미스 말처럼 기업활동도 결국 이익을 남기기 위한 이기적 욕망이 본질이지요. 그러나 개인이든 기업이든 말씀하신대로 자기가 선 자리에서 이기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한 게 결국 ‘민족중흥’을 일궈낸 바탕이 되었지요. 국민교육헌장에서 언급한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란 것도 군국주의시대에 국가가 자살특공대에게 요구하는 것같은 滅私奉公의 사명감을 이르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위치에서 자신의 직분을 충실히 다하자는 취지라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세대가 가난에서 벗어나 민족중흥을 이뤄내는 선봉세대가 되지않았습니까.
오늘, 6.29. 노태우 6.29선언, 34년이 되었다. 1987년, 이 날부터 나라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후 '도장들고 나르샤'가 확실하게 나라를 구렁텅이에 빠뜨렸다.
엄상익변호사님 이 칼럼제목에 이의를 보냅니다 5000년가난을 일거에 없애버린박정희소장의 쾌거에60여녖이지난 지금도 엄변호사님이그렇게 싫엇다는 민족중흥의역사적 사명을 띠고 혁명에나섰다는 박정희소장의그 쾌거에 지금도 감사의 념을 잊을수가 없읍니다 그 아류도 못되는 사이비 정치인들이 박정희대통령의사명은 잊은체 즤들의정권욕을 탐하며 함부로 뱉어낸 인간이하의 리바이벌 곡의 한탄인줄은 아오나 그래도 이렇듯쓰레기들을 비난하시드라도 발제가 좀 잘못된것같습니다
우리는 이씨 조선때 왕의 노예들 이었다
양반이고 상놈이고 왕을 위하는 집단인건 비슷했다
일제시대는 조금 달랐다
노예제도는 물론 반상의 차이도 패지 되었다
자신을 위하여 살아 갈 여러 방법이 생겨난 것이다
양반이 아니면 공부도 할수 없었던 나라에서
자신을 위하여 공부도 저축도 할수 있게 된것이다
그러나 이씨 조선의 잔재에 길들여진 우리 민족은
지금도 그 자유가 뭔지 모르고
정치인들의 도구가 되어 촛불을 들고 정권의 압잡이 노릇을 좋아 한다
우리도 언젠가는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들을 위하는 바보짓거리
계속하지 않는 시민의식을 배우게 되려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