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모두 당달봉사 아니랴

크리스마스 때 먹으려고 백포도주 두 병을 사서 방구석 윗목에 두었다. 눈뜬장님 아닌 사람이 있겠나? 비록 사람이 달나라에도 가지만 한 치 뒤의 일도 못 내다보니까 하는 이야기이다. 이번 크리스마스엔 포도주를 가뿐하게 한 잔 하려고 열흘 전에 두 병을 미리 사다 놓았다. 대형마트에서 샀는데 전에 즐겨 먹던 것이 안 보이다가 새로이 보이기에 샀다. 맛도 괜찮지만 싼맛에 사 먹던 술이다.

작년에 롯데마트와 이마트 간에 혈투가 있었다. 포도주 판매를 놓고 다툰 싸움이었다. 서로 경쟁을 하다 보니 이쪽이 가격을 낮추면 저쪽도 따라 낮추고, 또 저쪽이 낮추면 이쪽도 질세라 낮추곤 했다. 이마트는 이마트대로, 롯데마트는 롯데마트대로 특정 포도주를 앞세워 가격을 자꾸만 내렸던 것이다. 이 싸움판을 언론도 보도했는데 기름을 부은 격이 되어 가격이 더 내려갔다. 마침내 750ml짜리 한 병에 4900원까지 내려갔다. 소비자는 신이 났고 술꾼은 살판 만났다. 품질이 괜찮은 프랑스 포도주. 스페인 포도주가 소주보다 쌌으니, 술꾼치고 소주 마니아가 아닌 다음에야 소주보다 저 포도주를 샀을 것이다.

나도 양쪽 마트를 다니면서 이 술 저 술 닥치는 대로 사다 놓고 입에 맞는 것을 골랐다. 마침 안성맞춤으로 내 입에 딱 맞는 백포도주 하나가 있었다. 이후 그 포도주만을 상자째 사다 놓고 마셨다. 이러는 덕분으로 적포도주는 소문난 술이라도 텁텁한 맛이 있고, 백포도주는 그런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양양자득(揚揚自得)했다. 이러자 동네 편의점 아저씨가 나한테 “보소. 당신이 즐기던 아사히맥주를 이젠 끊었소? 왜 안 오는 거요?” 했다. 넌지시 웃는 것 말고는 할 말이 없었다.

크리스마스 때 먹으려고 그때 즐기던 그 백포도주 두 병을 사서 방구석 윗목에 두었다. 열흘 내내 당장 따서 먹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으나 쳐다보기만 하고 입맛만 쩝쩝 다실 뿐 끝내 참았다. 용케도 열흘 동안 참아 내었던 것이다. 드디어 크리스마스이브가 밝았다. 오늘 저녁에 “저놈을 먹어야지” 혼자 지껄이며 가족 몰래 히죽대었다.

그런데 웬걸 이브날 아침부터 목구멍이 따갑기 시작했다 이어 저녁답에는 으슬으슬 춥고 감기 기운이 나타났다 감기를 앓을 것은 걱정이 안 되는데 오늘 저 술을 먹지 못할 것이 슬퍼서 시름에 빠졌다. 혼자서 궁시렁 궁시렁 대고 있는데 당질(堂姪) 놈들이 왔다. 그놈들이 이랬다. “흐흐흐. 술꾼 아재. 우리가 올 줄 알고 백포도주를 준비해 놓았구랴.” 원수 같은 놈들이 따까마시(注:독차지)하는 걸 도리없이 보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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