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려서부터 지나온 기억을 모두 지워버리고 싶은 사람이야. 그걸 가지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해?
<나는 장사꾼일 뿐이야>
여의도역 삼번 출구 옆 벤치에 열두 시의 강하고 투명한 태양이 내려 쬐고 있었다. 나는 벤치에 앉아 친구를 기다리면서 활기찬 모습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모두들 바빠 보이는 여의도 금융가의 젊은이들 같았다. 순간순간 변하는 주식시장의 수치에 목숨을 거는 그들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내 시야에 어깨가 구부정하고 흰머리가 흥성흥성한 노인이 나타났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청년 시절까지 거의 매일 붙어살던 친구였다. 그는 안암동 산동네 판자집에서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다. 우리 어머니는 뜨개질 품팔이를 했고 그 친구의 어머니는 참기름이 담긴 작은 소주병들을 가방에 담아 팔러 다녔다. 그는 일 년 벌어서 일 년을 대학을 다니고 그렇게 팔 년 만에 졸업을 하고 무역상사에 들어가 일을 배웠다.
몇 년 만에 회사를 그만둔 그는 홍콩과 미국 그리고 세계를 드나들면서 독자적인 사업을 벌였었다. 그리고 마침내 부(富)를 이룬 것 같았다. 미국 뉴저지에 있는 그의 저택은 백인들도 구입하지 못하는 비싼 집이었다. 홍콩섬에 있는 그의 좋은 아파트도 마찬가지였다. 여의도에 있는 그의 고급 아파트도 보통 사람은 꿈꿀 수 없는 고가(高價)인 것 같았다. 그는 일 년을 몇 달씩 나누어 서울과 홍콩 그리고 뉴욕에 살았다. 그런 그가 구부정한 노인으로 변신해서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가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살이 많이 빠졌냐? 예전과는 달리 왜소해 보여.”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당장 알아차렸다. 내가 그를 노인으로 보듯 그의 눈에 역시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알 것 같았다. 소년 시절 그와 같이 놀 때는 젊음이 영원할 줄 알았는데 어느새 그게 소리 없이 잦아들었다. 그가 이끄는 여의도의 대형고급 쇼핑몰 레스트랑으로 가서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중 그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형제도 고등학교 동창도 이제 다 싫어. 사람도 모두 정리하고 최근에 만난 친구 한두 명하고만 골프를 치던가 해외여행을 같이 하면서 지내고 있어. 평생 사업을 하다 보니까 이제는 인간 자체가 싫어졌어. 서울에 와서도 사람들을 안 만나. 이상하게 만나면 재산이 얼마나 있는지 자식들은 어떻게 됐는지 그런 걸 유난히 알고 싶어하고 비교하고 시샘을 하는 거야. 그러니까 만나고 싶겠어? 만나도 시사문제 같은 형식적 대화 몇 마디 하고 헤어져.”
나는 그의 말의 행간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목숨을 걸고 돈을 벌어온 그에게 모두들 뜯으려고만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모교 대학에 기부를 했더니 완전히 봉으로 알고 본격적으로 돈을 뜯어내려고 한다는 얘기를 전에 했었다.
“그래도 칠십 고개에 도달한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건 돈보다 소중한 아름다운 추억이 아닐까?”
나는 그를 보면서 어떤 안타까움이 들었다.
“추억? 추억 같은 소리하네. 나는 어려서부터 지나온 기억을 모두 지워버리고 싶은 사람이야. 그걸 가지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해? 말도 안돼. 우리가 중고등학교 시절 맨날 같이 어울려 다니던 친구 xx이만 해도 그래. 원래는 어려서부터 내 친군데 너한테 소개해서 같이 친구가 된 거잖아? 나는 판자집에 살고 그 친구는 돌로 지은 저택에 살았어. 그 애 아버지가 대학의 학장을 하고 말이야. 내가 나름대로 성공을 하고 신라호텔에 방을 얻어 어려서 어울리던 우리 그룹 네 명을 불러 놀 때 그 친구의 눈에서 나오는 파란 질투의 빛이나 비교하는 행동을 보고 나는 관계를 끊어 버렸어. 더 이상 친구가 아닌 거야.”
그들은 어려서의 입장이 바뀌었었다. 판자집에 살던 가난한 아이는 부자가 되고 부자집 아들은 빌딩 경비원이 되었던 것이다. 환경에 따라 우정은 계속되기가 힘든 것 같았다. 부자가 된 친구는 힘겹게 살아오는 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그게 인간에 대한 혐오가 된 것 같았다. 그의 눈에는 험한 인생을 버텨온 강인한 빛이 보였지만 또 다른 느낌이 전해졌다. 그의 모습은 수액이 다 빠진 고목나무 같은 지친느낌이었다. 그의 얘기를 조용히 들어주었다. 나는 그의 상처를 받아주는 맑은 강물이 되고 싶었다. 그와 헤어질 무렵 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린 시절 우리가 철없이 놀 때도 보면 너는 입으로는 냉철하고 똑똑한 체 했지만 속은 착하고 따뜻했어. 가난한 삶이 서늘했지만 너의 본질은 그렇지 않았어. 너와 함께 했던 추웠던 소년 시절은 서로에게 따뜻한 온기를 전해준 내게는 보석 같은 추억이었어. 그래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너에게 카톡으로 ‘너를 사랑한다’라고 써서 보냈던 거야. 나는 너를 잃고 싶지가 않아. 재산이 다가 아니라고 생각해. 어린 날의 네 순수함이 그것들보다 더 귀중한 거 아닐까?”
나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나는 그의 친구 명단에서 이미 빠져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내 영혼의 친구 명단에서 그를 빼지 않고 있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가 이렇게 짧게 한 마디 했다.
“나는 장사꾼일 뿐이야.”
돌아오면서 어쩌면 그와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와 내가 정말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저 세상으로 가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추억? 추억 같은 소리 하네"
- 엄상익(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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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10,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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