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대통령, "혈맹국의 재해 돕겠다"
오늘(6일) 오전, 규모 7.8의 强震(강진)이 튀르키예 남부와 시리아를 강타해 튀르키예에서만 최소 900여 명이 숨지고 2000여 명이 다쳤다고 AP·로이터통신 등외신이 보도했다. 주민들이 대부분 잠든 새벽에 지진이 발생했고, 무너진 건물 잔해에 깔린 사람이 많아 앞으로 희생자 숫자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은 이날 오전 4시17분쯤 튀르키예 남부 가지안테프에서 동쪽으로 약 26㎞ 떨어진 곳에서 지진이 발생했다고 전했다. 지질조사국은 “이는 1939년 3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튀르키예 역사상 최악의 지진과 동일한 규모”라고 말했다.
지진 발생 후, 이스탄불에서 1000여 명의 수색대원과 자원봉사자들이 지진 피해를 입은 남부 지역으로 급파됐다.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모든 관련 부처와 응급대원들이 재난 대응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튀르키예는 78만 평방km의 넓이와 86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NATO 가입국이며, G20의 일원이다. 6•25 때 큰 은혜를 입은 한국은 지금 큰 재해를 당한 튀르키예 국민을 도울 의무가 있다.
尹錫悅(윤석열) 대통령은 7일 “튀르키예는 6·25전쟁에서 피로 맺어진 형제의 나라”라며 튀르키예 지진 피해에 애도를 표하고 구조·수색팀 급파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 돕겠다고 밝혔다. 尹 대통령은 7일 오전1시쯤 트위터에 메시지를 내고, “어려움에 처한 튀르키예·시리아 인들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한국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분들에게 깊은 애도를 보냅니다”라고 밝혔다. 尹 대통령은 “튀르키예는 6·25전쟁에서 피로 맺어진 형제의 나라”라면서 “우리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도울 것”이라고 했다.
튀르키예는 한국과는 특별한 인연을 가진 형제국이다. 한자로는 시대에 따라 鐵勒(철늑), 土浴渾(토욕혼), 突騎施(돌기시), 突獗(돌궐) 등으로 표기됐다. 지금은 土耳己(토이기)라고 쓴다. 몽골과 함께 중국에서 흉노라 칭하던 북방민족의 하나로, 6세기 중엽부터 8세기 중엽까지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활약했다. 우리 한민족과 같은 알타이어족이다. 뜻과 발음이 똑같은 터키, 한국 양국어가 현재도 400여개에 달한다고 한다.
《舊唐書(구당서》에는 〈철륵은 본래 흉노의 한 갈래이다〉라고 했고, 《新唐書》에는 〈奚國(해국•돌궐의 이칭)은 대체로 흉노의 갈래인데, 東胡(동호)계열이다〉라고 했다. 東胡란 東夷(동이)의 별칭이다.
柔然(유연)의 한 부족으로 살아가던 튀르크족은 阿史那(아사나)씨의 족장 부민칸(Bumin Khan)代에 이르러 여러 부족을 정복하고 柔然을 멸망시킨 후, 552년 돌궐 제1제국(552~583년)을 세워 초대 칸으로 추대된다. 부민칸은 伊利可汗(이리가한)이라고도 부르는데, 중국 史書(사서)에서는 만인의 우두머리라는 뜻의 頭曼(두만) 또는 豆滿(두만), 土門(토문)으로 기록된다.
高句麗(고구려) 전성기엔 契丹(글안), 靺鞨(말갈)과 마찬가지로 일부는 高句麗의 기층민중에 속했다. 돌궐은 高句麗가 멸망한 후(668년), 高句麗의 유민을 많이 받아들이면서 우리 민족과 특별히 긴밀해졌다. 高句麗가 멸망하자, 대부분의 서민들은 초기엔 唐(당), 渤海(발해), 후엔 新羅(신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만주 및 한반도에서 살아갔으나, 귀족계급 등 상류층 가운데 수십만 명이 唐에 포로로 잡혀갔다. 일부는 몽골, 글안, 돌궐 등 북방 초원에 흩어져 타민족과 섞여 살다가 684년 東돌궐의 阿史那骨祿(아사나골록)이 올란바토르(현 몽골의 수도)를 수도로 하는 「돌궐 제2제국」을 수립할 때, 여기에 참여했다. 그 숫자는 돌궐 전 인구의 절반이 넘는 2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돌궐의 황제는 「선우」 또는 「가한」이라고 불리며 그 아래로 左賢王, 右賢王이 있었다. 돌궐 제2제국의 선우는 고구려 유민을 우대하여, 高句麗 왕족의 일원이며 유민의 수장인 高文簡(고문간)을 高麗王(고구려 유민들 사이에는 막리지로 불렸다고 함)으로 봉하고 사위로 삼았다. 왕은 둘 밖에 없는 것이 돌궐의 전통이었으나, 高句麗 유민의 숫자가 너무 많으니까 이들을 통치하기 쉽도록 王을 한명 더 늘려 高句麗人을 앉힌 것.
골록의 뒤를 이은 黙啜(묵철)은 돌궐의 전성시대를 이룩하여 698년 10만 기병으로 唐을 유린, 黃河에서 山東 사이를 폐허화시켰다. 이처럼 돌궐의 강력한 부흥 때문에 中國이 옛 高句麗 땅을 돌볼 겨를이 없었기에, 698년 大祚榮(대조영)이 渤海를 건국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돌궐은 7세기말에 阿史德(아사덕) 톤유크라는 귀족이 중앙아시아 소그드語 계통의 문자를 만들어 역사를 기록했다. 古代 터키語로 기록된 돌궐 비문이 몽골 오르혼江, 南시베리아 예니세이江 상류 및 서북 몽골지방에 세워져 있다. 튀르키예 사람들도 이전까지는 자신들이 조상이 몽골고원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이 비석이 19세기 중엽 영국인 학자에 의해 해석되면서 자신들의 뿌리를 알게 됐다.
唐의 공격으로 세력이 약화된 돌궐은 8세기 무렵, 투르키스탄, 카작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중앙아시아를 거쳐 서쪽으로 이동한다. ‘스탄’은 북방 유목민의 공통어로 우리말 ‘땅’과 같다. 땅을 구한말 이전까지는 ‘ㅅ당’으로 표기했다. 땅보다 더 ‘스탄’에 가깝다.
이들은 후에 사라센 제국의 傭兵(용병)으로 남하한다. 사라센은 이슬람교 창시자 모하메트의 후계자가 中東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에 걸쳐 이룩한 대제국이었다. 용병에 불과했던 돌궐은 11세기 무렵, 사라센 제국을 멸망시키고 셀주크투르크 제국을 건설했다. 징기스칸의 몽골에 패해 일시 그들의 지배를 받던 튀르키예는 13세기 말, 다시 오스만튀르크를 세워 20세기 초반까지 7세기를 이어오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일어난 케말 파샤의 국민혁명으로 멸망했다. 동서양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갖고 있던 튀르키예는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편을 들다 독일이 패하는 바람에 많은 영토를 잃고 오늘날의 크기로 줄어들었다.
튀르키예는 「돌궐 제2제국」을 같이 한 우리 민족에 대해 깊은 유대감과 함께 형제의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한국이 6ㆍ25때 북괴의 남침을 당하자, 아시아에서는 가장 먼저,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군대(1만4936명, 전사 721명, 부상2147명)를 파견해 우리를 도왔던 것이다. 이번에는 우리가 도울 차례다.
튀르키예에 7.8 규모의 强震(강진)…사상자 2만여 명
- 趙南俊 전 월간조선 이사
-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2023-02-06, 20: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