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십 년 만에 보는 눈인지 모르겠다. 눈만은 변함없이 오지만 마산이란 이름마저 없어져 버렸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을 여니 무학산에 눈이 왔다. 골짜기에는 땅이 덮일 정도로 쌓였고 산등성이에는 드문드문 쌓였다. 나무는 눈을 이고 서 있는 것도 있고 눈이 얹히지 않은 나무도 있다. 그래도 몇십 년 만에 보는 눈인지 모르겠다. 서울과 강원도에 눈이 많이 왔다더니 그 여파가 여기에도 이르렀나 보다.
이렇게 마산은 기후가 온화하고 부드럽다. 마산에서도 신마산은 더 따뜻한데 북마산보다 1~2도 정도 차이가 있다. 신마산 중에서도 더 온난한 가포에 국립마산병원이 있다. 산에 나무가 귀하던 시절이었지만 여기만은 소나무가 빽빽이 서 있었다. 5분쯤 걸어가면 천혜의 지리적 조건을 자랑하는 가포해수욕장이 있었다. 숲과 바다가 바로 맞닿은 해수욕장은 여기 말고는 없을 것이다. 가포는 마산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이었다.
이 가포해수욕장을 매립하여 新항만이란 걸 만들었고 예측과는 달리 항만은 텅텅 비었다. 간혹 마산을 떠나 사는 출향민들이 고향을 찾아와서 “가포가 이리 되도록 너거는 뭐했노?” 하면 할 말이 없어서 소매를 끌고 술집에나 데려가곤 한다.
병원이 귀하던 시절에 국립병원이 여기에 있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전국의 폐결핵 환자가 오는 곳인데 특히 글쟁이들이 잘 앓는 병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마산이 문학 동네가 되었고 이름난 문인을 보러 가는 여성들이 많았다. 자연히 연애가 이루어지고 그 과정을 그린 책들이 그 당시엔 넘쳐났다. 지금도 내 책장에 대여섯 권이 꽂혀 있는데 고등학교 때 그 책을 읽고 얼마나 부럽고 감동적이었으면 아직까지 보관하고 있겠나. 지금 읽어도 배울 것과 좋은 문장으로 가득 찬 책이다.
마산은 예로부터 기후가 좋고 물이 좋아 주류(酒類)산업과 양조(釀造)산업이 발달했다.인구가 16만 명에 지나지 않았던 60년대 초에 청주공장만 무려 열 개가 넘었고, 탁주 도가는 동네마다 없는 곳이 없었으니 술 담는 실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이미 산업화가 이룩된 70년대 중반에도 화이트 맥주를 마산에 지은 것으로써 술 담기에 적합한 기후였음이 증명된다.
세월따라 기후도 변하고 인심도 변하고 지리도 변하여 국립마산병원도 있는 둥 없는 둥 초라해졌고, 가포해수욕장은 인적이 끈긴 항만이 되었고, 동네마다 있던 술도가는 전설로 사라졌고, 그나마 하나 남았던 무학소주는 휘청거리며 힘들게 서 있고, 그 유명한 몽고간장은 어디로 갔는지 나도 모르겠다. 유명한 문학가를 면회하고 연애하던 그 소녀들은 늙어 죽었거나 꼬부랑 할매가 됐을 것이다.
한 세대가 가고 한 세대는 오는데 오는 세대에 전해 줄 것이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조용한 마을로 살아, 좋은 자연환경이나마 남겨줄 건데, 괜히 한일합섬이다 수출자유지역이다 한국철강이다 하여 한때 마산을 흥청거리게 만들어놓고는 저거가 먼저 사라져 버렸다. 차라리 여전히 궁벽한 갯마을이었다면 가포도 가포로 남아 있을 테고, 그 푸르디 푸르던 바다는 변함없이 창창한 바다일 테고, 제비산은 여전히 제비산일 건데…눈만은 변함없이 귀하게 오지만 마산이란 이름마저 없어져 버렸다.
아. 간밤에 무학산에 눈이 내렸구나
- 무학산(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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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5, 09:46












왜 굳이 마산과 창원을 통합해서 마산을 없애버렸는지 이해 불가다. 그래서 마산과 창원 사람들의 삶이 뭐가 달라지는지…꼭 합쳐만 하는 심오하고 원대한 이유가 있다하더라도 역사가 유구한 마산으로 합쳐지는게 순리 아닌가.
내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이은상 선생 시에 김동진 선생이 곡을 붙인 명 가곡 가고파의 고향 마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