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양심' 한승헌

"돈을 사랑하고 싶은데 돈이란 놈이 날 사랑하지 않더라구요"…그는 노년에 유머 연구에 빠졌었다.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짝 말라 볼이 홀쭉한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얼굴에 검버섯이 가득 핀 그는 미소를 지으며 수시로 암기했던 유머를 사람들에게 들려줬었다.

그의 삶이 특이했다. 천재성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가난 때문에 지방대를 들어갔다고 했다. 극소수를 뽑던 당시의 고등고시에 그는 일찍 합격하고 검사가 됐다. 그는 사람들 위에 군림할 수 있던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변호사가 됐다. 당시로서는 경제적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변호사업인데도 그는 시장통 낡은 집에서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그는 독재정권 시절 시국사건 전담변호사로서 정권과 불화의 중심에 섰다. 검찰의 공소사실에 통과의례로 판결이라는 포장을 씌워주던 시절이었다. 그는 김지하 시인을 비롯해 수많은 민주투사를 변호했다. 변호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보고 듣고 느낀 걸 글로 세상에 사회에 알렸다. 그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억울한 징역도 살았다. 자격을 정지당해 먹고살기 힘든 기간도 있었다. 그는 잡지사에서 일을 하기도 했었다.

그가 변호하던 사람들의 세상이 됐다. 대통령 비서실장을 하라는 제안이 왔다. 그는 거절했다. 감사원장을 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공무원의 한 달 월급이 얼마냐고 물었다. 그 월급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생활비가 안될 것 같아 하기가 곤란하다고 말했다는 소리도 들었다. 가난과 고통 속에 살아온 그는 노년에 유머 연구에 빠졌었다.

십여 년 전 봄비가 촉촉이 내리던 삼월구일 오후 두시 삼십분경이었다. 서울시청 부근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갔었다. 팔순이 다가오는 그가 작은 사무실에서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선배님은 어떤 분입니까?”
내가 물었다.

“나의 본질이나 실체는 변호사에요. 다시 태어나도 변호사란 이 직업을 택할 거요.”
노인답지 않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다. 힘이 느껴진다.

“왜죠?”
“변호사란 헌신을 하기에 아주 적합한 직업입니다. 헌신을 해도 영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실질적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직업이죠.”

억울한 사람 올곧은 사람을 변호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법정의 현실을 글로 써서 세상에 내놓았던 이유는 뭡니까?”
내가 본 독재정권 시절의 그는 변호사라기보다는 기록자였다.

그는 자기가 본 사실들을 ‘정치재판의 현장’, ‘분단시대의 법정’ ‘위장시대의 증언’ 등의 책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 이유가 있었다. 인권변호사는 법정의 소품일 수 있었다. 검찰의 구형대로 판결이 선고되는 정찰제 판결이었고 피고인들이 쫓겨난 채 변호사는 텅빈 의자만 변호해야 하기도 했었다.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때는 변호가 아니라 법정에 끌려온 외로운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과 동행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지.내가 어떤 말을 해도 판사들은 귀를 막고 이미 결론을 정해놓은 상태였으니까. 나는 그런 사실들을 본 증인이자 기록자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기록이 없다는 건 사실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꼭 써서 남겨야 합니다. 우리 변호사들은 그런 면에서 정직하고 비정치적이죠. 그렇기 때문에 실증적으로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사건이 선고되는 것을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변호사들은 후발적 임무로 그 사건을 글로 정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료들을 공유해야 합니다. 내가 글을 쓴 것은 세상에 대해 다음 세대를 향해 했던 변호죠.”

“변호사가 해야 할 일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불의와 차별에 대한 저항이죠. 칠팔십년대 독재시절과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굳이 차이가 있다면 전시와 평시 정도라고나 할까. 정도의 차이지 지금도 역시 불의와 차별이 곳곳에 남아있죠. 변호사들이 관심을 가지고 보느냐 외면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겁니다. 변호사들은 자칫 선민의식을 가지거나 갑의 입장이 되어 문제를 해석할 개연성이 있어요. 오만하고 권위적으로 될 위험이 있는 거죠. 우리는 순간순간 스스로 브레이크를 걸어야 하고 우월감을 버려야 합니다. 동시에 돈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재벌이나 부자 앞에서 변호사들이 집사같은 행동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건 돈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노예가 되어 버린 결과죠. 제 경우는 돈을 사랑하고 싶은데 돈이란 놈이 날 사랑하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체념을 하고 살았어요. 그래도 자식들 공부시키고 두 내외가 잘 살고 있어요. 건강도 나이만큼 튼튼하고 말이죠.”

“변호사로 편하게 살지 않고 굳이 십자가를 진 이유가 뭡니까?”
“남들이 정의니 용기니 그렇게 말하는데 그 차원은 아닌 것 같아요. 어려운 사람을 외면했다가 나중에 양심의 가책을 받고 후회하면 힘들 거 같았던 거죠. 위험이 다가올 때 비껴서거나 도망치면 후회가 될까 봐 정면으로 맞아들였죠. 무서워도 물러나지 못한 거죠. 결국 인생이란 어느 마디에서나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가 무서웠다는 순간을 좀 더 알고 싶어 물었다.

“감옥에 들어가던 순간의 감정을 자세히 얘기해 주시죠.”
“변호사로서 수시로 찾아가던 감옥과는 차원이 달랐어요. 죄수복을 받아 갈아입고 플라스틱 식반과 젓가락을 가슴에 안고 교도관을 따라 사동 복도를 걸어갔죠. 구석의 한 감방 안으로 들어가니까 뒤에서 ‘철커덩’ 하고 문이 닫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는데 천둥치는 것 같이 크게 들렸어요. 혼자 감방에 앉아 두리번거렸죠. 낙서가 적힌 축축한 벽이 보이고 구석에는 엽서만한 전도지들도 있더라구요. 억울해서 속이 아픈 건 말도 못하죠. 어떻게 이 상황을 이겨낼까 안간힘을 썼죠. 구치소는 오후 다섯 시면 폐방이라고 해서 모든 활동이 끝이 납니다. 그런데 그날 밤 늦게 감방문의 식구통이 열리면서 우유와 찐빵을 얹은 식판이 들어오는 거에요. 정말 놀랐죠. 그 다음날 밥을 날라다 주는 소지에게 물어봤더니 사동 맨 끝 방에 있는 사형수가 내게 선물을 한 거라는 거에요. 내가 쓴 글 중에 사형제도의 폐지를 주장한 게 있었는데 그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면서 규칙까지 위반하면서 보낸 거에요. 내 글 한 편을 그가 어떻게 알고 그랬는지 놀랍기도 하고 가슴이 뭉클했어요. 세상과 차단된 감옥인데도 사람들은 알걸 다 알고 있었어요.”

“감옥 안에서 뭘 하고 지냈어요?”
“집중적으로 저작권법을 공부했죠. 그 덕분에 마광수 교수가 즐거운 사라라는 책으로 구속됐을 때도 검찰이 예술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변론을 했었죠.”

“변호사 자격이 박탈된 8년의 세월을 어떻게 사셨습니까?”
“공중 나는 새도 하나님이 먹여준다고 하더라구요. 가까운 사람한테 도움도 받고 변호사회에서 모금도 해주고 정말 눈물나도록 고마웠지.”

그날은 오후 내내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도 그를 모델로 삼고 살아온 면이 있었다. 이제 그가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났다. 시대의 양심이 조용히 잠이 든 것이다.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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