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자본주의 우월성을 절실하게 경험하게 했던 기술 혁신 사건
이 사건은 기억을 더듬어서가 아니라 현재 보유하고 있는
북한에서 쓴 일기장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는 실화입니다.
1982~83년 겨울철, 함경남도 홍원 수산사업소에서
33가지 기술혁신 및 창의 고안을 한 적이 있습니다.
년간 6만 2100명의 노력이 절약되는 말 그대로 기술 혁신이었지요.
만약 이것이 남한에서라면 저는 떼돈을 번 부자가 되었을 겁니다.
당시 저의 직업은 농업 과학원 옥수수 연구소 연구사였습니다.
그런데 왜 분야가 다른 수산 사업소에 갔었냐구요.
북한에서는 농번기에 <농촌지원 전투>,
명태잡이 시절에는 <수산지원 전투>란 특이한 동원령이 있습니다.
동원령이 내리면 각 직장 단위에 인원을 차출하는데 과학 기관인
우리 연구소에도 어김없이 배당됩니다.
연구소에는 11개의 연구실이 있는데 각 연구실마다 1명씩 차출됩니다.
저는 당시 8 연구실(내병성 육종)에 있었는데 가장 젊은 제가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연구사 밑에 조수가 있는데 방정길이란 가정 주부였기에
타지에 동원시킬 수 없었습니다.
연구사로서 가장 젊었다는 것은 우리 연구소뿐 아니라 과학원적으로였습니다.
그러기에 김일성으로부터 <숨은영웅>칭호 받고 벤츠 선물까지 받은
벼 연구소 소장 김상련 박사가 저를 당겨가려고 할 정도였습니다.
가장 젊었다는, 나이가 23살에 대학 자격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남한 같으면 그리 젊었다고 볼 수 없지만 북한에서는 엄청 젊은 것입니다.
왜냐면 북한에서 대학 졸업은 군대 가지 않은 직발생이라고 해도
대학 5년에 <3대 혁명소조> 기간 3년 합쳐 해수로 26살에 돼야 합니다.
이것은 약과로 대부분 군대 갔다 대학을 나오기에 30살 이상 돼야 합니다.
저는 박헌영의 남로당 출신인 부친의 경력 때문에 토대가 나빠
북한 최고의 대학 김일성대, 김책공대 갈 실력이었지만 문건 불합격자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대학 자격을 더 빨리 쥘 수 있었습니다.
다행이도 검정(檢定) 제도가 북한에도 있었기에 자습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아무튼 가장 젊은 연구사란 <덕분>에
직업과 무관한 수산 사업소에 1개월간 동원되었습니다.
한창 진취성이 강할 나이 때이기에 새 분야가 어떤지 흥미롭기도 했습니다.
북한 수산기지 중에서 가장 큰 규모에 속하는 것이 홍원 수산사업소입니다.
1983년 홍원 앞바다에는 명태가 엄청 잡힐 때입니다.
명태를 잡는 것보다 산더미 같은 명태를 처리하는 것이 더 고민이었습니다.
잡아들인 명태는 벨트 컨베이어에 담아 25kg 단위 브로크 형태로
얼쿠어 냉동 창고에 쌓은 공정이 진행됩니다.
홍원 수산사업소에는 이러한 냉동 직장이 3개나 있었습니다.
밑바닥 노동자들과 함께 일해보는데 힘든 손노동이 많고,
지게 차 엔진 불량으로 나는 매연과 수산물 범벅의 열악한 노동환경이었습니다.
훗날 제가 머리가 좋아서 기술 혁신을 했다고 하나
사실 너무 힘들고 더러워서 이를 개조하면 안되는가 하는
탈출 심리로 탐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탐구 전 과정을 이해하기 어려운 독자들에게 다 설명드릴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년간 6만 2100명의 노력이 절약되는 33가지 기술 혁신을
작업 동원된 한 달 만에 연구해냈습니다.
남한의 월 평균 300만 원으로 치면 1863억 원 절약하는 것으로 됩니다.
그래서 남한 같으면 때돈을 번 부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노동자들은 더럽고 고된 노동에서 해방되니 환영하였습니다.
기술 책임자도 자기들이 그 동안 못한 기술 혁신을 한 달 만에 해주니 좋아했습니다.
이들은 큰 수산 사업소에 많은 처녀들 속에서 이쁜 처녀를 3명이나 소개하며
사업소에 남아 함께 일하자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들은 저의 연구소 간부들에게 요청하여 저를 한 달이 아니라 2개월 더 있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가장 좋아해야 할 직장장이 음으로 양으로 반대하는 것입니다.
기술 혁신하기보다 더 힘들게 애를 먹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저는 자본가에 빗대어 다음과 같이 일기장에 기록하였습니다.
1983년 1월25일에 쓴 일기장 구절 일부를 그대로 옴 깁니다.
<틀림없이 자본가들은 쌍수를 들어 좋아할 것이며
나에게 잘 대해주면서 리득금의 몇 %를 떼서 줄 것이다.
자본가들은 왜 그런가?.
자기 돈으로 경영하므로 자기 돈이 아깝고 자기가 잘 살자는 개인 이기주의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자본가들보다 태도상, 행동상 (왜) 뒤떨어지는가?
…주 되는 원인은 이해관계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해관계를 떠나서 공산주의적 태도요, 혁명가요,
애국주의요, 충실성이요 하는 것은 내 속으로 바라지 않는다.
…유일 사상 체계가 무서워 겉으로 말로써뿐이지 실지 사업과 생활면에서는 ...
항상 이해관계를 가지려 하는 것 일반적이고 합법칙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일반적 법칙성을 중요 하지 않고,
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
기술혁신하는 사람과 사업소 로동자들을
상대적으로 상금과 로임이 더욱 높이 지불되는 것을
눈으로 보여주고 육감으로 느껴지지 않은 조건에서
기술혁신을 하자고 하니 "쓴 오이 꼭지 먹는 듯한 것은"
당연한 리치라고 볼 수 있다.>
보다시피 직장장과 자본가와 비교하여 절절히 쓴 것입니다.
그 직장장은 제가 홍원 수산사업소 동원 작업을 마치고 떠날 때에야 속내를 말합니다.
<연구사 동무! 왜 기술 혁신을 반대하는지 아십니까.
기술 혁신하면 직장 운영에 막대한 지장이 닥쳐올 불안감 때문입니다.
왜냐면 매년 공짜로 로력을 동원해주는데 만약 기술 혁신하면
이 공짜가 없어집니다.
오히려 기술 혁신으로 생산 계획만 올라갑니다.
또 기술 혁신한 설비가 고장 나면 이를 수리 보수하느라 우리만 고생하게 됩니다.>
이 말을 본질은 내 것이 아닌데 괜히 기술 혁신해 봐야
이득이 아니라 손해와 고생만 더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직장장 입장에서는 이게 가장 현명한 처신인 것이지요.
1983년 당시 저는 25살이었습니다.
가장 폐쇄된 북한의 우물 안 개구리이지만
사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본의 아니게 <실험>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 후 32살 때인 1990년 5월 31일 집단농과 개인농 시험을 해보고
그 자료를 김 부자에게 편지 보냈던 역사의 뿌리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사회 공산주의 병폐를 과학 실험적으로 증명하면서도 탈북할 생각은 못 가졌습니다.
하지만 외부 세상의 진리를 접하자 즉시 반응하는 자가 됩니다.
남한 삐라를 보고 탈북 결심을 빨리 할 수 있었던 토대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글을 마치면서 -
본 직업이 아닌 타지 사람이 한 달 만에 기술 혁신으로 수만 명의 노력을 절약하게 했습니다.
이 기술 혁신은 알고 보니 거의 다 너무 간단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평생 본업 직원들은 왜 못했을까요.
저보다 머리가 나빠서일까요. 절대 아닙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기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 기술 혁신을 했다가 손해가 나기 때문입니다.
가시 아버지 산소 벌초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연고가 있어도 한 다리 걸치면 열성이 떨어진다는데
하물며 남남의 사회 공산 일에는 어떻겠나요.
대가는 고사하고 열심히 해봤자 고생만 하는 구조입니다.
한화 가치로 1863억 원 절약케 한 기술 혁신을 한 나도
사회적 칭찬은 있었지만 한 푼도 물질 상을 받은 것이 없습니다.
일하면 손해만 나는 체제가 과연 지속이 될까요.
소련과 동구권이 그래서 스스로 무너졌고
내 것이 되게 개혁 개방한 공산 국가만 살아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탈레반 같은 사회 공산 체제를 고수하는 북한은
말을 더 안 해도 뻔한 것입니다.
* 일기장 사진들은 제 페이스북에 올려져 있습니다.
북한 일기장이 없이 말하면 뻥으로 의심받을 소지가 큽니다.
일기장 사진을 원하는 분들은 보내드릴게요.
직장長의 실토 "기술 혁신하면 이 공짜 로력(勞力)이 없어집니다"
- 이민복(대북풍선단장)
-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2024-03-15, 22:03











