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바람

“바람피는 거 잡으려고 따라왔어. 엄마가 현장을 잡으래.” 내가 중학교 이학년 무렵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무렵 사십대 초반이었던 엄마와 아버지는 애정 다툼이 있었던 것 같다. 어느 여름날 조용한 일요일 오후 어머니는 아버지가 바람을 피는 것 같다면서 뒤를 따라가라고 명령했다. 나는 바람이라는 말이 뭔지도 몰랐다. 엄마의 지시로 미루어 아버지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걸 알아오라는 정도로 막연하게 짐작했다.

아버지가 양복을 입고 외출하는 걸 보고 잠시 후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골목길에 숨어 명작소설에 나오는 탐정 흉내를 냈다. 큰길의 버스정류장에 이르자 바로 난감한 상황에 부딪쳤다. 추적자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택시를 타고 아버지가 탄 버스를 뒤쫓는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때였다. 주머니에 버스표 달랑 두 장이 내가 가지고 있는 전부였다. 임무는 부여받았는데 그냥 들어가면 엄마한테 혼이 날 게 분명했다. 그래도 엄마가 시켰으면 그 일을 수행해야 했다.

숨어있다가 아버지가 버스를 타는 걸 보고 얼른 뒤따라 올라탔다. 나의 정체를 숨겨야 하는데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 쪽을 보지 않고 반대쪽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버스 뒤로 걸어가 좌석에 앉았다. 앞쪽 의자에 앉은 아버지의 뒤통수가 보였다. 아버지도 나를 모르는 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이문동 부근의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는 걸 보고 나도 따라 내렸다. 아버지는 가난한 동네의 골목길로 들어섰다. 거미줄같이 좁은 길이 복잡하게 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꺾어지는 길로 접어드는 걸 보고 걷는 속도를 높였다. 굽은 골목길을 돌려는 순간 아버지가 거기서 도로 나왔다. 시선과 시선이 부딪치니까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너 웬일이니?”

아버지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시치미를 뗀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머리 속이 텅 빈 것 같아지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바람피는 거 잡으려고 따라왔어. 엄마가 현장을 잡으래.”

그렇게 말하면서 순간 후회했다. 다른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둘러대는 건데 그런 거짓말을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이다. 엄마나 친구들은 나를 새끼 곰 같은 놈이라고 놀렸다.

“그러면 같이 현장을 가자.”
아버지가 웃지도 않고 음흉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아버지와 같이 가난한 집들이 사는 산동네의 좁은 골목길을 걸었다. 판자집은 간신히 면한 가난한 집에서 아버지의 대학동기가 살고 있었다. 같이 이북 출신인 아버지의 친구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찾지 못해 힘들게 살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 친구를 소리 없이 조금씩 도와줬던 것 같았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올 때였다. 내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엄마가 아버지 뒤를 쫓으라고 했는데 이렇게 같이 들어가면 안 되지. 아버지가 먼저 들어가고 나는 조금 있다가 뒤쫓아 들어가야지.”

“그럼 그렇게 해라.”

잠시 후 마루에서 저녁상에 둘러앉아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내가 같이 밥을 먹었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고 알전구 빛에 손바닥만한 마당에 매달린 수세미가 미동도 없이 매달려 있었다.

갑자기 오십여 년 전 유년의 그 기억이 왜 떠올랐을까 생각해 봤다. 이틀 전 저녁 변호사를 하는 친구의 하소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마음에 담고 좀 친하게 지낸 여선생이 있었어. 뭐 바람을 피우거나 특별한 관계는 아니야. 그런데 우리 마누라가 촉이 있는지 그걸 느낀 거야. 어느 날 아들놈이 그 여선생을 찾아갔더래.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앞으로 우리 아버지와 사귀지 말라고 했다는 거야. 이런 고약한 아들놈이 있을 수 있어? 어떻게 일방적으로 엄마 편을 드는 거냔 말이야.”

그 아들이 너무 한 것 같았다. 끼어들지 말거나 눈감아 주면 더 좋았을 텐데. 내가 소년 시절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진짜 아버지가 어떤 여성을 만나는 현장을 보고 돌아왔다면 나는 뭐라고 엄마에게 보고했을까? 아마도 “봤는데 엄마보다 훨씬 그 아줌마가 예쁘던데” 하고 엄마의 속통을 터쳐놨을 게 분명할 것 같았다. 애정 싸움을 하던 아버지도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신 지 아주 오래됐다. 삶도 사랑도 바람같이 순간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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