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를 내는 심정

기억이 세월을 뒤집어 쓰면 추억이 되는 것 같다. 삼십 년 전 일기를 읽다가 피식 웃었다. 몇 명의 친구들이 광고회사를 차린 동창의 사무실에 모여서 서로 고통을 얘기하던 장면이 묘사되어 있었다. 먼저 광고회사 사장이 된 친구가 말하는 게 나왔다.

“요새 이상하게 목 뒤가 뻣뻣하게 굳고 자다가도 식은 땀을 흘리면서 벌떡 일어날 때가 있어. 벌써 석 달째 일이 없어. 비용은 꼬박꼬박 나가는데 미치겠어. 회사에서 그냥 월급이나 타 먹을 걸 괜히 나와서 사업한답시고 고생만 하는 것 같아.”

“회사에서 왜 나왔는데?”
옆에 있던 다른 친구가 물었다.

“내가 나오고 싶어서 나온 게 아니야.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나왔지. 부장진급 때였어. 경력이나 그동안의 인사고과나 모든걸로 봐서 내가 진급 일순위였어. 상무가 미리 나를 조용히 불러 앞으로 내가 팀을 잘 장악해서 사업이 더욱 활성화되게 계획을 짜보라고 하더라구. 그 말은 부장 진급이 확실하다는 거였지. 또 총무과 서류를 우연히 본 동료가 진급은 기정사실이라고 알려 주더라구. 그런데 막상 발표난 날 보니까 같은 팀에 있는 후배가 부장이 된 거야. 울컥해서 앞뒤 재지 않고 사표를 던져버렸지. 그리고 빚을 내서 조그만 광고 기획사무실을 낸 거야. 객관성을 무시하고 아부하고 뒤에서 뇌물을 가져다 바쳐야 승진하는 세상에서 나는 억울해.”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한의사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자네는 공식적으로 사업체를 가지고 노골적으로 영업활동을 할 수 있어. 그런데 나는 자격증을 따고 겨우 한의원을 차렸는데 명색이 한의사라는 자존심 때문에 노골적인 영업활동을 할 수 없는 거야. 죽으나 사나 그냥 환자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하루 종일 환자는 한 명도 없고 혼자 진료실에 죽치고 앉아서 창문으로 저녁 어둠이 내리는 걸 보는 내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어?”

법률사무소를 차린 나도 그와 같은 입장이었다. 한의사 친구가 말을 계속했다.

“내가 갑자기 열이 오르고 온 몸이 아프더라구. 그래서 병원에 입원했지. 나는 속이 타들어가더라구. 병원 치료비 나가지 내가 차린 한의원 임대료나 인건비는 계속 내야 하지. 이중으로 손해를 보고 있는 거야. 말이 좋아 한의사지 아픈 사람 이용해서 사기치지 않고 이 세상 똑바로 살려면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게 틀림없더라구.”

그 자리에 참석한 또 다른 친구가 있었다. 그는 속칭 명문이라는 고등학교를 같이 나왔지만 가정사정상 대학을 가지 못하고 회사에 일찍 취직을 했다. 먹고 살기가 급했던 것 같다. 그가 달관한 듯한 조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좋아서 하는 것인지 매일 회의를 가져. 회사에서 여러 번 속이 상하는 경우를 당했어. 진급에서 후배한테 추월을 당하기도 하고 또 월급이 올라가는 기회를 놓치기도 했지. 그럴 때면 울컥하고 속에서 주먹 같은 게 불끈 올라왔어. 그런데 사표를 던지려고 해도 막상 대안이 없는 거야. 회사를 그만두면 어디 가서 뭘 할 능력이 전혀 없는 나를 발견했어. 그래도 삼십대까지는 정열을 가지고 일했는데 그 불꽃도 꺼져버리더라구. 나이를 먹으면서 요새는 무리를 하지 않고 점점 현실에 안주하고 윗사람 눈치만 보는 거야. 내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지 너희들은 모를 거야.”

나름대로 우리들은 눈가리개를 하고 달리는 경주마 같이 달려 장애물들을 넘은 셈이다. 전문자격증을 따기도 하고 대기업에 들어갔다. 그게 아니라도 중견 기업에 취업을 했다. 세상적인 잣대로 실패하지는 않은 입장이었다. 그래도 모두 위를 보면서 불만이었다. 우리의 귀에 아래서 더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신음은 들리지 않았다. 불공정한 세상만 보였다. 세상은 온통 회색이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우리들은 상처를 치유하는 좋은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의 아픔들을 친구들에게 솔직히 털어놓았었다. 그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것은 마치 상처를 깨끗한 강물에 담가 씻는 행위와 비슷했다고나 할까. 그렇게 말하고 들으면서 우리들의 상처는 아물기도 했다. 그리고 세상의 불공정을 인정하는 데서 다시 삶이 시작한다는 것도 알았다. 세월이 흘러 우리들은 노인이 되었다. 광고회사를 하던 친구는 카메라를 들고 산과 들을 놀러 다닌다. 노년의 걱정이 없다. 한의사 친구는 의학계의 원로가 되고 빌딩을 사서 큰 간판을 붙여놓고 있다. 자신이 비참하다고 울먹이던 친구는 매일아침 카톡으로 내게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보내주고 있다. 기억이 세월을 뒤집어 쓰면 추억이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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