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유(勅諭)

'짐의 오늘 이 거조는, 그대들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대들을 구활(救活)하자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황제는 이르노라. 짐(朕)의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왕업(王業)을 이어 받들어 임어(臨御)한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신정령(維新政令)에 관하여 속히 도모하고 여러 모로 시험하여 힘써온 것이, 일찍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으되, 줄곧 쌓여진 나약함이 고질을 이루고, 피폐(疲弊)가 극도(極度)에 이르러, 단시일 사이에 만회(挽回)할 조처를 바랄 수 없으니, 밤중에 우려(憂慮)가 되어 뒷갈망을 잘할 계책이 망연(茫然)한지라. 이대로 버려두어 더욱 지리하게 되면, 결국에는 수습을 하지 못하는 데에 이르게 될 것이니, 차라리 대임(大任)을 남에게 위탁하여, 완전할 방법과 혁신(革新)의 공효(功效)를 이루게 하는 것만 못하겠다.

짐이 이에 구연(瞿然)히 안으로 반성하고, 확연(確然)히 스스로 판단하여, 이에 한국의 통치권(統治權)을, 종전부터 친근하고 신임(信任)하던, 이웃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께 양여(讓與)하여, 밖으로 동양(東洋)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도 민생(民生)을 보전케 하노니, 오직 그대 대소신민(大小臣民)들은, 나라의 형편과 시기의 적절함을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동요하지 말고, 각각 그 생업에 편안히 하며, 일본제국(日本帝國)의 문명신정(文明新政)에 복종하여, 모두 행복을 받도록 하라. 짐의 오늘 이 거조는, 그대들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대들을 구활(救活)하자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 신민(臣民) 등은 짐의 이 뜻을 잘 체득하라.

순종 3년 8월 29일
융희 4년 8월 29일
(서기1910년 8월 29일)"

이리하여 1910년 8월 29일 한국과 일본이 韓日合邦 조약을 맺고 나라를 합쳤다. '합방'은 '동등한 자격으로 합친다'라는 뜻을 가진 어휘이다. 당시 英國과 美國은 이 합방조약을 지지했다.

日韓合邦 후 35년 동안 조선 王族들은 호의호식했다. 일본은 옛 조선 황실에 매년 120만 엔의 巨金을 지급했는데, 이는 일본 天皇家에 다음가는 큰 돈이었다. 그 무렵 일본 總理대신의 연봉은 1만 엔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많은 일본의 황족들은 李왕가를 부러워했다고 한다. 이와같이 고종(1852~1919)을 포함한 그 족속들은 희희낙락했던 것이다.

순종(1874~1926)은 1917년 6월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 천황을 알현했다. 영친왕 이은(1897~1970)은 고종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일본 軍部에서 승승장구했다. 1917년 5월 일본 육사를 졸업했고, 1920년 12월 일본 군부의 핵심 엘리트가 될 사람들만 가려 뽑는 육군대학에 입학했다. 1931년 8월 대좌로 진급해 보병 59연대장이 되었고, 1938년 7월에 소장으로 진급한 뒤, 1940년 12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영친왕은 1928년 일본인 아내 李方子(마사코)와 프랑스를 여행했고, 또 1961년에는 하와이를 여행했다.

의친왕 이강(1877~1955)은 고종의 아들로 일본에서 학교를 다녔고,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을 졸업했다. 여러 妻妾을 두고 12男 9女를 생산했다. 그의 두 아들 이건과 이우는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은 1947년 10월 모모야마 겐이치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귀화했다. 영친왕의 아내 李方子(1901~1989)는 남편 영친왕과 東京에서 거주했고, 末年은 朴正熙 대통령의 배려로 昌德宮 樂善齋에서 살았다.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 골든타임즈 2023-06-11 오전 9:49

    '칙유(勅諭)'라는 단어는, '임금이 몸소 타이르는 말씀'이라는 뜻을 가졌다. 즉, 臣民에 대한 포고문이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