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것은 누구의 것이 되지 않아 모두 가난해지다 못해 굶어 죽게 된다는 것은 금방 증명되었다.
한 소인의 얘기가 북한을 이해하는데 참고 되기를 바라면서 쓴다.
태어나 기억나기 시작한 어린 시절은 몇 살부터일까.
사람마다 각이하겠지만 내 경우에는 다섯 살 때부터인 것 같다.
고향은 황북도 서흥군 화곡리(1957.12.28)이다.
1960년생인 아래 여동생의 고향은 사리원 서리동인 걸 보면
황해북도 도 소재지에서도 살았지만 기억에 남지는 않는다.
기억에 남기 시작한 것은 황해북도 곡산군 사현리이다(1963년).
부친의 출세와 벌칙에 따라 근무지가 되는 곳들이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훗날 알았지만 화곡리에서 시골 간부로 있다가 출세하여
공산대학을 다니시던 사리원에서도 산 것이다.,
그곳에서 부화 건에 걸려 곡산군 사현리로 추방된 것이다.
요즘 말로 아이돌처럼 잘 생기고 말 잘하는 부친은
여자들에게 인기 짱이었다고 한다.
전쟁으로 남자가 모자라는 환경이 더욱 부채질을 한 것이다.
부친이 부화를 하든 말든 어린 나로서 기억나기 시작한 곳은
곡산군 사현리로서 멀지 않은 곳에 큰 저수지가 있었다.
부친이 큰 골뱅이를 잡아다 주는 것을 맛있게 먹던 기억이 난다.
실개천에 물고기가 많았다.
돌을 던져 잡을 정도였다.
잡은 물고기를 버들가지에 한 팔이나 끼워 가지고
어슬어슬한 저녁에야 즐겁게 집에 들어선다.
하지만 물고기를 집어던지며 욕 하시는 어머니가 야속했다.
유치원에는 안 가고 진 종일 물고기 잡는데 정신 팔고
옷은 다 젖고 흙탕칠하여 왔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물고기 있는 생태는 화목과 목재 사용 남벌로
내 천의 원천인 물 자체를 사라지게 하여 완전히 파괴된다.
이 결과는 1964년의 10년 후인 1974년 사이 변화이다.
마을 분위기는 농사 일하는 들판에도 울려퍼질 만큼
스피카 소리가 요란하다.
가시처럼 옹이가 피쭉피쭉한 소나무 전주대의
큰 스피커에서 나는 우렁찬 여자의 노래 소리인 것이다.
하도 반복되는 선동적 노래이기에 어린이로서도 기억한다.
<백두에 정기는 넘치고, 우리 손으로 새 사회 꾸린다.
동무여! 나가자! 힘차게 나가자!…
우리의 앞길을 막을 자 없다네, 막을 자 없다네>
어른들의 입에서 하도 왕선하, 왕선하 가수라고 하기에 기억한다.
훗날 알고 보니 <천리마 선구자의 노래>이며
당시 유명한 영화 <정방공>의 주제가였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최부실이란 여배우이다.
억실억실한 큰 눈에 보조개 볼을 가진 미녀였다.
이 영화로 너무 유명해지자 시기의 대상이 되었다.
가뜩이나 재일교포 출신으로서 말 잘못의 트집이 잡혀
유일 사상 체제가 확립될 무렵인 1960년 말에
원산으로 추방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무튼 1970년 후부터 영화에 출현 한 걸 본 적이 없다.
<정방공>영화의 배경에 이런 주요 구호가 나온다.
<공산주의적으로 일하며 배우며 생활하자!>
금방 공산주의 사회가 올 것처럼 믿고 살았던 것 같다.
이런 부푼 희망은 소련에서부터 중국, 조선으로 이어진 것이다.
소련 공산당 총비서 흐르쇼프의 공산주의 조기 이룩 꿈과
이에 전염된 것이 중국 모택동의 대약진, 조선 김일성의 천리마 운동이다.
내가 태어난 해에 조선(북한)은 공산 사회주의 체계가 완성, 즉 모든 것이 국유화된 것이다.
내 것이 아닌 모두의 것이 된 것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을
초월할 만큼 공산주의가 진짜 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모두의 것은 누구의 것이 되지 않아 모두 가난 해지다 못해
굶어 죽게 된다는 것은 금방 증명되었다.
1920년 초 공산화로 인한 소련의 대기근,
대표적으로 우크라이나에서의 수백만 명 아사가 보여주었다.
중국의 대약진으로 말미암아 수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6.25 전후 소위 신해방지구였던 옹진군에
살았던 분의 증언이 말해준다.
가장 먼저 기진맥진하여 죽는 것이 보잡이였다고 한다.
먹지 못한데 비해 가장 힘을 쓰는 작업자였기 때문이다.
신 해방지구 주민으로서 남조선 간첩과 연계될 것을 우려하여
옹진군 주민들은 최북단 신파, 삼수, 갑산으로 추방하였다.
추방지인 이곳에서 이들을 직접 만나 들은 증언인 것이다.
굶어 죽을 정도란 공산화의 후과를 보면서도 권력자들은
이 몽상을 깨지 못했다.
권력 유지를 위해서라도 깰 수가 없었다.
공산주의 몽상을 최초로 깬 것은 유고의 찌또(티토)였다.
다민족 국가로서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공산 권력 하이지만 사유화를 인정한 것이다.
공산권에서 가장 풍요하게 살았다.
대신 공산권으로부터 수정주의 두목으로 가장 왕따를 당했다.
그러나 쁠럭불가담운동(3세계)의 거물로 만들어준 꼴이 된다.
이 왕따를 따라간 것은 의외로 가장 극렬한 공산탈레반이었던 중국이다.
1978년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이다.
아마도 공산주의 이론의 결정적 붕괴는 이때부터라고 본다.
중국의 라이벌인 소련도 1985년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함께
중국을 따라간다.
공산권의 어버이 같은 두 나라가 이러니 거의 따라가게 된다.
그러다 못해 1990년을 전후로 공산권과 소련은 붕괴한다.
이제 남은 이론적 공산주의는 딱 하나뿐이다.
북한이다.
북한의 실정은 야밤의 인공위성 사진 한 장으로 모든 걸 보여준다.
블랙홀 같은 유일나라 북한!
이게 공산주의 꿈과 현실로 가장 잘 보여준 것이다.
내가 경험한 공산주의 몽(夢)과 현실
- 이민복(대북풍선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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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5, 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