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시 나는 내 성격대로, 내 가치관대로, 내 분수에 맞는 일을 나 스스로 찾아다니며 평생을 살았다. 가장 나답게 사는 모습이었다. 직장도 공부도 돈도 내 분수에 맞지 않으면 그만뒀다. 세계 어디든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언제든 날아갔다. 많은 세계인을 만났다.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속에서 나의 참모습과 진짜 한국인의 정체성(正體性)을 발견했다. 내가 원하는 진짜 행복이었다. 이것을 발견하는데 돈과 학벌은 필요하지 않았다. 신뢰가 제일 중요했다. 웬만큼 살아 보니, 이것만큼 크고 값진 재산은 없었다. 건강한 인간관계의 핵심이었다. 신뢰를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다는 것. 자기 분수(分數)를 알고 꼭 기억하고 살 것: 무신불립(無信不立), 과유불급(過猶不及), 음수사원(飮水思源).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遺產)이었다.
2. 결국, 돌이켜보면 처음에 짐 신부님이 나에게 하신 말씀이 맞았다. “대학이 왜 필요해요? 당신은 이미 한국말과 영어를 잘해요. 그것이면 충분해요.” 나는 이 말씀의 뜻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됐고 그렇게 끝났다. 내가 선택한 것이 내 기대에 어긋나면 바로 포기할 수 있었던 것도, 또 다른 무언가를 찾으려고 끊임없이 세계의 문에 노크한 것도, 다 이분이 내게 주신 말씀 안에 이미 있었다. 그것을 모르고 그 선(線)을 넘으려 했을 때 갈등이 생겼다. 애당초 아가페적 사랑도, 소명의식(召命意識)도, 학구적 자질(學究的 資質)도 없었다. 자칫, 이분의 말씀을 일찍 깨닫지 못했다면 평생을 헛살 뻔했다. 내 몸과 발에 맞지도 않는 신발과 옷을 꽉 움켜쥐고서…마치 돈키호테나 프로크루스테스처럼.
3. 생각해보면 나는 그야말로 분(分)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복(福)을 누렸다. 참으로 귀하신 분들을 지근(至近)에서 직접 뵙고 말씀을 듣고 식사를 하고 악수를 했다. 큰 영광이었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두 번이나 친견(親見)했다(1984. 5월 절두산, 1984년 10월 바티칸).
* 김수환 추기경님을 일주일에 평균 한 번씩 주교관에서 뵈었다(84년 10월 바티칸에서도 뵘).
* 서강대학교 데일리 총장님, 메이스 총장님, 스킬링스테드 총장님(84년, 바티칸에서도 뵘), 서인석 총장님, 박홍 총장님 그리고 프라이스 부총장님, 짐머덕 신부님, 안병태 신부님, 민기식 신부님(영문과),플레밍 교수, 트레이시 영어교육연구소 소장님(영어교육 테스트받음), 헙스터 신부님, 스팔라탄 신부님, 손 에드워드 신부님(조건없는 사랑 저자), 꼬마 데일리 신부님(운동장에서 함께 운동), 오 데스렙스 수사님, 민 다니엘 수사님, 염영호 학생처장, 이기석 수사님, 등.
* 이기백 교수님과 하버드 와그너 교수님(이기백 교수님의 ‘韓國史新論’을 번역(飜譯)차 내방(來訪)한 와그너 교수님과 우리 교수님과 자리를 같이했을 때),
* 임어당(林語堂) 석학과 테레사 수녀님의 서강대학교 메리홀 강연 참석.(수년 후, 테레사 수녀님을 인도 콜카타 사랑의 수녀회에서 또 만났다.)
** 미국 대사관 직원의 초대로 대사관저 파티에 참석, 세상 얘기도 듣고 신기한 영화도 봤다. 용산 메릴랜드 대학에 초대받음, 외국인 본당에서 만났던 수많은 나라에서 온 신자들(미사 끝난 후 갖는 파티에서 나눈 대화들, 특히 캐나다 사업가인 레릭스씨와 그 부인의 자택에 식사 초대를 받았던 점(아들 존과도 많은 얘기), 등.
4. 이분들과 함께했던 오랜 시간이 내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고 축복(祝福)이 됐다. 세계여행을 100개국 이상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분들과 만남이 있었다. 대화를 통해 세계를 배우고 꿈을 키우고 자신감을 얻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오래오래 살아있는 분들이다. (*내가 쌓아 둔 아름다운 추억들, 내가 경험한 재미있는 인생사(人生史), 이를 자랑스럽게 세상에 공개할 수 있는 것도 다 이분들 덕택이다.)
*에피소드1: 내가 수도원(修道院)에 간다고 했을 때, 왜 그렇게 답답하고 재미없는 생활을 하려고 하느냐며 극구 말리셨던 김수환 추기경님과 짐 신부님. 마침내, 어느 날, 짐 신부님이 나에게 말씀하시길, “추기경님이 오늘 요한에게 신부(新婦)감을 소개하신다며 나에게 요한을 데리고 명동 성당 앞 로얄호텔 스카이라운지 레스토랑으로 오라고 하셨다.”고 했다. 갑자기 긴장됐다. 따라나섰다. 잠시 후, 그 자리에는 실제로 추기경님(평복 차림)이 어느 신부님과 한 여성을 대동해 나오셨다. 다섯 명이 마주 보고 앉은 라운드 테이블. 그때 추기경님이 나에게 은근히 겁주시며 하신 말씀, “자, 요한아. 니…이래도 장가 안 간다고 할끼가?…” (*명동 성모 병원에 어느 신부님이 입원했을 때 간병(看病)을 했다. 아침마다 추기경님이 오셔서 환자 신부님에게 기도해 주셨다. 이때 옆에 있던 나에겐 항상 그러하시듯, “요한아 수고한다.” 하시며 꼭 내 머리를 만지시고 나가셨다. 매우 소탈하시고 잘 웃기셨다. 영어 일어 독어 능통하셨다.)
*에피소드2: 김수환 추기경님은 명동 성당에서 미사 중 맨 앞에 앉아 있는 나에게 직접 손짓으로 독서대(讀書臺)에 나와서 독서를 하라고 하실 때도 있었다. 견진성사(堅振聖事)도 서강대에서 추기경님으로부터 받았다(영세領洗는 박홍 신부님으로부터 받음). 또 한 번은 서강대 부총장님과 짐 신부님 그리고 메리놀 병원의 어느 수녀님의 합작(合作)으로 서강대 사제관 식당에서 파티 중에 깜짝쇼 선을 봤던 때도 있었다. 당시엔 일 년에 한두 번 사제관 식당에서 식사 파티가 있었다. 예수회 신부님들, 신학생, 돈보스코 수도회, 사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 메리놀 외방 선교회, 파리 외방 전교회 등에서 오신 분들이었다. 나는 여러 번, 이 파티에 참석하는 기쁨을 누렸다.
(외국인 신부님들 여행 가이드도 많이 했다. 특히 부산에 많이 갔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이분들은 내가 생선회와 멍게 해삼을 맛있게 먹는 걸 보면 질색(窒塞)을 했다. 특히 멍게와 해삼. 난 그것을 알면서도 자갈치 시장을 그냥 못 지나갔다. 나는 바다 냄새만 맡아도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더니 이해를 못 했다. 한번은 내가 태어나서 자란 영도 봉래동 3가(당시엔 바다와 맞닿아 있었다)와 내가 다녔던 영도 초등학교도 갔다. 영도다리도 일부러 걸어갔다. 당시 다리 밑에 많았던 나병 환자들 이야기, 내가 애들과 장난으로 영도다리를 건너뛴 얘기, (정오에 어김없이 고동 소리와 함께 영도다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그 이음새가 벌어지는 순간 그곳을 뛰어넘었던 얘기(당시 50년대에도 경비원은 있었지만 허술해서 가능했다). 그 뒤, 그분들은 말했다. “아하, 이제야 당신에 대해 좀 알겠군요. 하하” 한국의 시골 구경을 하고 싶은 분에겐 밀양까지 기차로 가서 거기서 버스로 창원군(지금은 창원시) 진영역까지 갔다. 첩첩산중이었다(꼬불꼬불 약 2시간 소요). 또 걸어서 약 30분. 아버지가 태어나신 곳이었다.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70년대만 해도 완전 시골이었다.)
*에피소드3: 이런 일도 있었다. 짐 신부님이 사정상 외국인 성당 영어 미사 집전을 못 하게 되면 서강대 부총장 프라이스 신부님이 대신 맡아 주셨다. 한 번은 강론(說敎)이 끝난 뒤 신자들에게 내 소개를 길게 하셨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에게 전혀 귀띔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해 수고하는 요한은 아주 독특한 사람이에요. 고집이 아주 세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꼭 하는 사람이에요. 10대 때, 전기기술을 배웠고 사장이 됐어요. 독학(獨學)으로 영어를 배우고 대학도 다녔어요. 지금은 대학원에 다니고 있어요. 또 한 가지 있어요. 세계배낭여행을 아주 좋아해요. 다음 주엔 인도(印度)로 배낭여행을 떠나요. 대단하지 않아요?”
(신부님의 말씀이 끝나자 신자들 모두가 나에게 고개를 돌려 축하한다며 박수를 쳤다. 미사가 끝난 뒤 언제나처럼 홀에서 티 파티가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평소와 달리 나에게 축하한다며 질문들을 쏟아냈다. 어떻게 혼자 영어 공부를 하게 됐는지, 기술은 몇 살 때 어디서 배웠으며 사장은 어떻게 될 수 있었는지, 인도에 가면 어디를 갈 것인지 등등. 이 같은 질문에 답변하는 건 정말 즐겁고 신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분들이 나에게 여행에 보태 쓰라며 봉투를 준 것이다. 봉투 안을 들여다보니 10달러짜리 지폐가 한 장, 혹은 두 장이 들어있었다. 적어도 백여 명의 봉투를 받았다.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신부님에게 물었다. 왜 내 이야기를 신자들에게 하셨느냐고. 신부님이 크게 웃으시며 왈(曰), “왜냐하면, 서양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아주 좋아하거든. 특히 자수성가(自手成家)한 사람을 좋아하지. 또 여행을 좋아하기 때문에 내가 요한의 여행 이야기도 한 거야. 어때? 요한도 여행 경비가 필요하잖아? 그렇지? 내 생각이 맞았지?”)
(실은 그 전에 이미 짐 신부님도 영어 미사 강론이 끝난 뒤 나를 신자들에게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그분이 강조한 것은 내가 자수성가했다는 이야기였다. 역시 신자들의 박수와 축하 인사를 많이 받았다. 알고 봤더니 이분들은 우리와는 달리 형식보다 내용을 훨씬 더 중시했다. 이는 실용주의 혹은 프래그머티즘 사상이 미국의 문화 밑바탕에 탄탄히 깔려 있음을 의미했다. 한 마디로 자립정신(自立精神), 탐구(探究)정신, 도전(挑戰)정신, 이 셋을 하나로 묶은 자유(自由) 정신이 곧 서양, 특히 미국을 지탱하고 이끄는 거대한 사상(思想)임을 엿볼 수 있었다.)
*에피소드4: 70년대 중반, 어느 날, 독일계 미국인 신부님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합정동 홀트아동복지회에 가는데 같이 가자고. 이유는 고아를 데리고 곧바로 김포공항으로 가는데,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 당연히 OK. 그곳에서 3살 남자아이를 데리고 김포공항으로 갔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신부님은 아이를 데리고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왠지 아이의 표정이 슬퍼 보였다. 말로만 들을 땐 전혀 느끼지 못한 것을 직접 보니 마음이 아팠다. 아이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12시간 후, 미국 공항에서 완전 새 얼굴인 양부모에게 안기게 될 것이다. 난 그 이후로 한국이 고아 수출 세계 1위라는 걸 실감했다. 일간지(한국일보) 독자란에 투고도 했다. 나름 적극적 예방 운동도 했다. 마침 한 수녀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만났다.
나에게 건넨 VHS에는 낙태 수술, 움직이는 태아를 끄집어내는 끔찍한 장면이 그대로 촬영돼 있었다(낙태 수술도 세계 1위). 미혼모(未婚母)를 줄여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기회가 날 때마다 홍보하고 설명했다. 마침 대선(大選)이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을 지지했다. 이유는 그의 공약에 ‘고아 수출 불명예를 종식한다.’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 성당에서의 경험: 내 앞에 40대 부부와 10살 전후의 자녀 둘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아빠와 엄마의 품엔 각각 한국 아기가 안겨 있었다. 한눈에 봐도 둘 다 뇌성마비였다. 미사가 끝난 뒤 용기를 내 물었다. “한국 아이를 입양한 것 같은데, 힘들지 않으세요?” 그의 답은 간단했다. “이 아이들은 물론 우리는 모두 다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표정 없는 두 뇌성마비 한국 아기들을 제외한 이들 부부와 두 자녀의 한결같은 따뜻한 미소에서 참 기독교 사랑을 발견했다. 부끄러웠다.)
5. 사실 예나 지금이나 무력(武力) 전쟁이든 경제(經濟) 전쟁이든 아니면 종교(宗敎) 전쟁이든 사상(思想) 전쟁이든 변치 않는 것이 있다. 사실(事實)에 기반(基盤)한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으로 무장된 개인과 조직 그리고 국가가 성공했다는 것. 그래서 이들은 여전히 이상(론)보다 현실(론)을, 감정보다 이성을, 형식보다 내용을, 말보다 행동을 더 중요시한다. 전자(前者)에 속하는 나라는 식민 지배(노예국가)를 받았고, 후자(後者)에 속하는 나라는 부강(富强)한 선진국이 되었다. 세계의 격전지(激戰地) 현장에 서면 더 실감한다.
6. 나토(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자-비겁한 사대부(士大夫) 후손들, 우물 안에서만 큰소리치는 가짜 지식인과 애국자들), 이들이 힘의 논리와 이성(理性)만 통하는 국제 사회에서 조롱받고 무시 받고 멸시당하는 이유이다. 자연법을 어기면 그렇게 된다. 약육강식(弱肉强食), 적자생존(適者生存), 자연도태(自然淘汰). 여태껏, 국내외(國內外)에서, 주변의 훌륭한 분들로부터 직접 보고 듣고 배운 것이다. 100개국 이상을 그냥 눈 구경하러 다닌 게 아니다. 가는 곳마다 반드시 대화를 나눴다. 다들 나를 부러워했다. 내가 어릴 때 잘 사는 사람을 부러워했듯이. 大韓民國에서 태어난 것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솔직히 꿈만 같았다. 이런 시대를 다 살아 보다니! 그들은 우리보다 넓은 땅도 많은 자원도 가졌다. 일도 죽도록 했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다.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죽으니까. 성공한 한국인은 가난하게 태어났지만, 부자로 죽는다. 고생한 보람을 느끼면서. 원인은 역시 위대한 지도자의 유무(有無)였다.
7. 나라가 없거나 빈곤하면 얼마나 비참한가를 현장에서 수없이 직접 보고 들었다. 내가 어릴 때 겪어 본 가난보다 훨씬 더 어렵게 살았다. 大韓民國이 다시 가난해지거나 망하면 저들보다 더 비참해질 것이다. 한가하게 거짓말, 가짜뉴스, 괴담으로 날을 세고, 세계여행(연 3천만 명)을 하고, 골프 치고 등산하고 시 쓰고, 다이어트하고, 트럼펫 불고, 노인 복지 타령이나 하는 분(分)에 넘치는 호사(豪奢)는 종(終)을 칠 것이다(이들 대부분은 건국자와 건국일 태극기에 관심 없다. 자기 자식들 미국에 둠). 아예 나라가 망하면(赤化되면), 신앙의 자유? 아무 말이나 마구 해도 되는 언론의 자유? 밥 먹듯이 하는 데모의 자유? 이사할 자유? 아프면 병원가고 약 타 먹는 자유? 등등. 모두 사라진다. 진짜 목사(스님 신부 수녀 공무원 경찰 군인 학자 언론인 법관)는 숙청된다.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 토실토실 귀여운 손주들 얼굴, 더는 스마트폰에서 볼 수 없다(북한 아이들 꼴 된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무병장수(無病長壽)한다는 자들, 허구한 날 건강 타령이나 하는 무책임하고 비겁한 평화주의자들, 전쟁 나면 먼저 도망갈 자들, 북괴와 중공을 절대 욕하지 않는 자들, 이들의 역겨운 위선(僞善) 짓도 멸진(滅盡) 된다.
8. 그러나 대한민국은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다. 지도자만 잘 뽑으면!!! 기분에 죽고 사는 기질(氣質)의 한국인, 정직하고 유능한 지도자만 다시 만나면 옛날에 그랬듯이 한국인의 기질은 순식간에 주경야독 칠전팔기 자강불식(自強不息) 정신으로 총발휘(總發揮)된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들어 낸다. 일약(一躍) G7, 아니 G2가 될 것이다. 세계여행은 더 신날 것이다. 한국인과 더 많은 대화를 하고 싶어 할 것이다. (*에피소드 하나 더:이집트 카이로 타흐리드광장 게스트하우스에 묵을 때다(2007). 항상 그러하듯 다국적 친구들과 대화를 나눈다. 설령 한국인과 일본인은 있어도 거의 볼 수 없다. 2~3일이 지났을까 40대의 일본인 남자가 일본인 특유의 예를 갖춰 내게 인사를 했다. “저 혹시 한국인 영어 선생님 아무개 아닌가요?” 난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아셨냐고 물었다. “일본인 배낭여행자들이 여행기를 올리는 데가 있는데 거기서 당신의 이야기를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어요.”
(그랬다. 나는 혼자 배낭여행을 떠나도 한 번도 혼자 다녀본 적이 없다. 외국인들과 합류(合流)한다. 그중 일본인도 포함된다. 짧게는 2~3일, 길게는 일주 이주. 그러니 에피소드도 많다. 암튼 이 양반 얘길 들으니 이집트와 인도 네팔 파키스탄에서 있었던 얘기였다. 즉 내가 그들을 도와준 얘기다. 일본인들은 바가지를 써도 면전(面前)에서 따지거나 싸우지 않는다. 그들은 글로 남긴다. 그들의 습성(習性)인듯. 그러나 나와 함께 숙식하다 보니 나에겐 말을 한다. 난 성격상 못 참고 가서 결국 사과를 받거나 환불받아 되돌려 준다.)
(인도 국경을 넘는 버스 안에서 있었던 얘기: 일본인 친구는 분명 차장에게 차비를 줬는데 차장은 안 받았다며 떼를 쓸 때, 나에게 도움을 신청한 것. 이 일본인은 이미 내가 차장과 같은 문제로 싸운 뒤 내가 이긴 걸 뒤에서 본 것이다. 차장이 자기에게도 같은 수법으로 생떼를 부린 것. 내가 조목조목 따져 해결했다. 그는 이런 이야기들을 읽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내가 더 놀랍고, 감사했다. 그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아마 그는 하루 이틀 나를 관찰한 후 말한 것 같다. 이때 난 아내와 함께 있었다. 우리가 체크아웃하던 날, 이 양반은 우리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복도 끝까지 따라와 일본식 허리 굽혀 인사를 했다. 오히려 그에게 내가 배울 점이 더 많았다. 등등. 나라가 잘되면 이런 장면을 세계 곳곳에서 더 자주 더 많이 보게 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
*나에게 그토록 궁금하고, 보고 싶었던 지구촌 세계, 그 꿈은 역시 성공한 大韓民國이 있어서 가능했다. 이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은 없다. *나는 또 하나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 내가 지구촌에 남긴 수많은 발자국, 그 위에 남아있는 나의 친구들, 그들은 나와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눈 친구였다. 그래서 더 또렷한 기억으로 남는다. 이를 자랑스럽게 세상에 공개하는 것이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끝>
*살아 보니, 역시 돈과 건강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선이면 족하더라.
*살아 보니, 역시 생존 기술 두 개는 필요하더라. 손기술과 말 기술.
*살아 보니, 역시 비겁한 가짜 친구 30명보다 진짜 친구 한 명이 더 좋더라.
*살아 보니, 역시 우물안 개구리(골목대장)보다 태평양 개구리가 더 좋더라.
*살아 보니, 역시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잘 뽑아야 나라가 잘돼 좋더라.
*살아 보니, 역시 나라가 잘돼야 세계가 알아주고 더 친절해 좋더라.
*살아 보니, 역시 자유가 없는 사회(공산, 전체)주의 국가는 생지옥이더라.
*살아 보니, 역시 건국자의 동상(기념관)과 건국일이 없는 나라는 한국뿐이더라.
*살아 보니, 역시 군인을 미워하고 경멸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더라.
*살아 보니, 역시 성공한 내 나라 자유 大韓民國이 제일 좋더라.
감사합니다.
The most blessed story of my life 10
-As predicted, the most significant value in my life was honesty-
1. I've spent my entire life seeking items that aligned with my personality and ideals, pursuing careers and studies if desired. I've traveled worldwide, meeting people from various backgrounds, and gained a deeper understanding of themselves and my Korean identity. I sought true bliss without financial or educational resources, focusing on trust and maintaining healthy interpersonal relationships. I've learned to avoid greed and remember grace, which I received from my parents. I've known trust is crucial for maintaining healthy relationships.
2. Looking back, Father Jim's initial advice to me was accurate, but I struggled to understand its meaning. I had already demonstrated proficiency in English and Korean, but when I unknowingly stepped over the line, conflict arose. I had no academic talent, unconditional love, or God's calling. So, if I continued pushing myself into inappropriate clothing and shoes I was turned fully insane. This experience resembled Don Quixote or Procrustes, where I was ready to go crazy.
3. Reflecting on the experience, I felt genuinely loved and blessed. Meeting nice people in person, hearing the Word, and shaking hands was a privilege.
* Met Pope John Paul II twice (in Seoul, May, 1984, in the Vatican in Oct 1984.)
* Met Cardinal Kim Soo-hwan at the bishop's office once a week. (also at the Vatican in Oct 1984.)
* People I met at Sogang Univ: President J.P. Daley, President Skillingstad, President Mace, Vice President Fr. Price, Fr. J.R. Murdock, The director of Fr. Tracy's Institute of English Education, Fr.Mcintosh(English Dep.),Fr. Herbst, Fr. Spalatan, Fr. Son Edward(author, unconditional love), Fr. little Daily, Brother Dethlefs, Brother Min Daniel, Brother Lee Ki-seok, Yom Yong-ho(a dean of students)
* Prof. Lee Ki-baek, Prof. Wagner of Harvard University, I was there.
* Prof. Lin Yutang and Mother Teresa when speeching in Sogang Univ's Mary Hall. I was there.
** The fact that I was invited to a party at the embassy's residence at the invitation of an employee of the US embassy. The fact that I was invited to the University of Maryland in Yongsan, and the believers from many countries I met at English Masses for Foreigners. The conversations we had at the party after Mass, especially the invitation to dinner at the home of Mr. Reriks, a Canadian businessman, his wife and their son, John.
4. The time spent with these individuals was a blessing in my youth, allowing me to visit over 100 countries. Conversations with them taught me about the world, fostered my aspirations, and gave me confidence. These individuals will hold a special place in my heart for the rest of my life. They've been living in my heart for a long time. It‘s because of them that I am able to proudly share with the world the amazing recollections I have gathered and the exciting life history I have lived.
Episode 1: I was surprised when Cardinal Kim and Father Jim asked me to to the Royal Hotel Sky Lounge Restaurant in front of Myeongdong Cathedral. I became nervous and followed him. Cardinal Kim introduced a lady to me, and he whispered "Come on, John," which frightened me. He wondered if I would declare I wouldn't get married. I took care of a priest in Myeongdong St. Mary's Hospital, and Cardinal Kim visited the sick priest every morning and prayed for him. He then said "Good work, John," touched my head, and walked away.
*Episode 2: Cardinal Kim Sou-hwan invited me to read a book during Mass at Myeong-dong Cathedral. I was baptized by Father Park Hong and received the Sacrament of Confirmation from Cardinal Kim at Sogang University. I was introduced to a young woman at Sogang University's priest's cafeteria by Father Jim and a nun from Merinoll Hospital. A dinner party was held at the rectory cafeteria once or twice a year, featuring Jesuit priests, seminarians, the Paris Foreign Missions Church, the Merinoll Foreign Missions Society, the Chartres Sisters of St. Paul, and the Don Bosco Convent. I have enjoyed attending these gatherings frequently.
(As a tour guide for foreign priests, I visited Busan and showed them the changing landscape. Despite the changes, I enjoyed eating raw fish and sea cucumbers. I visited the Jagalchi fish market and visited my birthplace and Yeongdo Elementary School. We also walked across the Yeongdo Bridge, I told them where I jumped over it for fun with my friends back then. For those interested in exploring the Korean countryside, I took a train to Miryang and a bus to the deep countryside, where my father was born. Although the landscape has changed significantly since the 1970s, it still retains the rural feel of the 1970s.)
*Episode 3: Father Price, vice president of Sogang University, filled in for Father Jim when he couldn't lead an English Mass at a foreign church. He gave a thorough introduction of me to the believers after his sermon. "John, a staff member, is a unique individual with a strong desire for success. He gained electrical skills, became a supervisor, and taught himself English. He is currently enrolled in graduate school and enjoys backpacking around the world. He'll be in India next week."
(During a tea reception after Mass, the believers congratulated me and asked me about my backpacking and then about my studying English independently. They also praised my talents and travel plans. I was surprised to receive envelopes with ten-dollar notes, which were delivered to me. Fr. Price explained that Westerners were fond of self-made individuals and enjoyed hearing stories about self-made individuals. Of course he told me they love to travel.)
(Father Jim also presented me to believers after the English Mass, highlighting my self-made nature. They emphasized substance over form, resulting in pragmatism deeply embedded in American society. It means this spirit of freedom, self-reliance, independence, and challenge supports and leads the West, particularly the USA.)
Episode 4: In the 1970s, a priest invited me to transport a 3-year-old child to Gimpo Airport from Holt Children's Services in Hapjeong-dong. The child's eyes appeared sad, and I felt intense emotional pain seeing the orphan in person. Unaware of the reason, the child was hugged by adoptive parents at an American airport twelve hours later. This experience led me to understand that Korea exported more orphans than any other country, and I sent the information to Hankook Ilbo, a daily newspaper, and made a strong effort to stop the export of orphans.
At that very moment, A nun sent me a VHS of an abortion scene, and I argued for fewer single mothers. I supported Roh Tae-woo's promise to stop exporting orphans, and later I attended a church in the USA with a 40-something couple with two children. The couple had two Korean kids cerebral palsy. I asked him about them, and the father reassured me that we were all children of God. I found what was the true Christian love from the couple.
-to the next page-5. Individuals, organizations, and nations with a fact-based spirit have triumphed in various conflicts, prioritizing reality over ideals, reason over emotion, content over form, and action over words. Countries that valued the former were colonized, while those that valued the latter flourished and were affluent.
6. NATO (No Action Talk Only) is often ridiculed and ignored in the international community due to its disregard for natural laws and the survival of the fittest. Despite visiting over 100 countries, I have learned from great people and found Korea to be envied by everyone. They felt pride in their country's resources, huge lands and hard work, but they failed while Korea has winned with nothing. It's from the conflict between excellent leaders and corrupt and inept leaders.
7. I've witnessed the devastating effects of poverty and the potential consequences of a country falling into the category of impoverished or without a nation. If the ROK was to fall into this category, it would result in the loss of freedoms such as religion, speech, and the ability to vote, as well as the freedom to travel, vote, and take care of oneself. This would also result in the loss of religious leaders, public workers, and police officers, as well as the ability to see loved grandkids on smartphones. I believe that the prosperity of the Republic of Korea has made my dream of a globalized world a reality, and I'm grateful for the blessings it has brought. I've also kept another promises of me to proudly share my life's journey with the world.
8. The Republic of Korea's temperament, influenced by emotions, will never fade away if it encounters a great leader like 60 years ago. The country will be G2 via G7, making travel more thrilling. A Japanese man in his 40s welcomed me as a Korean English teacher with traditional Japanese respect when we were staying at a Tahrir Square guesthouse in Cairo, Egypt, in 2007. I was surprised to learn about his knowing about me from a Japanese backpacker website, which uploaded detailed trip journals.
(I've never been alone, even when traveling alone. I mix with foreigners, including Japanese individuals, and have helped them avoid arguing and conflict. When crossing Indian boder by bus for example I helped a japanese as he was bothered by a bus man. He was appreciative of my action and I also found the Japanese man's politness. I hope to see more cases like this worldwide if the ROK continues to run well. I believe that young Koreans should explore the globe and learn from the experiences of others.)
*Because of Korea's development, my dream I was interested in has become a reality. I have fulfilled another of my vows to myself. I talked to the friends who stayed with me face to face. I couldn't wait to tell everyone about it. Thank you for taking the time to read my lengthy post. -End-
*Money and health are sufficient as long as they don't cause harm.
*Survival requires hand and speech abilities.
*A true buddy is preferable over 30 sloppy phony buddies.
*A country's development depends on carefully chosen presidents and National Assembly members.
*Korea is unique in lacking a statue of its founder or Independence Day.
Tha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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