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로 말을 많이 하지 마세요"

30년 후 만난 전직 안기부 직원 “내가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어요.” <하나님은 입이 없다>

젊은 시절 변호사를 하다가 잠시 권력 조직에 들어가 법률팀 보조를 한 적이 있었다. 그곳은 대통령을 만든 곳이라고 했다. 그 조직은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 북한과는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등의 이념과 정책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대통령이 어떤 장소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도 시나리오가 작성되고 있었다. 실질적인 힘이 작용하는 걸 봤다. 국회의원 공천과 장관의 임명 그리고 누구를 대법원장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초안까지 만들어지고 있었다.

수사가 필요하면 검찰과 안기부에 명령을 할 수도 있었다. 정부 각 부처에 협조라는 형식으로 요청하면 담당 공무원들은 복종했다. 그 조직은 안전기획부 속에 숨어져 있었다. 안전기획부장도 그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 정도면 권력기관이라는 말이 맞을 것 같았다. 삼십대 중반 그런 세계를 전혀 몰랐던 나는 처음 보는 풍경에 ‘이게 뭔가?’ 하고 어리둥절해 있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 조직 속에서 보았던 한 남자의 얘기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안전기획부 요원이었다. 그는 중국어에도 능통한 인재였다. 그 조직의 사람들은 은근히 권력에 취해 있었다. 그리고 다음에 갈 높은 지위를 바라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남자는 달랐다. 그는 항상 허름한 군 장교 점퍼를 입고 자신의 사무실에 조용히 있었다. 식사시간이 되면 지하 구내식당 구석에서 식판에 담긴 밥을 소리없이 먹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내게 조용히 다가와 이런 말을 했다.

“권력조직에 근무하다 보면 권력이 무상하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또 인간이 인간에게 매달리고 그 노예가 되는 게 얼마나 허망하다는 걸 저는 보아 왔습니다. 권력욕이 없어야 인간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욕심이 있는 한 개에게 권력의 옷을 입혀 놓아도 그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되니까요.”

그 조직에 근무하는 상당수가 정치화되어 있었고 차용한 권력에 취해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내게 그런 말을 한다는 자체가 의외였다. 그는 중국에서 벌어지는 비밀공작에 관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바로 옆 방에서 일을 해도 서로 간 비밀을 지키는 게 그 조직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북의 정찰총국의 대남공작 책임자들을 보면 인간적인 기교나 잔꾀에 있어서는 당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한계가 있어요. 모든 걸 자기 시각과 두뇌 속에 있는 회로로 측정하고 계산하는 거죠. 그럴 때 저는 가장 솔직하고 담백한 태도로 임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걸 읽어내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합니다. 우리를 자기들 잣대로 생각하니까요.”

의외로 그는 정직을 말하고 있었다. 그가 덧붙였다.

“제가 파견나오기 전 근무하던 조직에서 하는 건 정보 업무나 수사 업무입니다. 그 업무들은 모두 인간에 대한 배신을 바닥에 깔고 하는 업무죠. 정상적인 인간이 할 일은 아니죠. 그런데 호기심을 가지거나 가까이 하면 별로 좋을 게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 조직 안에서 사람들 앞에서 절대로 말을 많이 하지 마세요. 남들에게는 그저 모자라고 어눌한 태도로 임하세요. 똑똑한 체도 하지 마세요. 차라리 차를 직접 타서 가져다 주는 것 같은 작은 행동들을 하세요. 그렇게 지내다 보면 어느 날 상대방이 저 사람이야말로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생각할 겁니다. 그때 진짜 가치있는 인간이 되는 겁니다. 말은 많이 할수록 손해입니다.”

전혀 모르는 그가 왜 내게 다가와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와 그는 업무상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나에게 조언할 위치도 아니었다. 그냥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엷은 인연일 뿐이었다. 그 얼마 후 나는 그 조직을 나왔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서 삼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나는 그가 그 후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서 그를 찾아 보았다. 그는 그 생활을 접고 은퇴한 것 같았다. 그는 지방 도시의 조용한 집에서 혼자 살면서 수도사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은퇴 후 신학대학을 다니고 목사가 됐다고 했다. 그가 이따금씩 나의 사무실에 놀러오게 됐다. 한번은 같이 저녁을 먹을 때 그에게 물어보았다.

“그때 왜 내게 그런 소리들을 했어요? 정말 감사한 조언이지만 그곳의 조직원으로서 내게 할 소리는 아니었잖아요?”

“내가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어요.”
그는 정말 생각이 나지 않는 것 같았다.

“엄 변호사는 전혀 이질적인 사람이었고 경계하는 입장이었는데 그런 말을 했다면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나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아요. 아마 엄 변호사가 성경을 책상 위에 펴 놓고 있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다가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조직의 보스는 성경을 보는 사람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거든요.”

그의 대답이었다. 하나님은 입이 없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입을 사용하시나 보다. 세상의 출렁이는 파도 위에서 흔들릴 수 있는 나를 보고 그를 내게 보낸 것 같기도 했다. 그의 말은 내게 닻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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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든타임즈 2023-01-11 오전 9:39

    사람들은
    많이 들을수록
    적게 말하고,
    적게 들을수록
    많이 말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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