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 전국 선포' 담긴 신문 본 뒤 절망…그 반응이 내가 파악한 진실이죠.”
<늙은 수사관의 고백>
잠시 같은 팀이 된 늙은 수사관은 나이가 거의 아버지뻘이었다. 나는 그와 친해지려고 했다.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해도 그는 사양했다. 커피숍도 가지 않았다. 군용점퍼를 입고 구내식당에서 스테인리스 식판에 밥과 국을 받아 먹고 식사가 끝나면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건물 구석에 서서 마시는 사람이었다. 안기부 젊은 수사관들은 그의 조수가 되는 순간 지옥체험을 한다고 했다. 그는 일이 생기면 집에 갈 줄을 모른다고 했다. 수사가 끝날 때까지 밤과 낮이 없는 집요한 사람이라고 했다. 일을 조수와 나누지도 않고 혼자 한다고 했다. 보조수사관들은 그의 옆에서 있다가 병이 났다는 얘기도 있었다.
수사관들은 그가 헛돈을 쓰는 걸 보지 못했다고 했다. 월급을 한푼도 빠짐없이 집에 가져다 준다고 했다. 그의 아들들은 명문대학을 졸업한 우수한 엘리트라고 했다. 며칠간 같이 지내다 보니 그의 마음이 조금 열리는 것 같았다. 어느날 그가 남산자락을 물들이는 저녁노을을 보면서 처음으로 자신에 대해 말했다.
“엄 선생 말이요. 나는 6·25 때 농사짓다가 군대에 끌려갔어요. 군에 갔더니 폭탄을 안고 인민군 진지에 올라가 거기서 죽으라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해야 나라를 살리는 거라고 배웠죠. 전쟁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는데도 이상하게 나는 살아남았어요.
전쟁이 끝났을 때 나는 돌아갈 데가 없었어요. 그때 특무대장이 나를 하사관을 시켜 줬어요. 배우지 못했으니까 장교는 될 수 없었죠. 거기서 내가 배운 건 나라를 위해서 빨갱이와 반역자들을 때려 잡아야 한다는 거였어요. 내가 특무대에 있을 때 김종필이 혁명을 모의한다고 해서 조사를 한 적이 있어요.
5·16 혁명이 일어났을 때 나는 준위로 특무대에 있었어요. 거기서 이번에는 반혁명분자를 조사했죠. 그러다 중앙정보부가 창설되니까 이번에는 나보고 중앙정보부로 가라는 거예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오랜 세월 이곳에서 근무했죠. 나이 육십을 훌쩍 넘어도 쫓아내지 않고 아직도 일을 하게 해 주는 겁니다. 나같은 사람을 그렇게 베풀어준 대한민국에 그저 감사할 뿐이예요.”
그런 유형의 사람이 남아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역사에서 굵직한 정치 사건은 다 조사하셨다면서요?”
내가 물었다. 대한민국 정치인 중 그에게 얻어맞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그곳의 소문을 들었다.
“그런 걸 굵직한 사건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여기 있으면서 윗분이 명령하신 사건은 그냥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 왔어요. 그렇지만 비밀을 지키다가 무덤으로 가져가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내용을 말해 줄 수는 없어요.”
“어떤 사건이 생생하게 기억나십니까? 비밀이면 말씀하시지 말고 윤곽만 조금 말씀해 주시죠.”
그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다가 말했다.
“오래 전 일이고 박 대통령도 돌아가셨으니까 이제 약간 말해도 될 것 같아 한 마디 할께요. 정인숙 사건이 터졌을 때였어요. 한강변에서 새벽에 젊은 여자가 총에 맞아 죽었는데 그 여자가 박정희 대통령의 여자냐 아니냐에 대해 신문에서 난리가 났었죠. 나보고 그걸 조사하라고 명령이 떨어졌어요. 나보고 먼저 미국을 갔다 오라고 하는데 앞이 막막하더군요. 영어를 에이 비 씨도 모르는데 왜 나보고 그걸 수사하라고 시키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러다가 짐짝도 미국을 갔다오는 데 사람인 내가 미국을 갔다 오지 못할까 하고 결심했었죠.”
그 사건에 관해 나는 조선일보 기자가 쓴 르포를 읽은 적이 있었다. 주미 한국대사관 파티 석상에서 대사를 손가락 하나로 부르던 젊은 여자가 있었다. 대사가 그녀에게 다가가 어디에서 오셨느냐고 정중하게 묻자 그녀는 ‘청와대’라고 대답했었다. 그 여자가 정인숙이었다. 그 정인숙이 1970년 한강변에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한국판 ‘크리스틴 킬러’ 사건으로 불리며 한 해를 떠들썩하게 했었다. 그녀를 죽인 혐의를 받은 오빠가 조사실에서 대통령 경호실장을 불러오라고 하면서 '개새끼들 일주일만 들어가서 고생하라'더니 하고 소리쳤다는 사건이었다.
“김대중 선생을 조사할 때는 어땠어요?”
1980년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김대중을 구속했다. 그리고 광주사태가 터졌다. 그때 김대중을 수사한 사람이 그였다.
“김대중 선생도 제가 여러 날 조사를 했죠. 참 엄 선생은 변호사고 많이 배웠으니까 하나 물어봅시다.”
그가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시죠, 뭡니까?”
“세상에선 김대중 선생이 고문을 당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 분을 고문한 적이 없어요. 그 분을 주도적으로 조사한 건 저 한 사람이죠. 다른 수사관들은 식당에서 밥을 가져다 주거나 경비를 섰을 뿐이니까. 저는 혹시라도 나중에 고문을 했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김대중 선생과 함께 있을 때 나도 보름 동안 조금도 잠을 자지 않았어요. 같이 자지 않았는데 그걸 고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질렸다. 그는 독한 사람 같았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지하실에서 김대중 선생을 조사하고 있는데 광주사태가 터졌어요. 김대중 선생이 광주사태를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하더라구요. 전남대에서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이 모두 한두 번씩은 서울에 와서 김대중 선생을 만났던 적이 있다는 걸 저는 알고 있었죠. 그 만남이 광주사태와 연결이 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에 의해 우발적으로 시위가 폭동으로 번진 것인지 저는 그게 알고 싶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광주의 상황을 보도한 신문을 김대중 선생께 말없이 가져다 드렸어요. 그걸 본 김대중 선생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가져다 준 식판 위의 밥을 한 알도 남김없이 다 드시더라구요. 그 다음 날인가 저는 다시 신문을 김대중 선생에게 가져다 드렸죠. 비상계엄이 전국적으로 선포된 내용이었어요. 군부가 모든 권한을 장악하고 정상적인 대통령선거가 불가능해지는 순간이었죠. 김대중 선생은 그 순간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더니 절망하더라구요. 그 반응이 내가 파악한 진실이죠.”
1980년 김대중 조사한 수사관의 증언
- 엄상익(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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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5, 22:14












호남 좌파는 진실이 없습니다
그저 입만 열면 거짖이 줄줄줄 나온다는거
허기사 온 국민이 거짖을 조금도 부끄러워 않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