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리 스콧 감독이 영웅의 인간적 면모를 그린 영화 '나폴레옹' 감상(鑑賞)
장군들의 수난시대라고 해야 하나?
요즘 장안엔 '찌질이 장군들' 얘기가 연말모임 곳곳에서 회자되고 있다.
장군님들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서울의 장군들은 딱 한 사람만 빼놓고 전부 다 죽일 X으로 묘사한 서울의 봄을 본 관람객 수가 오늘로 1111만 명을 넘어섰단다. 그러니 모였다 하면 서울의 봄 얘기가 화제다. 좋든 싫든.
그런가 하면 프랑스는 자기들 영웅 아니, 세기의 영웅 나폴레옹을 찌질하게 그렸다고, 리들리 스콧 Ridley Scott 감독한테 불만을 터트리고 있다. 숙적이라고 여겨온 영국 출신의 감독이 그것도 영어로 만들었으니 더 그럴 테지만, 리들리 스콧 감독은 50여 년 전쯤 나폴레옹의 언저리 실화(The Duellists, 결투자들)를 영화로 만들어서 데뷔했으니, 어찌됐든 나폴레옹에 대한 감독의 관심만큼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반세기에 걸친 관심은 애정에서 나오는 것일 테고.
어찌됐든 나는 오늘 그 영화 나폴레옹을 봤다. 절대로 찌질하지 않으신 장군님과 존경하는 총장님과 함께. 결론은 좋았다.
나이 90이 다 된 감독이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스펙터클했고, 그만큼 전쟁 장면들이 특별했다.
특히 얼어붙은 강, 하얀 눈밭에서 치러진 아우스텔리츠(Austerlitz) 전투는 치열하고 잔인하지만 수채화처럼 판타스틱하게 묘사했다.
그 누가 그 전투를
그렇게 표현해낼 수 있을까?
우울하게 묘사된 워털루 전투도 마찬가지.
군대를 안 다녀온 나로서는 보병과 기병, 포병이 작전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장면은 삼국지를 연상케 했다.
웃기는 연상이라고 하겠지만,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오리엔탈리즘을 인정한다면 나의 이런 직관도 부인하긴 어려우리라.
1980년대 초반 파리 살 때, 그리고 1980년대 후반 독일 살 때 벨기에 워털루에 갔을 때마다 에게게~~ 했던, 그 초라해보이던 평야가 영화에서는 광활한 벌판이자 거대한 구릉이었다.
카메라 기법의 결과겠지만,
그 또한 감독의 능력이리라.
어쨌든,
이 영화는 찌질한 남자 얘기도,
비루한 영웅의 얘기도,
영웅 비틀어 다시 보기도 아니다.
적어도 내게는 영웅의 인간적 면모를 영화적 기법으로 표현해낸 영화일 뿐이다.
영웅은 사랑하면 안 되나?
영웅은 사랑에 눈물 흘리면 안 되나?
영웅도 인간인데 실수하면 안 되나?
영웅도 신이 아닌 인간인데.
나폴레옹이 치른 전쟁에서 죽은 사람이 300만 명이라는 것도 나는 이 영화에서 처음 알았다. 그 엄청난 숫자가 나폴레옹에겐 괴로움의 원천이었을 테고, 그 괴로움의 그림자를 창녀 출신이라는 조세핀을 통해 지워보려고 몸부림쳤을 것이다.
대위에서 서른 살에 장군이 되고, 그 후에 황제가 되었다가 두 번이나 유배를 가서 50 초반에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남자한테 얼마나 많은 인간적 고뇌와 흠결이 켜켜이 쌓여있었을까?
그래서 '엄마' 얘기만 나오면 눈시울이 붉어지고, 부인과 모친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나폴레옹을 보며 조세핀은 '나 없으면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 것이리라.
엄마와 아내 앞에선 인간일 수밖에 없었던 나폴레옹이 쿠테타도 일으키고, 전쟁으로 300만 명을 죽이기도 했지만, 그는 프랑스가 근대국가가 되도록 그 기틀을 놓은 사람이다. 이미 1800년에 프랑스 중앙은행을 설립했고, 고등교육 시스템도 공고하게 만든 nation builder다.
그런 그의 일생을 영웅적 측면이 아닌, 인간적 측면에서 조명한 리들리 스콧의 영화 나폴레옹이 나는 영화로써 좋았다. 두 시간 반이 후딱 지나갈 정도로.
원래 리들리 스콧이 만든 나폴레옹의 원작은 4시간 반짜리라는데, 나는 그 원작을 보고 싶다. 아마도 잘려나간 두 시간짜리 분량엔 더 많은 나폴레옹의 인간적인 면모와 창녀였고 바람둥이였다는 조세핀을 위한 변명? 그리고 우리 모두 익히 다 아는 전쟁들이 리들리 스콧 식으로 판타스틱하게 넘실거릴 텐데…
4시간 반짜리 원작을
그대로 상영해줄 극장 어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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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메모
작년 말 개봉된 영화 '나폴레옹'은 역사를 왜곡했다고 해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글레디에이터' 등 흥행 대작을 많이 만든 리들리 스콧 감독이 영국인이라 프랑스 사람들이 특히 흥분하고 있다. 영화에 나오는, 나폴레옹 원정군이 피라미드를 포격했다든지, 병중의 조세핀이 보고싶어서 엘바섬을 탈출했다든지 하는 내용은 명백한 사실을 고의적으로 조작한 것이다(조세핀은 나폴레옹이 엘바섬으로 귀양가기 직전에 죽었다). 나폴레옹이 기병돌격에 참여하는 것으로 나오는 것도 전투의 상식을 외면한(한국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이 칼싸움을 하는 것처럼) 황당한 왜곡이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의 승자인 웰링턴을 만나는 장면도 유치한 조작이다. 루이 16세 부인 마리 앙트와네트의 처형을 지켜보았다는 이야기도 거짓이다.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나폴레옹을 장군으로만 묘사한 것은 그를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라고 했다. 인류의 유산이 된 민법전을 만든 법치주의자로서의 나폴레옹을 제대로 다뤘어야 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 자신도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말년을 보낼 때 자신의 가장 큰 공적을 민법전 만들기로 보았다고 한다. 이와 관련, 양삼승 변호사가 법률신문에 기고한 글을 소개한다.
*법률신문
<양삼승 변호사의 법가산책> ‘나폴레옹 법전(프랑스 민법전)’
2011.11.01 11:41
국력이 법력이다
프랑스 파리는 도시의 모양이 중앙의 개선문을 중심으로 모든 큰 도로가 방사형으로 뻗어있다. 반대로 보면 모든 길이 개선문으로 향해 있다. 이는 모든 권력이 하나의 정점으로 모이는 중앙집권적 권력형태와도 같다. 중앙집권식으로 통치하기 위하여는 국가 전체에 적용되는 통일된 법률, 특히 민법전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1789년의 프랑스혁명 직후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은 그 통치수단으로 세계에서 처음으로 통일된 민법전을 제정하여 1804년에 공포하였다.
흥미 있는 것은 법률가가 아니라 군인이었던 그가 민법전의 제정에 깊숙이 관여해 그 내용에 있어서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편찬위원회에서 마련된 초안은 국무원에서 총 102회기에 걸쳐서 심의되었는데, 그 중 57회의 회기에 그가 직접 의장으로서 심의에 참여해 논의를 유발하고 활기차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의 핵심을 파악하는 능력, 착상의 탁월함, 표현의 독창성, 추리력 그리고 훌륭한 말솜씨는 다른 어느 위원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특히 법률적으로 어렵게 표현된 문장들을 보면 단순명료한 질문으로 그 취지를 묻고, 더욱 명쾌하고 알기 쉬운 용어로 같은 의미를 표현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했다(티보도의 회고록). 프랑스어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민법전의 도처에서 이러한 표현들을 발견하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적과 흑’의 저자 스탕달은 문장연습을 위해 소설을 쓰기 전 매일 민법전을 읽었다고 할 정도였다.
특별히 기억해야 할 일은, 그가 당시 34세의 청년이었으며 한창 영국과의 전쟁을 수행중이었다는 점이다. 그의 민법전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은, 수년이 지나 세인트 헬레나의 유배지에서 그의 심복이었던 몬토론에게 한 말에 잘 드러나 있다. “내 진정한 영광은 40회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다. 워털루 전투는 많은 승리의 기억을 말살할 것이다. 아무도 말살할 수 없는 것, 영원히 살아있는 것은 나의 민법전이다.”
낡은 관습이나 군주적 온정주의가 아닌 이성의 명령에 터 잡은 세계 최초의 민법전인 ‘나폴레옹 법전’은, 함무라비 법전 및 유스티니아누스 법전과 더불어 ‘세계 3대 법전’의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그 후 이 프랑스 민법전은 ‘국력’ 또는 ‘합리성’ 때문에, 그대로 또는 약간의 수정을 거쳐 세계 여러 나라에서 받아들여졌다.
당시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던 벨기에, 룩셈부르크, 제네바, 모나코 등이 이를 받아들여 아직까지도 사용하고 있으며, 나중에 나폴레옹이 정복한 이탈리아, 네덜란드, 서부독일, 스위스에도 도입되었는데, 이는 ‘국력’을 바탕으로 한 예이다.
한편 프랑스 민법전을 ‘합리성’때문에 받아들인 예로는 볼리비아, 칠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콜롬비아 등을 들 수 있다.
관심을 끄는 것은, ‘역사적인 이유’ 때문에 미국 내에서도 루이지애나 주에서만은 프랑스법이 채택돼 있고, 역시 스코틀랜드도 대륙법계인 프랑스법이 지배하고 있다.
1868년에 메이지유신을 거친 일본도 역시 민법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당초에는 프랑스로부터 자문관(보아소나드)을 초청하여 프랑스 민법을 본받은 민법안을 준비하여 거의 완성단계에 까지 이르렀었다.
즉 서구에서 법제도를 도입하는 데에는 ‘판례법’ 국가인 영국보다 ‘성문법’ 국가인 대륙법계 국가로부터의 전수가 훨씬 용이하였고, 나아가 당시 유럽대륙의 최강자로서 중앙집권국가인 프랑스를 그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 후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즉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독일이 프랑스와의 보불전쟁(1870~71)에서 승리하고 1874년부터 독자적인 독일민법 초안을 준비중에 있었는데, 이 시점에서 일본은 방향을 바꾸어 유럽의 ‘새로운 강자’인 독일의 민법안을 따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독일은 1887년 제1 초안을 완성하였으나, 이것이 너무 이론적이고 난해하다는 비판을 받아 약간의 수정을 거쳐 1896년 제2 초안을 채택하였는데(다만, 시행은 황제의 개인적 희망에 따라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1900년 1월 1일에 하기로 하였다) 일본은 이를 모델로 삼아 1897년(메이지 29년) 일본민법전을 완성하였다.
다만, 일본민법전은 ‘손해배상의 범위’등 3가지 주요한 부분에서는 프랑스 민법을 따른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45년 해방된 이후 일본민법을 그대로 빌려쓰고 있다가, 1958년에 독일민법(따라서 일본민법)과 큰 틀을 같이하는 민법전을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다.
위와 같은 과정을 보면서 2가지를 느낀다. 하나는 법률은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산물’이고, 다른 하나는 ‘국력(國力)은 법력(法力)’이라는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영웅(英雄)도 인간인데 실수하면 안 되나?
- 박선영(前 국회의원)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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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30, 05: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